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97) 상주 화서의 숭강사(崇康祠

장안봉(微山) 2019. 7. 25. 18:50
(97) 상주 화서의 숭강사(崇康祠)
번호100작성일2016.10.04조회수426
작성자김광희
첨부파일파일받기 크기변환_20160913.숭강사14.jpg
  • 상주 화서의 숭강사(崇康祠)
    소재지: 상주시 화서면 중화로 1896-4

    백두대간이 봉황산(鳳凰山:740m)에서 화령재로 내려앉아 윤지미산으로 내달리기 전에 오른쪽으로 원통산(圓通山:597m)을 빗는다. 이 산 끝자락 49번 지방도변에 장림마을을 바라보며, 신사년(辛巳年)에 창건 된 건물이 있으니, 출입문은 앙지문(仰止門)이요, 재실은 숭모재(崇慕齋)이고, 사당은 숭강사(崇康祠)이다.

    재실 앞에는 「綬祿大夫坡原尉康夷君神道碑碑」가 竪立 되어 있는데, 成均館長 月城 崔昌圭 謹撰에 全州李成福 謹書 입니다. 화서 장림은 장림역(長林驛)이 있었다고 전하는 곳으로, 유곡도(幽谷道) 찰방(察訪)에 속하였으나 1896년에 폐지되었다.
    원래 숭강사는 장림마을 중간부분쯤 뒤 언덕배기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기와지붕으로 판서공(判書公) 윤 폐(尹 敝)의 子로, 본관은 파평(坡坪)이고, 파원위 강이군(坡原尉 康夷君) 평(泙:1420~1467년)을 봉안(奉安)한 묘우(廟宇)이다.

    강이군은 16세에 태종(太宗)의 여(女) 숙순 옹주(淑順翁主)를 취처(聚妻)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용모우아(容貌優雅)하고, 의상단정(儀狀端正)하여, 성품고결(性品高潔)하며, 주야유능(晝夜有能)하여 해내(海內)에 널리 평찬(評贊)을 받았다고 한다.
    학식이 뛰어나고 지혜가 있어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일도 있으며 훈민정음의 창제뿐만 아니라, 경국대전(經國大典) 세조실록(世祖實錄) 동국통감(東國通鑑) 오례의(五禮儀)도 왕명으로 편찬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 많은 功으로 정이품(正二品)에서 수록대부정일품(綬祿大夫正一品)을 제수(除授) 받았다고 한다. 묘소는 밀직공(密直公) 취(就) 묘하(墓下)에 쌍봉(雙封)하고, 비문은 영상 신숙주(領相 申叔舟)가 찬(撰)했다고 전한다.

    수록대부 파원위 강이군 불천위(綬祿大夫 坡原尉 康夷君不遷位)를 의빈부(儀賓府)에서 봉안 하시다가 1904년 군(君)의 14世孫 휘(諱) 택영(宅榮)에게 봉안 하랍시라는 왕명을 받고, 당시 상주 군수가 배영(陪迎)하여, 상주 화령 장림촌후(長林村後)에 택길(擇吉)하여, 숭강사라 명(名)하여 임시로 묘우를 건립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9년 예손(裔孫)이 합심 협력하여 묘우를 개축하여 봉안하여 왔으나, 시대의 변천과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수록대부 파원위 강이군의 묘소(고양시)가 주택지로 편입되어, 2001년에 상주시 화사면 율림리로 이장(移葬)을 하면서, 재실과 사당을 새롭게 세운 것이다.

    장림마을 뒤의 옛 숭강사 건물은 그대로 두고 현판은 선덕사(宣德祠)로 바꾸어 달았으며, 강이군은 새로운 숭강사에 봉안하게 된 것이다. 옛 숭강사 역내에는 네 분의 지위(之位)가 서 있으며, 담장 밖에는 윤상조 송덕비(尹相祚頌德碑)가 서 있기도 합니다.

    파평윤씨 상주 입향조(入鄕祖)의 호는 감모헌(憾慕軒)이고, 자는 경파(景坡)이며, 대언공파(代言公派)에 속한다. 公은 광해 계축(光海癸丑)에 사화(士禍)를 피하여 인심 좋은 선비의 고장을 찾아 상주 땅 속리(俗離) 남록(南麓) 오십리 허(五十里許) 화령장림동(化寧長林洞)에 새 터를 여니 4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후손 중에 한현(漢鉉)은 자는 사명(士明)이요, 호는 용강(龍岡)이며, 첨절제사(僉節制使)라 상주서보(西堡)를 설계한 인물이며, 그 후부터는 수해를 면(免)하여 평안히 살게 되었다고 후세에 전하고 있으며 화서면 율림리(장림마을)는 파평윤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