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동래정씨(東萊鄭氏) 허백당(虛白堂) 정난종(鄭蘭宗)선생 묘

장안봉(微山) 2015. 1. 6. 05:29

 

 

 익혜공(翼惠公) 정난종선생(1433~1489)은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원각사비(圓覺寺碑)와 돈화문 현판 등을 남겼다. 세종 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을 지낸 정사(鄭賜)선생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동래정씨 전체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17명의 정승 중 13명이 정난종 선생의 후손에서 나왔다. 선생의 묘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번지에 있다.

 

 

 저수지를 지나 묘소 아래에 도착하여 안내판을 읽고 선생의 묘를 향하여 오르는데 길게 늘어진 산줄기가 뭉뚝하게 뭉치지 못하고 점점 가늘게 흘러내려 그 끝이 좁고 길게 끝나고 그 끝난 지점에 안내판이 있었다. 처음 오르는 부분 즉 혈장(穴場)의 순전(脣氈) 아래 부분이 길게 흘러 점점 좁게 빠지니 혈을 맺을 주인 격이 아닌 호종사(護從砂)의 형태를 띠어 약간 실망하였다. 올라갈수록 다소 가파른 지형인데 올려다보니 많은 묘들이 위에서 아래로 늘어서 있었다.

 

 

 첫 번째 비각(碑閣)의 주인공이자 문인석이 두 개씩 좌우에 있는 묘가 바로 선생의 묘였다. 묵례를 올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위에서 내려오던 맥이 주된 기운이 이곳에서 거의 멈춘 형태였다. 혈장의 평탄한 면이 비교적 넉넉하고 순전이 불룩하게 앞으로 나갔으며 그 아래로 낙차가 크기 때문에 가파르게 흘러 내리던 대부분의 기운은 이곳에 머물고 극히 일부만 아래로 흘러 내려간 형태다.

 

 

 내맥(來脉)을 타고 위로 올라가 줄기 전체를 살피니 주성(主星)으로부터 내려온 맥이 곧게 내려가지 못하고 좌선(左旋)으로 완만하게 굽어 내려갔다. 기복(起伏)은 없고 중간에 방향을 바꾸어 돌때마다 왼편 청룡 쪽으로 두 군데에서 분지(分枝)하여 요도지각(橈棹枝脚) 형태로 돌고 있는 반대편을 받쳐 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 첫 번째 지각(枝脚)은 정휘겸(鄭撝謙)공의 묘 아래로 내려갔고 두 번째는 정유청(鄭惟淸)공 묘 아래로 나갔다.

 

 내맥(來脉)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에 특별이 배부르게 살쪄 뭉친 곳도 없이 흘러 내려 그 끝이 약간 좁게 끝났다. 그 모습이 마치 바나나처럼 길고 굽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곳이 혈(穴)을 맺는 주맥(主脉)인지 호종사(護從砂)인지 혼란스러웠다. 좌선(左旋)으로 돌고 있으니 백호 쪽의 어딘가를 감싸 보호하는 듯한 형태이며 기복(起伏)없이 그대로 흘러내리고 그 끝이 뭉뚝하게 뭉치지 못하고 점점 가늘게 흘러 내렸으며 물을 거스르기는 커녕 물과 함께 나란히 진행되어 역수(逆水)하지 못하고 순수(順水) 하였으니 호종사로 의심하기 쉬운 형태였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내맥(來脉)을 타고 내려 오다 보니 어느덧 정난종 선생의 음택에 도달하였다. 처음 산을 오르면서 묵례를 올리기 위하여 잠깐 머물렀을 때와는 느낌이 다소 새로웠다. 왜 이곳에 점혈(點穴)하였는지 그 까닭을 알고 싶어 혈장(穴場)을 전후좌우에서 살펴보았다. 이곳은 전체 묘역 중에 아래 부분에 위치하였고 비교적 평탄한 면이 앞뒤로 넓었다. 그래서 바로 앞 소명당(小明堂)에 6세손 정진원공의 묘가 함께 할 정도로 넉넉한 편이었다.

 

 맨 위의 정유진공 묘로부터 선생의 묘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내맥(來脉)이 한번도 기복(起伏)없이 가파르게 흘러 내리다 보니 풀잎에 이슬이 맺히듯 기운이 아래로 흘러 내리니 아래 부분에 위치하였고 경사진 내맥(來脉)에 음래양수(陰來陽受)로 평탄한 곳을 선택하였으며 혈장(穴場)의 조건 중 하나인 평(平)을 선택하여 이곳에 점혈한 것 같다. 따라서 이곳 전체 묘소 중에서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겠다.

 

 혈정(穴情)을 살피고자 최종 입혈맥(入穴脉)을 보니 이미 묘가 들어서서 원래의 형태가 다소 훼손 되었으나 급하게 내려온 맥이 완만하게 바뀌어 혈장을 이루니 혈장의 조건 중에 평(平)에 합당하므로 이곳에 기운이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묘 바로 뒤에는 큰 아들 정광보(鄭光輔)공의 묘가 있고 그 위로 둘째 아들 정광필(鄭光弼)공의 묘가 나란히 삼부자(三父子)가 역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 회원이 묻기를 비각이 세워진 상중하(上中下)로 나란히 있는 묘자리 중에 어느 곳이 좋은지 질문해왔다.

 

 이곳 세 군데를 비교 분석하자면 위에 있는 정광필공의 자리는 바로 옆 청룡 쪽으로 하나의 줄기가 내려가고 그 위에 정유청공의 묘가 있을 정도로 좌우로 넓다. 그러나 그 옆으로 내려간 줄기가 바로 선익(蟬翼)의 역할을 한다면 선익이 발출(發出)한 그 부분은 뇌두(腦頭) 혹은 승금(乘金)에 해당되는 곳으로 혈처(穴處)가 아니다. 따라서 혈증(穴證)의 하나인 뇌두에 쓴 격이니 적합하지 않다.

 

 가운데의 정광보공의 자리는 청룡쪽의 선익사(蟬翼砂) 아래의 품속으로 들어가 있어 좋고 백호쪽도 미미(微微)한 암사(暗砂)의 흔적이 있어 아래보다 공간이 넓은 편이어서 좋게 보기 쉬우나 혈장의 측면으로 가서 전체 기울기를 보면 가파른 각도로 내려와 평(平)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사진 곳을 인작(人作)으로 파내고 소명당(小明堂)을 돋구어 자리 잡으니 이곳은 기(氣)가 멈춘 곳이 아닌 지나가는 입혈맥(入穴脉)상에 작혈(作穴)하였으니 역시 부적합하다.

 

 아래의 정난종선생 자리는 양 옆으로는 위의 두 자리보다 좁은 듯하나 상하(上下)로는 평탄한 면의 공간이 제일 넓다. 이것은 가파르게 내려오던 맥의 기운이 여기에서 비로소 멈춘 형태인 것이다. 상중하(上中下) 세 곳 중 유일하게 자연적인 평(平)을 유지하여 기운을 멈추었으니 이곳 정난종 선생의 자리가 가장 안정된 혈처(穴處)가 되겠다.

 

 

 시야를 좀 더 멀리하여 좌우를 보면 청룡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쪽을 둥글게 감싸고 있어 유정(有情)하였으나 백호쪽은 숲에 가려 그 구체적인 형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이곳과 경쟁하듯 바짝 붙어 있어 겨우 좁은 골짜기로 경계를 구분할 정도로 이곳을 핍박하고 반배하여 무정하다. 따라서 그 골짜기의 물길이 이쪽을 감싸 돌지 못하고 오히려 반궁(反弓)으로 충사(沖射)하여 나가고 있었다.

 

 청룡도 좌선(左旋)으로 돌고 내맥(來脉)도 좌선으로 돌며 백호도 내맥(來脉)을 떠다밀다 싶이하며 좌선으로 돌고 있는데 흐르는 물까지도 좌선으로 돌아 나가니 좌선룡(左旋龍)에 좌선수(左旋水)로 음양교도(陰陽交度)를 못 이루었고 백호의 무정(無情)으로 올바른 형태의 당국(堂局)도 이루지 못하였다.

 

 백호쪽에 확보된 내명당(內明堂)의 공간이 전혀 없으니 전체적으로 볼 때 내명당의 중심을 향(向)하지 못하고 한쪽 구석으로 치우쳐 향하게 되니 모든 자손이 고르게 발복받지 못하고 잘 되는 자손과 그렇지 못한 자손의 차이가 현격한 상(象)이 되겠다. 그리고 국(局)의 중심에 위치하지 못하고 변방에 거처하는 격이니 대지(大地)의 품격에 위배된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보면 선생의 자리는 내맥(來脉)의 기복(起伏)이 없이 가파르게 흘러내리고 돌고 있으며 양쪽으로 선익사(蟬翼砂)의 역할을 할 만한 가까운 위치에 지각(枝脚)이 받쳐주지 못하였으니 혈(穴)을 맺을 수 있는 주인(主人)의 품격이 부족하다. 그런데 어떻게 후손들의 발복이 그토록 컷단 말인가. 큰 발복으로 대지(大地)를 기대하고 왔는데 너무나 평범한 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곳 외에 다른 지역의 자리를 볼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큰 발복을 야기시킬만한 증거를 명쾌하게 밝힐 수 없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겠다.

 

 다음기회에 시간을 내서 다시한번 폭넓게 소조산(少祖山)까지 밟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후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출처 : 민중원
글쓴이 : 민중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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