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재(南城齋)는 고려 의종(毅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영일(迎日) 정씨(鄭氏)의 시조(始祖)인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 : ? ~ 1151)의 묘단하(墓壇下)
재숙지소(齋宿之所)이다.
시조의 묘소(墓所)가 실전(失傳)된 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 조선 경종(景宗) 임인년(壬寅年, 1722년)에 읍성의 남쪽 구석에 후손들이 처음으로 묘단을 쌓고 제사를 올린 바 있으나,
영조(英祖) 임술년(壬戌年, 1742년) 읍(邑)을 동쪽 10리쯤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읍성(邑城) 내의 현 위치에 묘단(墓壇)을 새로이 축조하고 석상(石像)을 세웠고,
신미년(辛未年, 1751년) 묘단(墓壇)위에 비(碑)를 세웠다.
남성재 南城齋.
1998년 도 유형문화재 제 302호 지정.
이듬해(1752년)에 재사(齋舍)를 건축한 바 있으나 지대가 낮고 지반이 약하여 건물이 오래 부지하지
못하고 퇴락하여 1784년부터 1785년까지 공사를 하여 단소(壇所) 아래 서남쪽의 경사가 완만하고
지대가 높은 곳에 재사(齋舍)를 옮겨 지었는데 도합 19칸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규모에 비해서 재목이 약하여 몇 십년을 못가서 기둥이 기울고 도리가 처지며 서까래가
부러지는 등 탈락이 심하여 장래를 바라볼 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단소(壇所) 아래 동쪽으로 멀지 않은 옛 관청(官廳)의 객사(客舍)자리에 터를 잡아
180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정당(正堂) 3칸, 재실 4칸으로 하고 부속(附屬)채까지 도합 14칸의
재사(齋舍)를 1808년까지 재이건(再移建)하여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남성재(南城齋)의
모체(母體)이다.
1858년부터 수년에 걸쳐서 중수(重修)한 바 있으며, 1868년(고종 무진년 : 高宗 戊辰年)에
대문채를 건립하였다.
그 후로도 1897년, 1925년, 1928년의 중수기록이 있으며 1939년에는 동ㆍ서재를,
1962년 대문채, 1965년에는 재사를 개축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重修)와 개축(改築)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포항시청 자료 참조.
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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