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령탑蠶靈塔」! 누에의 영혼을 위로하다.
인간은 생사(生絲)를 얻기 위하여 생장 도중에 있는 누에고치속의 번데기를 죽여야만 하기 때문에, 누에의 영혼(靈魂)을 위로하기 위하여 잠령 탑(塔)을 세워 매년 봄에 엄숙한 의식으로 잠령 제(祭)를 올린 것이다.
이러한 잠령 탑이 상주에는 두 곳이 있으니 하나는 경북잠사곤충사업장(함창읍 무운으로 1621-27)으로 이塔은 당초 1930년 3월에 대구 봉산동(잠업시험장)에 세워졌으나, 1962년 2월 상주로 시험장이 이전(복룡동)함에 따라 오게 되었으며, 이후 2013년 4월 사업장이 다시 함창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건(移建)되었으며, 탑에 사용된 비신(碑身)과 기단부 일부의 석재는 당시에는 아주 귀한 제주도 바다에서 채취한 해중석(海中石)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탑의 높이는 기단부 1.85m, 비신 1.70m로 전체높이 3.55m이고, 명문은 "蠶靈"으로 글자 크기는 0.3*0.84m로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경북대학교 상주켐프스(상주시 경상대로 2559)내에 소재하는데, 이는 1931년 3월에 세운 것이다.
양잠은 일찍이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 중요성을 인식 시키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하는 것으로 의식을 갖춘 친잠례(親蠶禮)와 수견례(收繭禮)로 구분 하였는데, 1411년(태종11년)부터 기록이 보이고, 왕비가 직접 행한 것은 성종 때(1477년)로 적고 있다. 누에의 일생은 알~애벌레~번데기~나방으로, 한 마리의 나방은 약 500여개를 산란한다. 누에는 1령(齡)에서~5령(齡)을 지나 번데기와 나방으로 변(變) 하는데, 4번 허물을 벗는 아주 신성한 영물(靈物)로, 옛 어른들은 관리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고치를 짓기 위하여 한 마리의 누에는 약 1,000~1,500m의 실을 입으로 뿜어낸다.
1960년대 박정희정부 시절 조국근대화에 절실했던 외화 획득의 효자작목이 바로 잠업이라는 사실이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경제대국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21. 4.25에 개교한 상주공립농잠학교 역시 잠업을 가르쳤던 것이다. 처음의 잠업은 누에품종과 뽕나무 역시 재래종이라 수확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1925년부터 일본이 고치생산 증수계획을 세우면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1963년부터 잠업증산책으로 천수답을 상전(桑田)으로 전전환(田轉換)하면서 면적이 넓어져 1967년에 1,674ha, 1970년에는 2,557ha로 상주 최대의 면적에 이르고, 마침내 1974년에는 상주에서 1백만kg의 고치를 생산하여 전국 제1의 잠업생산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상주는 양잠의 본 고장이라 4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경북기념물제1호인 “은척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에서 수확하는 뽕잎으로 잠종 1상자를 사육하여 누에고치 30kg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나무 앞에는 명상기념비(名桑記念碑)가 서있는데 이는 1935년에 최병철 상주군수가 세운 것이다.
이러한 양잠산업이 1980년대부터 사양길로 접어들어 일반농가에서 누에를 치는 것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고, 교육 역시 잠업 또는 잠사학과도 없어지고 말았으며, 최근에는 화장품, 의약품, 신소재직물 등의 원료로 세간의 주목을 받아 새로운 방향으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한다. 최근에는 동물위령탑도 세워지고 있으나 역사성이 있는 두 곳의 잠령탑은 귀중한 자료로 아주 자랑스러운 것이다. 상주함창은 명주고장이라 아직도 십 수호가 참여하여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데, 명주박물관에서 명주의 우수성을 홍보 하고, 매년 축제도 열리고 있는 것이다(참고:상주박물관 자원봉사자 교재. 뉴스상주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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