- 상주 은척의 뽕나무와 은행나무
백두대간 갈령작약지맥이 칠봉산을 지나 잠시 사현으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뭉어리재로 오른다. 여기에서 작약산으로 오르기 전 동쪽으로 넓은 골을 이루니 은척면 두곡리(杜谷里)이다. 원당(院堂), 동막(東幕), 포양(浦陽)을 병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마을 앞 수구(水口)를 막아야 부촌이 된다는 전설에 따라 두곡(杜谷)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진주(晋州) 류씨(柳氏)가 마을 뒤에 띠 집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띠실’이라 부르는데, 150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마을 안에는 350여 년이나 되는 큰 뽕나무가 있으며, 마을 앞에는 500여 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모두 지방문화재 기념물이다. 마을 앞으로는 최근 지방도 32호가 확장되고, 터널이 뚫려 교통이 아주 편리해졌다.
상주 은척의 뽕 나 무 소 재 지: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324번지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1972.12.29)
잠업(蠶業)의 역사는 아주 깊어 일설에는 기원전 BC 2560년경 중국의 3황(皇) 5제(帝)시대 황제(皇帝)의 원비 서릉(西陵)씨가 산책하던 중에 우연히 누에가 고치를 지어 놓은 것을 보고, 그 이용방법을 강구한 것을 잠업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 현종 19년(서기 1029년)에는 1가구당 뽕나무 묘목을 밭머리에 15~20그루씩 심으라고 명령한 기록이 있기도 하다. 양잠(養蠶)을 함에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바, 우리나라(남한) 최고령의 뽕나무가 바로 은척의 뽕나무로 이로 인하여 상주가 최고의 양잠(養蠶) 고장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태조1398.9.12)에 『農桑, 衣食之源, 民命所關。其令諸道監司, 分督郡縣.... 孟春植桑木, 仲夏植桑椹, 毋敢或怠。(농업과 양잠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백성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니, 그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들로 하여금 군현(郡縣)을 나누어 독려하여.... 첫 봄에는 뽕나무를 심고, 5월 달에는 뽕나무의 열매를 심게 하여 감히 혹시라도 태만하지 말게 할 것이다)』라 적고 있으며,
상주시사에『잠사회(蠶絲會) 25년사에는, 인조조(1623∼1649) 때에 국가적으로 뽕나무 재배를 권장하였다고 하니, 이 뽕나무가 아마 이 당시에 심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고려 말기에도 청효현에 사는 진사 김직지(金直之)의 「육익정기(六益亭記)」 기문(牧隱 李穡)에는, 송・국・죽・상・율・류(松菊竹桑栗柳)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양잠은 숭상되어왔다. 그 후 1515년에 재직한 상주목사 손중돈(孫中暾)의 선정비(상주박물관)에도 잠업을 권장(農桑盡業)한 기록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뽕나무 재배를 권장하였던 시기는 1568~1649년이다. 은척면 뽕나무도 대략 1623~1649년에 심은 것으로서 나이는 40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12m, 가슴높이 둘레 2.7m이다. 줄기는 둘로 갈라져 있으며, 뽕잎은 누에고치 30kg(蠶種 1장)를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왕성하다』라 기록하고 있다.
이 뽕나무와 지근거리에 있는 이안면의 여러 곳에도 고목의 뽕나무가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으며, 이는 누에고치의 본 고장이라 자랑하는 상주의 오랜 잠업(蠶業)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는데, 함창에 소재하는 경북잠사곤충사업소를 방문하면 많은 노거수 뽕나무를 만난다. 이 뽕나무 앞에는 명상기념비(名桑記念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1935년에 상주군수 최병철(崔秉轍)이 세운 것이다.
최근 경북 상주가 ‘양잠산업의 메카’로 거듭나기 위하여,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이안면 구미·안용리 일원 100㏊에 뽕나무 생산단지와 집하·선별·공동작업장 등을 갖춘 뽕나무 생산 거점을 구축한다. 또 같은 기간 동안 함창읍 함창명주테마파크 내에 누에와 다른 곤충을 연계해 기능성 식품과 의약품 등으로 연구·개발하는 연구·가공·교육시설 등을 건립하거나 유치해 ‘명주 융·복합 거점지구’로 조성키로 한다고 하여 퍽이나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잠업이 새롭게 기대가 되는 소득 작목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상주 은척의 은행나무 소재지: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640번지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75호(1987. 5. 2)
은행나무는 공손수(公孫樹)·행자목(杏子木)·학자수(學者樹)라 하며,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하는데, 열매를 맺는 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 산다고 하며 침엽수에 속한다. 마을 앞 동구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거목(巨木)으로 수령(樹齡)이 500여 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생장 상태도 양호하다.
‘銀杏나무記念碑’에는 「한 나라의 歷史가 興亡盛衰와 榮辱속에서 發展하듯이 한 마을의 오랜 歲月의 悠久한 歷史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洞口에 있는 銀杏나무는 뽕나무와 함께 우리 洞里와 숨결을 같이 해왔으며 壽齡은 칠백년 혹은 五六百年이 되었다고 하나 文獻이 없어 正確한 年輪과 심은 이는 알 수 없다. 이 나무는 암나무로서 높이 15m 가슴높이둘레 8.3m 뿌리부분둘레 13m로 가지는 동서쪽으로 22m 남북 쪽으로 25m이다. 麗末의 文士 稼亭 李公(穀)이 高僧 普濟(懶翁)와 같이 往來遊泳하며 銀杏나무 아래에서 쉬어갔는데 그늘이 좋아서 ....... 이 나무는 實로 洞里를 지키는 守護神이요, 靈木이요, 德木이라 할 수 있다. 지난 七月末 洞會議時 洞民諸位가 뜻을 모아 이러한 靈木의 德을 기리기 위하여 銀尺面 支援金과 地域有志의 숭고한 뜻을 모아 簡略한 來歷을 적어 오늘 이 碑를 세운다. 檀紀四三二十九年九月 日, 西紀一九九六年. 柳承相 謹識」이라 적고 있다.
마을 어른들은 옛 부터 나무의 생태를 보고 풍·흉년을 예상하기도 하였다는데, ‘가을에 은행잎이 하루 이틀 사이에 다 떨어지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들고, 여러 날을 두고 잎이 떨어지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6.25 때에는 이 마을과 주민들의 피해가 없었다고 전해져 이 은행나무가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금년 여름 혹독한 가뭄을 이겨내고 많은 열매가 구슬같이 많이도 달려 있네요. 이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민속학적(民俗學的)・생물학적(生物學的)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주변에 면적을 확대하고, 마을 진입로도 변경하는 등 관리에 정성을 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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