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역사와 성씨

[스크랩] 논산명재 고택 300년 향촌, 선비의 집

장안봉(微山) 2014. 12. 27. 04:56

 

 

논산명재 고택 300년 향촌, 선비의 집

 

논산명재 고택(구, 윤증선생고택) 은 조선중기때 상류층의 전형적인 살림집으로

호서지방의 양반가옥이다.

뒤로는 노성산을 병풍으로 전체구조가 ㅁ자형으로 안채는 ㄷ 자형이며 안채의 남쪽에 행랑채 와

뒤편에 사당이 있고 안채 앞에 사랑채가 있는데 행랑채와 대문이 없고 넓은 바깥 마당과 그 앞에

네모난 인공연못이 있다.

 

 

 

 

고택을 구경하기전에 사랑채 옆으로 수천개의 장독대가 장관을 보고 싶어

작은 둔턱으로 올라가 내려다 보았다.

 

 

 

 

그냥 들어가 보지 않아도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고택과 오래된 고목

그리고 짙은 세월의 흔적을 안고 있는 장독대 모습이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된장은 종가만의 전통법으로 전수되는 교동된장은

향교가 고택옆으로 이전하면서 "향교의 동쪽에 있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평윤씨 노종파 종갓집 간장 또한 묵은 간장에 부어 만드는 되매기 장으로 유명한데

"이 간장 한 숟가락이면 아픈 배가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명재 윤중선생은?
1629년(인조7년)부터 1714년(숙종 40년) 사이에 살다간 조선때의 학자로 유계, 권시, 김집,

송시열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 수학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산촌에 묻혀 학문과 덕을 쌓기에 전념하니 그 덕망이 당시 제일이었고

모든 선비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백의 정승"이란 대우를 받았다.

 

 

 

 

담장이 없는 집으로 유명한 명재고택은 그만큼 명재 후손들은 감출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1709년 윤증의 큰아들 윤행교가 윤증 아버지의 노후생활을 위해 지었다는 300년 된 고택을

자세히 살펴볼까.

 

 

 

 

사랑채 앞마당에 들어서면 사랑채 아래 나란히 있는 선돌을 발견할 수 있다.

좌측 큰 선돌은 손님용이며 우측 작은 선돌은 주인전용으로 바깥에서 오는 손님이

주인장이 계시는지 신발을 보면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랑채 앞 기단위에 작은 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사랑채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산 미니어쳐라고 하였다.

 

 

 

 

사랑채 문은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분합문으로 이곳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아래사랑채 올라가는 디딤판이 원래 있었는데 사라져서 지금은 다시 만들어 올려놓았다고 한다.

디딤판 위에 "도원인가" 라는 현판은 무릉도원, 신선의 세계를 뜻하는데

여름 새벽에 앞의 연못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사랑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마치 나무집이 구름위에 떠있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면의 "이은시사" 는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천시를 연구하는 집이라는 뜻과

주역에 나오는 이야기로 움츠린 용이 승천하기 위해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이은시사" 가 적힌 사랑채 창문은 4분합 들 문으로 문을 들어 천정의 걸쇠에 걸면

창틀의 규격이 지금의 와이드 TV 의 16:9 라는 이상적인 황금비율이라고 하니

300년 전 선조들의 안목의 대단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사랑채는 큰방과 작은방으로 연결되는 미닫이와 여닫이를 겸하는 방문이 있는데

이런 형식은 다른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아버지가 아들 방에 갈때

미닫이 문소리를 듣고 틈을 주기 위함이라니 새삼 감탄을 자아내는 배려가 엿보인다.

 

 

 

 

아들방 앞에 앉아서 장독대 쪽으로 바라보았다.

돌담, 느티나무, 항아리.. 그리고 굴뚝, 굴뚝에 연기가 피어 오른다면 한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될것 같다.

아버지 방 창문은 사당을 바라보고 있는데 매일 사당을 참배하다가 혹여 아프거나 할대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사랑채를 보고 안채를 구경하는데 대문부터 배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안채로 들어서기 위하여 ㅡ 자형의 대문 전면에 서면 바로 안채가 보이지 않고

막힌 대문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일명 내외벽으로 여인들이 갑자스런 손님의 방문을 받으면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한 면벽,

가리개 역할을 하는 샘이다.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비로소 안채를 향하여 열려있어 안채공간의 안정감을 주었다.
안채 마당으로 들어서면 ∩자형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고 다시 六 자형의 대청과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대청에 북쪽 세칸 기둥 사이의 바라지 창을 열면 경사진 언덕에 놓여진 정겨운 장독대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명재고택에서 과학적인 설계가 가장 돋보이는 곳은 안채와 와 광채와의 물길, 바람길, 햇볕길이다.

보는 바와 같이 두 건물은 5자 2자로 지붕의 빗물이 배수가 잘 되도록 되어 있으며

여름에는 남동풍이 부는데 넓게 바람을 맞이하여 바람이 좁게 빠져나가기에 시원하고
겨울의 북서풍은 좁게 맞이하여 넓게 빠지니 바람이 안부는 듯 따스한 느낌이다.

 

 

 

 

오른쪽 처마끝이 15cm 높은데 끝쪽에 가서는 수직으로 만나게 되어 여름에는 햇볕을 걸러주며

오후1시 부터 3시까지 햇볕을 가려주어 안방에서 책을 읽을 정도의 밝기가 된다고 한다.

또한 반대편에서 보면 조금전에 차이나던 물길이 평행선으로 보이는 설계가 신비롭다.

 

 

 

 

돌담을 돌아서 가다보면 담보다 낮은 굴뚝을 만나는데 춥고 배고픈 주변사람들을 배려하여

굴뚝을 낮춰서 만들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에 있는 샘물은 아직도 끌어서 장도 담그며 사용을 하고 있는데

지대가 낮고 향나무로 가려진것은 여인네들을 배려하여 만들었으며

향나무는 차단벽 역할도 하지만 뿌리는 물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명재고택에서는 고택의 초가집 별채와 더불어 큰사랑방, 안사랑밥, 건넌방 등

한옥체험과 숙박이 가능하다.

 

 

 

 

뒤로는 노성산자락이 앞으로는 천원지방, 방지원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인공연못으로

네모의 연못과 둥근 인공섬(석가산)은 음인 땅과 양인 하늘의 화합과 신선이 사는 산을 의미한다.

섬 중앙의 배롱나무가 짙게 피어오르는 여름날, 벤치에 앉아서 차를 마셨던 몇년전 발걸음이 생각났다.

 

 

 

 

고택과 나란히 있는 노성향교(도지정 기념물 제118호) 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겪은 후

1700여년경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5성 20현이 배향되어 있다.

 

 

 

논산 명재고택/충남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 (교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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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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