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인(貞夫人)안동권씨(安東權氏)는 청풍김씨 김인백(金仁伯)의 처(妻)로 그 후손들이 크게 출세하여 귀하게 됨으로써 정부인 권씨의 묘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발복으로 인하여 조선 8대 명당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묘소의 위치는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의왕시청 인근에 있다.
묘소 입구에 들어선 순간 둥글고 넓게 감싸인 묘가 인상적이었다. 보기 드문 큰 와형(窩形)의 중심부에 위치한 묘를 향하여 가면서 좌우를 둘러보니 치산(治山)이 잘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군데 눈에 거슬리는 곳이 있는데 묘를 감싸며 원진수(元辰水:청룡 백호 안의 물길)를 역수(逆水)하는 중요한 부분인 청룡쪽 끝부분에서 내당(內堂)으로 뻗은 줄기가 잘려나간 흔적이 보였다. 와혈(窩穴)에서 필요한 우각사(牛角砂)의 형태가 되는 부분을 잘라내어 그 흙으로 바닥을 메운 것으로 생각되는데 치산(治山)하는 과정에 지관(地官)의 참여 없이 공사를 벌인 것 같아 안타까웠다.
묘 앞에 이르러 묵례를 올리고 나서 전후좌우를 둘러보며 생각하기를 우리 회원들에게 활와(濶窩)의 장구와혈(張口窩穴:좌우(左右)양국(兩掬)이 교회(交會)되지 않은 것으로 양국이 교회된 장구와혈(藏口窩穴)과 대비(對比)됨) 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장(穴場)과 입혈맥(入穴脉)에서 혈정(穴情)을 살피기 전에 입수룡(入首龍)이 궁금하여 입혈맥을 거슬러 올라 혈성(穴星) 뒤로 연결된 입수룡으로 이동하였다.
입수룡은 살아 있는 뱀이 꿈틀거리며 나가듯이 굴곡(屈曲)하여 내려오는데 곤(坤)에서 신(申)과 경(庚)을 거쳐 유(酉)로 성두(星頭)에 이르렀는데 도두일절(到頭一節)에서 크게 한번 기복(起伏)하고 속기(束氣) 하였으니 입수룡의 조건인 굴곡과 기복과 속기를 다 갖추었다. 특히 기복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속기하고 다시 비룡(飛龍) 입수처럼 올라가 성두(星頭)에 이르니 완벽한 기복과 속기가 되어 아름다웠다. 이곳 도두일절은 혈을 맺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입수룡을 따라 다시 내려와 혈성(穴星) 머리에 올라 주변을 살피니 두 줄기로 나뉘는데 하나는 해(亥)맥으로 내려가 우백호쪽 줄기가 되고 다른 하나는 곤(坤)맥으로 내려가 입혈맥을 이루며 더 나아가 좌선(左旋)하여 좌청룡쪽 줄기를 이루었다. 그 형태가 마치 왼손을 들어 손바닥이 오른쪽을 향하게 세워서 둥근 공을 잡고 있는 형태를 취한다면 입수룡은 손목이 되고 엄지손가락은 우백호쪽 줄기가 되며 집게손가락은 좌청룡쪽 줄기가 되는 인체의 손 모양에 비유할 수 있겠다.
혈성 머리에서 내려간 입혈맥(入穴脉)은 혈(穴)로 곧게 가지 못하고 곤(坤)맥으로 내려가다 술(戌)맥으로 꺾여 혈로 들어가니 입혈12맥(入穴十二脉) 가운데 편맥(偏脉)격으로 횡룡입수(橫龍入首)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입혈맥이 꺾이는 지점을 살펴보니 솟아 오른 곳이 없고 위아래보다 살찐 곳도 없이 오던 그대로 경사되어 청룡쪽 줄기로 내려가니 오는 기운을 멈추어 혈로 보낼 수 있는 형태가 부족하다. 즉 상현(上弦:뒤에서 감싸 주는 현릉(弦稜) 즉 와(窩)의 테두리)에서 혈(穴)로 들어가는 입혈맥을 내려 보내기 시작하는 지점인 곤(坤)맥에서 술(戌)맥으로 꺾이는 지점이 전혀 솟아오르지 못하여 맥을 타고 오는 기운이 멈추어 혈(穴)로 들어가지 못하고 청룡쪽 줄기로 그대로 빠져 나가는 형태로 볼 때 온 산의 기운이 집중되어야 할 혈(穴)로 들어가는 기운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겠다.
뒤편을 보니 바위돌이 두어 군데 있고 그 아래로 줄기가 내려가니 횡룡입수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귀(鬼)를 형성하고 있었다. 혈로 들어가는 맥의 반대편에서 탱조(撐助)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어 이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꺾인 최종적인 입혈맥(戌脉)은 미약하나마 분수(分水)가 분명하게 솟아 내려간 형태이나 혹시 인작(人作)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물론 이것이 천연적이라면 필자의 우려는 다소 감소될 수 있겠다. 이상과 같이 입혈맥의 꺾인 부분이 솟아오르지 못하고 양 옆으로 풍만하게 살쪄 배부른 부분도 없는 것이 이곳 최대의 첫 번째 결함이 되었다.
입혈맥을 따라 혈장(穴場)에 내려와서 살펴보니 넓은 와혈(窩穴)의 조건이 떠올랐다. 글에 보면 “와형(窩形)이 넓은 것은 개구(開口) 가운데가 넓은 것인데 너무 넓어 공허하면 안 되며 좌우로 사귀어 모이고 요컨대 와중(窩中)에 작은 유돌(乳突)이 있어야 하며 유두(乳頭)나 돌정(突頂)에 작혈(作穴)해야 합격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그 공망(空亡)허냉(虛冷)한 와(窩)로 기(氣)가 응취(凝聚)하지 못한다.... 만약 와형이 너무 넓고 또 유돌(乳突)이 없고 현릉(弦稜)이 분명하지 못하며 좌우가 편파(偏頗) 되거나 양쪽의 감싸 안음이 사귀지 못하면 장사 할 수 없다. (窩形之濶者開口中寬濶也 寬旣寬濶不宜太濶空 左右交會要窩中有微乳微突 就乳頭突頂安扦 方爲合格 不然多是空亡虛冷之窩 氣不凝聚 ..... 若窩形太濶 又無乳突 弦稜不明 左右偏頗 或兩掬不交則不可下也)”고 하였다. 이곳은 분명 넓은 와형으로 유(乳)나 돌(突)의 육지(肉地)가 필수적이다. 돌(突)은 없으나 미유(微乳)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최종 입혈맥과 혈장이 지금보다 더 풍만하게 융기(隆起)하여 앞으로 더 나왔어야 하는데 마지못해 겨우 흔적만 남긴 형태로 아쉬움이 크다. 이곳 최대의 두 번째 결함이 되었다.
혈장(穴場) 좌우를 보니 청룡 쪽은 혈장의 높이와 바닥이 거의 평평하여 분수(分水)가 모호하다가 순전(脣氈)쪽으로 내려가 겨우 분수처(分水處)의 요철(凹凸)이 드러나 혈장의 윤곽을 드러냈으며 백호 쪽으로는 처음부터 분수가 분명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혈장 높이와 현릉 사이에 물길처럼 낮은 곳이 확실해야 하는데 청룡 쪽은 거의 평평하게 되다가 순전 부분으로 내려와서야 혈장 높이 보다 낮아졌고 백호 쪽은 그래도 처음부터 낮은 곳이 형성되어 분수(分水)가 분명하고 미유(微乳) 즉 다소 높게 살찐 혈장을 드러냈다. 물론 순전 쪽은 더 분명하게 솟아 앞으로 배불리 나갔으나 인작(人作)일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겠다.
이상과 같이 혈장이 풍만하게 솟아오르지 못하고 분수처(分水處)를 살펴야 할 정도로 납작한데 관건인 와중미유(窩中微乳)를 부족하나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가혈(假穴)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형태상으로 마치 산모(産母)의 유방(乳房)이 너무 빈약하면 갓난아이가 걱정되듯이 혈장이 풍만하지 못하여 기운이 약해보이니 그 많은 발복에 대하여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용호사(龍虎砂)격인 좌우의 현릉(弦稜) 바깥 면을 보니 요성(曜星)처럼 날카롭지는 못하나 요(曜)에 해당하는 줄기나 살찐 곳이 있어 뒤에서 받쳐주어 합격되었으나 내당(內堂)쪽의 그 끝이 완전하게 교회(交會)되지 못하고 외당(外堂)이 뚫려 보이며 낮은 안산(案山)으로 가깝게 막아 주지 못하였다. 외수(外水)가 우수도좌(右水倒左)하여 청룡 쪽으로 나가니 욕심 같아서는 청룡쪽 현릉이 앞으로 더 나아가 백호쪽 현릉을 감싼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용수(龍水) 배합은 좌선룡(左旋龍)에 우선수(右旋水)로 격에 맞는다.
한 회원이 묻기를 혈장을 양쪽에서 감싼 줄기가 와혈(窩穴)의 현릉(弦稜:와혈의 둥글게 감싼 테두리)인지 아니면 용호사(龍虎砂)인지 질문해 왔다. 이 회원의 질문 의도는 이곳이 큰 와형(窩形)의 혈(穴)인지 아니면 유형(乳形)의 혈에 청룡.백호가 가깝게 감싼 것인지를 묻는 것으로 와혈이라면 너무 넓고 밖으로 가까이에 별도의 용호사(龍虎砂)가 없으며 와혈이 아니라면 중심맥이 미미(微微)하여 거의 없다시피 되어 큰 와형에 중심부는 비어 있고 뒤에 바짝 붙여 점혈 하였으니 뚜렷하게 솟아 중앙으로 나온 중심 맥이 없으니 소위 무실(無實)에 해당하여 혈을 못 맺고 혈이 있어도 겨우 청룡하나 뿐이니 단대(單代) 발복에 그칠 수도 있어 실제와 어긋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 질문해온 것으로 느꼈다. 대답하기를 이곳은 넓고 큰 와형(窩形)의 혈(穴)로 활와(濶窩)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보면 내룡(來龍)과 입수룡(入首龍) 및 현릉(弦稜)은 훌륭하나 입혈맥(入穴脉)과 혈장(穴場)이 약하니 가혈(假穴)은 아니나 조선8대 명당이라는 칭호에 걸맞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앞서 지적한 이곳의 결함 때문에 혹자는 가혈이라 하고 혹자는 큰 발목으로 인하여 대지(大地)라 할 수도 있겠으나 혈(穴)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를 찾기도 어려우니 미약하나마 드러난 혈증(穴證)이 있으므로 대지(大地)는 못되어도 혈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이상은 안목이 부족한 필자의 개인 소견으로 훌륭하신 분들의 지도 편달을 바란다. 이곳 후손들의 무한한 번창을 기원하며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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