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동강 층암절벽 위에 관수루(觀水樓)
상주 낙동의 낙단교 건너편 사시사철 푸른 강물의 용바위 아래 층암절벽에 서있는 「관수루觀水樓」입니다. 백두대간 낙동정맥 팔공지맥의 만경산(萬景山:499m) 끝자락으로 뒤로는 만경산이요, 강 건너 맞은편에는 갑장산과 나각산이다. 소재지는 912번 지방도가 지나는 옆 언덕배기로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산117-1이지요. 창건 년대는 고려중엽으로 보고 있지요. 이곳은 1914년 군·면 통·폐합이전까지는 상주의 단남면 이었습니다.
청대 권상일 선생이 찬(撰)한 중창기에 보면 원래 관수루는 서쪽 강둑(낙동)에 있었는데, 후에 동쪽 강둑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이후 1653년, 1735년(상주목사 김태연), 1842년, 1874년에 중수, 중창한 기록이 전하고 1990년에 지역의 유림과 의성군에서 현재와 같이 복원했다고 전 합니다.
이 樓는 映湖樓(안동), 嶺南樓(밀양)와 함께 영남(낙동강)의 3대 樓의 하나지요. 많은 제영(題詠)이 걸려있는데, 고려의 대문장가인 백운 이규보, 강고 류심춘,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 이황, 탁영 김일손, 조선조 사림의 대부 점필재 김종직의 시문이 있으며, 계당 류주목의 중수기, 청대 권상일의 중창기도 걸려 있네요.
이 樓 앞에 세워진 碑文을 옮겨보면 「洛東江의 本流 要所에 映湖樓, 觀水樓, 嶺南樓를 짓고 支流 南江에 矗石樓를 세웠음은 먼 高麗朝의 役事였다. 오랜 옛날부터 仙人들의 達觀하는 風流는 格調 높았음을 立證한다. 三山二水가 모여드는 佳景에 嶠南通行의 中樞가 되던 곳 洛東津의 觀水樓는 詩人墨客이 즐겨 찾았고 끊임없는 來往客이 쉬어갔다. 創建以來 尙州고을에서 다섯 차례의 修築史錄이 傳하고 江西에서 流失되어 東岸으로 옮긴 것은 李朝初葉이었다.
高宗 甲戌年의 水魔에 잃고 廢墟로 내려오다가 昨年九月에 再建되니 百十四年 만의 蘇生이요 오래 잃었던 風韻을 새로 찾은 快擧다. 樓의 復元을 謀劃하던 哀情을 듣고 鄕土出身 梁道鶴氏는 巨金을 내어 建物工事를 獨担하니 永世不忘의 功績을 남겼다. 北으로 높이 자리 옮겨 安全하고 展望이 더욱 좋은 터를 닦아 定했음은 道當局의 配慮와 敷地寄托의 功이 크다. 今年들어 義城郡費로서 丹靑과 防柵造景등을 마치니 山川은 增色되고 洛井은 繁華를 겹쳤다. 梁公의 特志와 各界의 誠意에 보답해서 樓의 安全한 保存에 모두가 關心있기 바라며 그 顚末을 새겨 碑를 세워둔다. 西紀1989年 乙巳 十一月 日 觀水樓重建推進委員長 李重憲謹書 」라고 적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다잡게도 합니다.
점필재 선생의 낙동진(洛東津)의 시문은 「津吏非瀧吏 뱃사공은 이곳 사람이 아니오, 官人卽邑人 관리는 이 고을 사람, 三章辭聖主 석 장의 글월로 성주에게 사례하고, 五馬慰慈親 오색 꽃과 말로서 나의 어머니를 위로하네. 白鳥如迎槕 백조는 돛단배를 맞이하고, 靑山慣送賓 청상은 너그러이 손님을 보내네. 澄江無點綴 맑은 강은 한 점 흐림 없으니, 持以律吾身 이로서 내 몸 규율로 삼고 싶네」라고 했네요,
관수루의 觀水는 老子의 道德經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요, 오량가(五樑架) 이익공(二翼工)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4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개방이고, 위층은 통간(通間)으로 처리한 우물마루이며, 사방에는 계자각(鷄子脚)을 세운 헌함(軒檻)을 둘렀다고 합니다.
소재지 관할은 차치하고 의성의 단밀과 상주의 낙동은 상생관계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미 1965년부터 단밀면의 일부는 낙동중학교로 한 학구로 되어 지역주민들은 친밀한 이웃관계이다. 최근 낙단보와 그 주변의 풍광이 그림 같아 이곳을 찾는 이가 많아져 상주낙동 한우촌의 손길 또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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