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06월 17일에 작성한 답산기입니다.
풍수지리 목요반 수강생 중 15명과 함께 가까운 이곳에서 현장실습을 하기로 하였다. 입구에 들어서 올려다보니 잘 가꾸어진 잔디와 문화재안내판이 눈에 들어와 예전에 보았던 기억과는 사뭇 새로운 느낌이었다.
묵례(黙禮)를 마치고 혈장(穴場)을 한 바퀴 돌아 혈증(穴證)의 유무(有無)를 확인한 다음 뒤의 용(龍)을 보기 위해 뒤로 올라가 혈성(穴星)을 거쳐 부모산(父母山)에 올랐다. 어느 수강생이 이곳은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태조산은 계룡산이요, 소조산은 금병산이라 했다. 계룡산이 동쪽으로 삼십여 리를 달려 온 것이다.
부모산에서 급하고 곧게 떨어져 내려온 입수룡은 살기(殺氣)로 비칠까 미안했던지 약간의 굴곡(屈曲)을 하고 평평하게 행도하여 살기를 덜어내려 노력하는 듯하고 속기(束氣)도 하였다. 그런데 비윤(肥潤)하지 못하고 수척하여 큰 힘은 없어보였다. 속기한 다음 혈성에 이를 무렵 미약하게나마 기복(起伏)하려는 흔적은 있으나 완전하지 못하였다. 그런대로 입수(入首)는 부족하나마 기본은 갖추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혈성에서 내려간 입혈맥(入穴脉)(사진①)을 보니 입수룡에 비하여 넓게 퍼져 내려가니 혈을 맺을 의지가 없어 보였지만 이내 두 갈래로 나란히 갈라져(사진②) 군살을 털어내고 밝고 단단하며 비윤(肥潤)한 새로운 모습을 보이니 안심이 되었다.
이어서 혈장에 이르니 모든 기운이 김반 선생의 자리로 모인 듯 하였는데 혈장 좌우의 아래에 기운이 응취된 형태(사진③, ④) 즉 둥글게 부풀은 모양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좌우의 그런 모습과는 달리 앞쪽에는 응결되고 남은 기운인 순전(脣氈)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가파르게 깎이었고 그 대신 청룡 쪽으로 옆에 순전 형태(사진④)가 있는 게 아닌가. 앞쪽의 순전 자리가 가파르게 기울어 다소 불안한 지형(地形)(사진⑤)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이 자리의 가장 큰 약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반 선생의 바로 위에 있는 셋째 아들 김익겸(金益兼 :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신) 선생의 자리는 기운이 완전히 멈춘 곳이 아니었다.
한편 입혈맥이 나란히 갈라져 나간 다른 한쪽이 궁금하여 건너가 보니 김반 선생의 큰 아들 김익열 선생과 손자 김만준 선생의 묘가 있었는데 진혈(眞穴)은 볼 수 없었다. 혈장을 전후좌우(前後左右)로 살펴보니 상하(上下)가 바르지 못하고 길게 굽어(사진⑥) 있으며 김반 선생 자리를 면궁(眠弓)으로 감싼 형태였다. 좌우를 살펴보니 멈추어 뭉친 곳이 없어 기운이 멈추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 내려가 소멸되고 말았다. 즉 이곳은 혈을 맺지 못하고 김반 선생의 자리를 보호하는 사(砂)에 불과한 곳이다. 두 줄기의 양쪽을 비교하자니 언뜻 용인의 정몽주 선생과 이석형 선생의 자리가 떠올랐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시 기회를 보아 언급하기로 하고 어쨌든 이곳 김반 선생 자리는 둥글게 뭉쳐 높게 멈춘(사진⑦) 반면 다른 쪽은 길게 굽어서 낮게 흘러 빠지니 김반 선생 자리의 내백호(內白虎)(사진⑧)로 보사(保砂)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수강생이 말하기를 누가 그러는데 이곳을 쌍유혈(雙乳穴)이라 한다기에 대답하기를 쌍유혈이 되려면 혈이 유형(乳形)으로 나란히 양쪽에 맺혀야 하는데 이곳은 한쪽에만 혈(穴)이 되고 나머지는 사(砂)가 되니 쌍유혈이라는 말은 언뜻 보아 표현한 말이지 사실은 적절치 못하다고 하였다.
또 다른 수강생이 묻기를 두 줄기 사이로 골진 곳 맨 위에 혈이 있다고 들었다 하며 그곳은 어떠한지 물어왔다. 그곳으로 가서 답변하기를 여기서 위쪽을 보면 아미사(蛾眉砂)(사진⑨)처럼 둥글게 감싼 것 같고 좌우로 두 입혈맥이 솟아 내려가니 그 사이로 아늑한 느낌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금방 혈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가령 이곳이 혈이라면 와겸(窩鉗)의 혈이 될 텐데 와겸혈에는 우각사(牛角砂) 등이 아래를 감싸서 갈무리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며 또 이런 경우 즉 비탈진 지형에는 혈이 되려면 천연의 순전(脣氈)으로 돌기해야 하는데 순전은 커녕 요함(凹陷)하여 비가 온다면 도랑물이 곧게 흘러 견동토우(牽動土牛)(사진⑩)가 되니 혈은 커녕 도랑에 집을 짓는 꼴이 된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택당 이식 선생의 자리인데 그곳에는 순전이 금성으로 블록하게 형성되어 혈증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을 일러 쌍유혈이라거나 두 입혈맥 사이의 골진 윗부분에 혈이 있다는 등의 말에 동의할 수 없으며 수강생 여러분도 그런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다시 나경 공부를 시키려고 보니 임(壬) 입수룡에 해(亥) 입혈맥이며 좌향은 비문 뒤에 기록된 대로 임좌병향(壬坐丙向)이며 사수구(巳水口)였다. 어느 수강생이 좌향법이 옳게 되었는지 물어왔다. 대답하기를 먼저 직지원진과 지리오결에 나오는 팔십팔향법은 임관방(臨官方) 즉 녹방(祿方)을 충파(冲破)하니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을 범하였으며 입지안 전서나 나경투해에 나오는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임양룡(壬陽龍)에 병음향(丙陰向)이니 음양이 박잡(駁雜)되어 맞지 않다고 하고 더 공부하면 이밖에도 좌향법이 여러 방법이 있으며 이기(理氣)도 좋지만 우선은 형기(形氣)에 중점을 둘 것을 당부하였다.
그밖에 이곳은 백호작국(白虎作局)으로 안산(案山)(사진⑪)이 유정(有情)하게 면궁으로 환포(環抱)한 것은 좋으나 우수도좌(右水倒左)인데 청룡이 짧아 명당수의 완전한 역수(逆水)를 못할 뿐 아니라 높이도 낮아 수목으로 다소 보완이 된듯 싶지만 그 위쪽으로 외명당(外明堂)(사진⑫)이 넘겨다보이니 장풍도 완벽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대로 혈 앞이 가파르고 향법이 부족하니 간혹 일부 자손에 인패(人敗)를 면할 수 없다 해도 이곳 김반 선생의 자리는 대지(大地)에는 못 미칠지언정 진혈(眞穴)임에는 틀림이 없다. 많은 발복으로 조선조 최고의 명문가를 이룬 것이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하겠다.
※ 참고사항
김반(金槃) 선생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3남(三男)으로 태어나 병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둘째 아들 김익희와 손자 김만기와 김만중(구운몽, 사씨남정기 저자) 형제가 대제학을 지냈고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 3대(三代)가 대제학을 역임하니 그의 자손에서 7명의 대제학과 74명의 급제자가 배출되는 등 조선조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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