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전서

[스크랩] 청장관전서 제27~29권 > 사소절 2(士小節二) 근신(謹愼)

장안봉(微山) 2014. 5. 13. 06:10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27~29권 > 사소절 2(士小節二)

 

사소절 2(士小節二) - 사전 2

 

동지(動止)

근신(謹愼)

 

 

근신(謹愼)

 

천하의 큰 죄악과 큰 재앙은 모두 담박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데서 생긴다. 《중용(中庸)》에,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을 편안히 여기고, 환난(患難)에 처하면 환난을 편안히 여긴다.”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신명(身命)을 아끼나 식색(食色)에서 그 신명을 상하게 하고, 사람은 혹 절조(節操)를 닦으나 식색에서 그 절조를 망치게 한다. 그런 까닭에 의서(醫書)를 잘 읽어 경계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의서의 공효가 《시경(詩經)》이나 《예기(禮記)》와 맞먹는다.

 

왕고(王考)인 부사공(府使公)001]의 유훈(遺訓)에,

“백운대(白雲臺)002]에 오르지 말고, 하돈탕(河豚湯)003]을 먹지 말라.”

하였는데, 우리 제부(諸父)들이 그 유훈을 삼가 지켰고 나의 형제들 대에 와서도 역시 지킨다. 이 두 가지로 미루어 보면 위험한 곳에 가서는 안 되고, 먹는 일로 생명과 바꾸어서는 아니 된다. 이 유훈은 각기 유(類)에 따라 확대해 볼 만하다.

 

피곤한 말을 탈 경우, 오르고 내리는 곳을 당하면 곧 내려서 걸으라. 말의 힘이 약함을 불쌍히 여길 뿐 아니라, 또한 엎어지고 자빠질 우려도 면하게 된다.

 

교활한 아이와 술취한 사람과 사나운 말과 미친 개는 삼가 피하라.

 

다락 난간에 걸터앉지 말고, 뱃전에 걸터앉지 말고, 바람 부는 날 창문 밑에서 귓밥 파지 말라.

 

귀중한 그릇이나 물건이 가득 담긴 그릇은 힘을 자랑하기 위하여 한 손으로 남에게 전해 주지 말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반드시 시저(匙箸)를 정돈하여 시저 끝이 상 밖에 내밀게 놓지 말라. 상을 물릴 때 문설주에 닿을까 싶어서다. 나는 어릴 때 식사를 마치고 시저를 정돈하지 않았더니 중부(仲父)004]께서 경계하셨다. 지금도 밥 먹을 때면 그 생각이 나므로 시저를 정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을 드나들 때는 반드시 몸을 구부려라. 선비인 장학성(張學聖)005]의 집은 문지방이 매우 낮았다. 손님이 문에 들 때 그는 반드시 손으로 문지방을 가리키며,

 

“문지방이 매우 낮습니다.”

하였다. 그것은 입자(笠子)가 문지방에 닿을까 염려해서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그의 성근(誠謹)함을 볼 수 있다.

 

남의 집에 갔을 때 사랑방이 안방과 가깝거든 큰소리로 마구 떠들고 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땅히 안방을 등지고 앉아야 한다.

 

친척의 집에 가서 부녀를 보거든 함부로 말하거나 웃어서는 안 된다.

 

친척의 부인이 사람을 시켜 안후를 묻거든 누워 있을 때라도 반드시 일어나서 공경히 들으라.

 

정문(旌門)006]이 있는 집이나 종자(宗子)의 집, 그리고 존행(尊行)의 집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문 밖에서 하마(下馬)하라.

 

말을 타고 갈 때에 농부들이 모여서 점심 먹는 곳이나, 고을 사람들이 모여서 활 쏘는 곳을 지날 적에는 말에서 내리는 것이 좋다.

 

관청(官廳)에 들어가지 말고, 이궁(離宮)에서 놀지 말고, 야금(夜禁)007]을 범하지 말라. 현천(玄川) 원중거(元重擧)와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008]은 서로 문을 마주 보고 살았는데 해진 뒤에는 오가지 말자고 서로 약속하고는 야금을 범하지 않았으니, 선배들의 근신은 이와 같았다.

 

풍속이 교활하여 일부러 국법을 어기는 것을 능사로 삼아 법을 잘 준수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가락질하며 겁쟁이라고 비웃는다. 이를테면 호패(戶牌)009]를 차도록 하는데도 거역하고 차지 않는 따위다. 사부(士夫)는 더욱 경계하여 범하지 말라.

 

재상(宰相)ㆍ명현(名賢)ㆍ기구(耆耈)ㆍ존장(尊丈)ㆍ족부형(族父兄)의 이름이나 자(字)를 함부로 부르지 말고, 개ㆍ돼지 또는 아름답지 못한 속된 이름으로 자녀의 이름을 짓지 말라.

 

부형(父兄)ㆍ존장(尊丈)의 서찰(書札)이나 성현(聖賢)의 유언(遺言) 및 저보(邸報)010]는 비스듬히 누워 게으른 태도로 보아서는 안 된다.

 

존장(尊丈)과 말할 때는 해담(諧談)하지 말고, 편좌하거나 한 무릎을 세우고 한 손을 짚어서 비스듬히 앉지 말며, 마주 대해 앉지 말라.

 

남과 모이기로 약속했을 때에는 반드시 남보다 먼저 달려가야 한다. 아무리 날씨가 험악하더라도 반드시 언약을 실천해야 한다. 제사(祭祀)에 참례할 때에는 세수나 옷 입는 일을 더디게 해서 남에게 뒤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제사를 행하는 일은 급박하게 하지도 말고, 더디게 하지도 말며, 처음에는 조심하다가 나중에는 소홀하게 하지도 말라.

 

제사에 참여했을 때 오랫동안 서 있음으로 해서 다리가 아무리 피로하더라도 외발로 서서는 안 되고 하품을 해서도 안 된다. 제물을 진설할 때에는 왼손으로 오른손 소매를 걷어잡아, 제물이 떨어지거나 더렵혀지지 않게 하라.

 

제사 지낼 때 자질(子侄)과 부녀(婦女)들이 혹시 일을 집행함이 소홀하거든 조용히 가르쳐 주어야지, 꾸짖거나 욕설을 해서는 안 된다. 애경(哀敬)하고 화기(和氣)를 유지해야 옳다.

 

치재(致齋)011]하는 날에는 비록 손님이 있다하더라도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말라. 외증조(外曾祖)인 금평위(錦平尉) 박공(朴公)께서는 치재하는 날에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나이 90세가 넘었는데도 오히려 태만하지 않으셨다.

 

나일봉(羅一峯)012]은,

 

“상중(喪中)에 있을 때는 마땅히 혐의되는 일을 피해야 하고, 자신만을 믿고 해서는 안 된다. 옛날 사람이 오명(汚名)을 받은 것은 대부분 혐의 때문이었다. 남이 혹시 혐의된 일로 더럽히면 변명할 길이 없다.”

하였으니 이 말이 지당하다.

 ‘혐의를 피한다[避嫌疑]’는 세 글자로 상중에 있는 자의 엄법(嚴法)이 되는 것이다.

 

진수(陳壽)013]는 그 아버지의 상중에 있을 때 계집종을 시켜 환약을 짓다가 향당(鄕黨)이 폄론(貶論)하므로 그 때문에 당시 매장당했고, 사혜련(謝惠連)014]은 전에 회계군리(會稽郡吏) 두덕령(杜德靈)015]을 사랑하던 처지므로 아버지 상중에 있을 때 오언시(五言詩)를 지어 그에게 주었더니016] 그 시가 세상에 알려지자, 매장당했고, 당 헌종(唐憲宗) 때 부마도위(駙馬都尉)017] 우계우(于季友)018]는 적모(嫡母) 상중에 있으면서 진사(進士) 유사복(劉師服)019]과 연음(宴飮)하다가 발각되어 우계우는 벼슬을 삭탈 당하는 동시에 태(笞) 40대를 맞고 충주(忠州)에 안치(安置)되었고, 유사복은 태 40대를 맞고 연주(連州)에 유배(流配)되었으며, 우적(于頔)020]은 그 아들을 잘못 교훈한 탓으로 품계(品階)가 깎이었다. 그리고 요흥(姚興)021] 때 황문시랑(黃門侍郞) 고성선(古成詵)은 천하의 시비를 자기 책임으로 삼았다. 경조(京兆)의 위고(韋高)022]가 그 어머니 상중에 있을 때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셨는데, 고성선은 그 소식을 듣자 울면서 ‘나는 마땅히 내 칼로 그를 베어 풍교(風敎)를 높이리라.’하고, 드디어 칼을 들고 위고를 찾으니, 위고는 도망해 숨고, 종신토록 감히 나타나지 못했다.

이상 네 사람은 식색(食色)과 성시(聲詩)로 하여 죄를 받았다. 내가 지금 이것을 표출(表出)하여 상중에 있을 때 혐의를 피해야 한다는 뜻을 확실하게 한다.

 

《서경(書經)》 군아(君牙)편에,

 

“겨울에 몹시 춥고 여름에 비가 자주 오면 하민(下民)들이 원망한다.”

하였으니, 하민은 곧 우부(愚夫)와 우부(愚婦)인 것이다. 그들은 마음이 편협하므로 바람 불거나 비오거나 춥거나 더웁거나 걸핏하면 반드시 원망한다.

평양(平壤) 사람 황집암(黃執庵)023]은 질박하고 정직한 선비였다. 그의 아내가 막 무슨 일을 할려고 하다가 비가 쏟아지므로 하지 못하게 되자, 성을 발끈 내어 비를 꾸짖었다. 집암이 그 말을 듣고 꾸짖기를,

 

“이는 하늘을 원망하는 것이다. 하늘을 원망할 수가 있겠는가?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그를 그의 친정으로 보냈다가 며칠 후에 되돌아오게 하여 마치 귀양 보내는 것처럼 하였다. 이 일은 비록 오활한 듯하나, 장부로서 마음이 편협한 자는 경계할 만하다.

왕양명(王陽明)024]은 어느 날 일찍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다가 곧 스스로 깨닫기를,

 

“남들은 한창 비를 바라고 있는데 나는 비가 개기를 바라려 하는가?”

하였으니, 자신을 반성함이 이와 같았다.

 

임금의 글이나 글씨와 남의 집 부인의 필적은 망령되이 비평해서는 안 된다.

남이 나에게 시문(詩文)을 비평해 달라고 청했을 때 전책(箋冊)의 글씨가 정결하거든 마땅히 정하게 비평의 표시를 해야 하지, 난필로 마구 표시해서는 안 된다.

 

시문(詩文)을 승축(僧軸 중의 시축)에 쓰지 말고, 절에 가서는 불상(佛像)025]을 조소하거나 부처 몸을 손톱으로 긁거나, 용액(龍額)026]에 제명(題名)하거나, 어육(魚肉)으로 그의 응기(應器)027]를 더럽히지 말라. 이 몇 가지 일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몸을 공경하는 도리이다.

 

학질 앓는 사람에게 더러운 약을 속여서 먹이지 말고, 또한 그로 하여금 졸지에 놀라게 하지도 말라.

 

어리석은 사람, 빈곤한 사람, 병든 사람, 어수룩한 사람, 상복(喪服) 입은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반드시 조소(嘲笑)하는데 그것은 인자한 마음씨가 아니다. 불우한 사람은 더욱 지성스러운 마음과 부드러운 말씨로 대해야 한다. 어린애들은 더욱 웃기 쉬우니 호되게 나무라야 한다. 〈교활한 아이, 술취한 사람, 사나운 말, 미친 개는 삼가 피해야 한다.〉

 

장벽(墻壁)이 아무리 엉성하더라도 그 사이로 남의 집을 엿보지 말라. 장선(張僎)028]이란 자는 근신(謹愼)하는 선비였다. 그는 아이 때 울타리 밑에서 놀다가 이웃집 처녀를 보자 크게 놀라 엉금엉금 기어서 피하고 곁눈질을 않았다니, 그 일은 본받을 만하다.

 

정한강(鄭寒岡)029]은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의 몸가짐은 마땅히 처자와 같이하여 조금도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

하고, 명(明) 나라 하시태(賀時泰)030]의 호는 양형(陽亨)인데, 일찍이 문인들을 경계하기를,

 

“선비가 몸지킬 바를 능히 정하지 못했을 때에는 향당(鄕黨) 가운데서 절개 곧은 한 부인을 대상으로 찾아서 그를 본보기로 삼으면 몸 지키기가 어렵지 않다.” 하였다.

 

조청헌(趙淸獻)031]이 한 영기(營妓)를 눈여겨 둑었다가 직숙(直宿)하는 늙은 병사[老兵]에게 명하여 그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조청헌은 방안을 빙빙 돌면서 말하기를,

 

“조 변(趙抃)이 이런 무례한 일을 해서 되겠는가?”

하였다. 이때 늙은 병사가 군막 뒤에서 나와 말하기를

 

“저는 상공(相公)의 그런 생각은 한순간이 못 가서 그칠 줄 알고 명령을 받았으나 실은 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오진(吳晉)032]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한순간이란 바로 옛날부터 성현(聖賢)과 간인(奸人)의 갈림길인 것이다. 후세 사람은 반드시 조청헌처럼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또 주변에 마음을 알아주는 늙은 병사도 없는 듯하다. 이 한순간을 극복할 줄 모르면 천년만년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일시(朱一是)033]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고로 베옷 입은 사람으로서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道)를 즐긴 사람은 소요부(邵堯夫)034]만한 분이 없었다. 그의 행사를 상고하면 오직 지성으로 남을 대하였으니 가장 인정에 가까웠을 뿐이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착한 사람은 진실로 친해야 할 것이나 잘 알기 전에 급히 어울려서는 안 되고, 악한 사람은 진실로 소원해야 할 것이나 아직 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멀리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뉘우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인정을 깊이 안 분이 아니면 능히 이처럼 심오한 훈계를 남길 수 있겠는가? 또 선생은 낮에 누워서 침병(枕屛)에 그려진 어린아이가 장난하는 것을 보고, 시를 그 위에 쓰기를

 

은거해 누워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 遂令高臥人

베개에 기대어 애들의 장난 보게 하누나 / 欹枕看兒戲

 

하였는데, 시기는 대개 희령(熙寧)035] 연간이었다. 그 시를 《격양집(擊壤集)》 속에 싣지 않았으니, 그의 근신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우리들은 약간 시문(詩文)에 능하다 하여 왕왕 경솔하다. 매양 자극을 받으나 단호하게 고치지 못한다. 습기(習氣)에 고질된 사람은 온통 학문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점필재(佔畢齋)036]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나 권석주(權石洲)의 궁류앵비(宮柳鶯飛詩)037] 시와 같은 것은 모두 소인들에게 해를 당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삼가 조심하여 본분을 철저히 지키고 승기(勝氣 이기려는 기개)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옛날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술의 취함은 근후(謹厚)한 사람이 광증을 일으키게 할까 두렵고, 바둑의 승패는 겸양(謙讓)한 사람이 성을 내게 될까 두렵다.”

 

선비가 곤궁을 본분의 일로 여기지 않을 경우에는 그로 인한 온갖 폐단이 이를 것이다. 공자는,

 

“지사(志士)는 항간에 묻혀 있을 각오를 언제나 잊지 않는다.” 038] 

하였다.

 

조수(操守)와 방금(防禁)이 있으면 바로 성현이 될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요, 조수와 방금이 없으면 바로 도적이 될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남의 사송(詞訟)ㆍ소장(疏章)ㆍ관절(關節)ㆍ방납(防納)039] 등의 일을 참견하지 말라. 적게는 비방을 받고 크게는 화를 당한다.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이것으로 낭패한 자가 그 얼마나 많은가.

 

재화(財貨)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매 이것이 바로 탐도(貪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고, 여색(女色)을 가까이할 마음을 가지면 이것이 바로 간음(奸淫)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맥이 풀리듯 부정한 생각이 가셔야 바로 길인(吉人)이며 선사(善士)인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깨끗한 언론에 거론됨을 두려워한다.

 

여색을 대하여는 그 낭비를 생각하라. 나의 행실을 허비하고 나의 몸을 허비하고 나의 재물을 허비한다. 그러므로 삼가는 것이 중요하다.

 

병 없이 약을 잘 먹는 사람은 생명을 보존하려는 생각에서겠지만 도리어 생명을 해치는 것이요, 까닭 없이 조상의 무덤을 잘 옮기는 사람은 어버이를 편안하게 하려는 생각에서겠지만, 도리어 어버이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세상의 고질된 폐단이니, 모든 군자는 어찌 조금이라도 반성하지 않으랴?

 

양생(養生 건강에 유의하는 일)과 치생(治生 삶의 방도를 구하는 일)은 군자가 겸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생이 탐생(貪生 삶을 탐냄)하는 지경에 이르지 말아야 하고, 치생에도 또한 사생(捨生 삶을 버림. 곧 의(義)를 위해서는 생명도 바치는 일)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작은 병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일을 당해서는 미란(迷亂)하고 전패(顚沛)할 뿐이다.

 

박경유(朴景愈)는 침착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자리 오른편에 ‘보양정력(保養精力)’ㆍ‘이회기상(理會氣象)’이란 글귀를 써 붙이고 열심히 살펴서 그대로 지켰는데, 한 구절은 형서(邢恕)040]의 말이요, 한 구절은 여형공(呂滎公)041]의 말이다. 나도 또한 체격이 연약하고 용모가 유연하므로 이 구절을 외어 자신을 단속한다.

 

유 충정공(劉忠定公)042]은 망령된 말을 않으려고 7년 동안이나 노력한 끝에 그 뜻을 이루고, 설 문청공(薛文淸公)043]은 성내지 않으려고 20년 동안이나 수양하였으니, 선유(先儒)들의 자신을 단속함에 오래도록 노력함이 이와 같았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는 남을 만나서 ‘아무가 죽었다.’고 잘라 말해서는 안 된다.

 

뜬소문이나 확실하지 않은 말을 들었거든 곧 그것을 남에게 간곡히 전하지 말라. 대저 내가 직접 보지 않은 것은 십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사람이 종일토록 다행스럽게도 망령된 말이나 어긋난 행동을 한 바 없으면 밤에 잠자는 일이 반드시 안정할 것이다.

 

 

 

 

[주D-001]부사공(府使公) : 이름은 필익(必益), 자는 익지(益之)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두주]
[주D-002]백운대(白雲臺) : 삼각산(三角山) 제1봉(峯)인데, 북한성(北漢城) 북쪽에 있다.[두주]
[주D-003]하돈(河豚) : 모양이 과두(蝌斗 : 올챙이)와 같은데, 등은 검푸르고 누런 줄이 있으며, 배는 희고 비늘이 없다. 간과 알에 무서운 독기가 있으며, 일명 후거(鯸鮔), 호이(鰗鮧)라 하고 속명으로는 복이다.[두주]
[주D-004]중부(仲父) : 이름은 성홍(聖鴻), 자는 사점(士漸)이다.[두주]
[주D-005]장학성(張學聖) : 자는 여시(汝時), 본관은 인동(仁同)이다.[두주]
[주D-006]정문(旌門) : 충신ㆍ효자ㆍ열녀의 가문에 작설(綽楔)을 설립하는 일.[두주]
[주D-007]야금(夜禁) : 밤에 사람의 왕래를 금하는 일인데 주(周) 나라 때부터 있었다. 한(漢) 나라 제도에서는 금오(金吾)가 궁궐 밖의 비상을 관장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석(除夕)ㆍ상원(上元)ㆍ등석(燈夕)에는 모두 통행금지를 해제한다.[두주]
[주D-008]이인상(李麟祥) : 자는 원령(元靈), 본관은 완산(完山), 벼슬은 현감(縣監)이며, 문집이 있다.[두주]
[주D-009]호패(戶牌) : 남자의 경우, 16세가 되면 패(牌)에 성명을 새겨 찼으니 그것을 호패라 한다. 태종 계사년에 호패법이 마련되었는데, 문관(文官)ㆍ음관(蔭官)ㆍ무관(武官)의 경우, 2품(品) 이상은 상아(象牙)를, 3품 이하는 흑각(黑角)을 사용하고, 생원(生員)ㆍ진사(進士)는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하고, 사(士)ㆍ서인(庶人)과 공ㆍ사천(公私賤)은 대추나무와 배나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해당 관아에서 낙인(烙印)을 찍어 주었다. 군병(軍兵)은 요패(腰牌)를 사용하였는데, 모양이 둥글다.[두주]
[주D-010]저보(邸報) : 지금의 조보(朝報)다. 송(宋) 나라 정화(政和) 뒤에 비로소 저보의 글자가 사서(史書)에 나타나나,《당초집(唐樵集)》가운데 ‘개원(開元)의 잡보(雜報)를 읽었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당 나라 때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두주]
[주D-011]치재(致齋) : 재계(齋戒)하는 일이다.[두주]
[주D-012]나일봉(羅一峯) : 이름은 윤(倫), 자는 이정(彝正)인데, 명(明) 나라 영풍(永豐) 사람이다. 성화(成化) 때의 진사로서 한림수찬(翰林修撰)을 지내다가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금화산(金華山)에 은거하였다.[두주]
[주D-013]진수(陳壽) : 진(晉) 나라 안한(安漢) 사람으로 자는 승조(承祚)다.《삼국지(三國志)》를 찬하였다.
[주D-014]사혜련(謝惠連) : 남조(南朝) 때 사람. 나이 10세 때 글을 잘 지었으므로 족형(族兄) 영운(靈運)이 가상히 여겼다.[두주]
[주D-015]두덕령(杜德靈) : 사람의 성명이다.[두주]
[주D-016]오언시(五言詩) …… 주었더니 : 사혜련이 시를 지어 준 일은《남사(南史)》에 보인다.[두주]
[주D-017]부마도위(駙馬都尉) : 벼슬 이름. 부마라는 이름은 삼국 시대 때 생겼는데, 공주(公主)나 옹주(翁主)에게 장가든 자를 부마라 한다.
[주D-018]우계우(于季友) : 우적(于頔)의 아들이다.[두주]
[주D-019]유사복(劉師服) : 한유(韓愈)의 〈석정연구시서(石鼎聯句詩序)〉에 보인다.[두주]
[주D-020]우적(于頔) : 당 나라 사람으로 벼슬은 사공평장(司空平章)이었다.[두주]
[주D-021]요흥(姚興) : 자는 자략(子略)으로 후진(後秦) 요장(姚萇)의 태자(太子)다.[두주]
[주D-022]고성선(古成詵) …… 위고(韋高) : 고성선과 위고는 모두 후진 요흥 때 사람이다.[두주]
[주D-023]황집암(黃執庵) : 이름은 순승(順承)으로 평양(平壤)에 살고 벼슬은 참봉(參奉)이었는데, 세상에서 황고집(黃固執)이라 칭하였다.[두주]
[주D-024]왕양명(王陽明) : 명 나라 여요(餘姚) 사람으로 이름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인데, 세상에서 양명 선생(陽明先生)이라 칭한다.
[주D-025]불상(佛像) : 부처는 서역에서 나왔다.《정자통(正字通)》에 “한 명제(漢明帝) 영평(永平) 10년에 불법이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다 하는데, 그 말은 잘못이다. 진(秦) 나라 때 사문(沙門) 실리방(室利房) 등이 오니 진 시황(秦始皇)이 괴이한 것이라 하여 그를 가두었는데, 밤에 금인(金人)이 문을 부수고 나왔다 하고, 한 무제(漢武帝) 때 곽거병(霍去病)이 언지산(焉支山)을 지나다 휴도왕 제천금인(休屠王祭天金人)을 얻어 돌아오자, 무제가 그것을 감천궁(甘泉宮)에 간직하였으니, 지금의 불상은 바로 그 유법(遺法)인 것이다. 애제(哀帝) 때 진경(秦景)이 이존(伊存)을 시켜서 부도(浮屠)의 경(經)을 말로 전하였고, 명제(明帝) 때에 와서 명제가 금인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 천축국(天竺國)에 사신을 보내어 불상을 구해 왔다 하니, 진(秦)과 서한(西漢) 때부터 이미 부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므로 명제 때에 비로소 있던 것은 아니다.”하였다.[두주]
[주D-026]용액(龍額) : 불감(佛龕) 위에 용의 머리를 새긴 것이다.[두주]
[주D-027]응기(應器) : 중의 바리때다.《능엄경(楞嚴經)》에 “중의 바리때를 응량기(應量器)라 한다.” 하였다.[두주]
[주D-028]장선(張僎) : 자는 보인(輔仁), 본관은 인동(仁同)인데 약관 때 일찍 죽었다.[두주]
[주D-029]정한강(鄭寒岡) : 이름은 구(逑), 자는 도가(道可),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중종 때 은일(隱逸)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문집과 서원이 있다.[두주]
[주D-030]하시태(賀時泰) : 자는 숙문(叔文)으로 호광(湖廣) 강하(江夏) 사람이다.[두주]
[주D-031]조청헌(趙淸獻) : 이름은 변(抃), 자는 문도(聞道)로 송 나라 서안(西安) 사람인데, 경우(景祐) 초기의 진사로 벼슬이 전중어사(殿中御史)에 태자소보(太子少保)를 겸하였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두주]
[주D-032]오진(吳晉) : 자는 개자(介玆)로 명 나라 강남(江南) 상원(上元) 사람이다.[두주]
[주D-033]주일시(朱一是) : 자는 근수(近修)로 명 나라 절강(浙江) 해염(海鹽) 사람인데, 《위가당집(爲可堂集)》을 남겼다.[두주]
[주D-034]소요부(邵堯夫) : 주 61) 참조.
[주D-035]희령(熙寧) :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다.[두주]
[주D-036]점필재(佔畢齋) : 성은 김(金), 이름은 종직(宗直), 자는 계온(季溫)으로 세조 기묘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ㆍ예문제학(藝文提學)에 이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연산 무오년에 화를 당했는데, 뒤에 설원(雪冤)되었으며, 문집과 서원이 있다.[두주]
[주D-037]권석주(權石洲)의 궁류앵비(宮柳鶯飛) 시 : 이름은 필(鞸), 자는 여장(汝章), 본관은 안동(安東),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광해군 임자년에 화를 당했는데, 뒤에 설원되고 벼슬도 추증되었으며, 문집과 향사(鄕祠)가 있다. 그가 일찍이 궁류시를 지었는데, 광해군이 그 시를 보고 미워하여 그를 장형(杖刑)과 유형(流刑)에 처하여,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두주] 궁류앵비(宮柳鶯飛) 시는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이 정권을 휘두르자 임숙영(任叔英)이 대책문(對策文)에서 그의 무도함을 공박했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었다. 그 뒤 권필도 유희분을 공박하는 뜻에서 “궁류는 푸르고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장안에 가득찬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첨한다. 온 조정 모두 태평성세를 축하하는데 그 누가 직언을 포의에게서 나오게 했는고[宮柳靑靑鶯亂飛 滿城冠蓋媦春輝 朝廷共賀承平樂 誰遣危言出布衣]라는 궁류시를 지어, 은연중 궁류는 유희분을, 포의는 임숙영을 비유하였다가, 유배당해 유배지로 가던 도중 동대문 밖에서 죽었다.
[주D-038]지사(志士)는 …… 않는다 : 이 말은《맹자》공손추(公孫丑)에 보인다.[두주]
[주D-039]사송(詞訟) …… 방납(防納) : 사송은 말로 시비곡직을 다투는 일, 소장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 관절은 청탁(請託)하는 일, 방납은 물품을 대신 내고 이익을 얻는 일이다.[두주]
[주D-040]형서(刑恕) : 자는 화숙(和叔)으로 송 철종(宋哲宗) 때 사람인데, 처음에는 정자(程子)를 종유하다가 나중에는 장돈(章惇)에게 붙었다.[두주]
[주D-041]여형공(呂滎公) : 북송(北宋) 명신(名臣) 여희철(呂希哲)이 형양군공(滎陽郡公)에 봉해졌으므로 여형공이라 칭한 것이다. 여희철은 송 나라 사람으로 자는 원명(原明)인데, 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장재(張載)를 종유하였고, 저서에는《여씨잡기(呂氏雜記)》가 있다.
[주D-042]유 충정공(劉忠定公) : 이름은 안세(安世), 자는 기지(幾之)로 송 나라의 명인(名人)이다. 진사제(進士第)에 합격하여 벼슬이 좌간의(左諫議)에 이르렀다. 신종(神宗)ㆍ철종(哲宗) 때 사람이다.[두주]
[주D-043]설 문청공(薛文淸公) : 이름은 선(瑄), 자는 덕온(德溫), 호는 경헌(敬軒)으로 명 나라 하진(河津) 사람인데, 영락(永樂) 때의 진사로서 벼슬이 내각(內閣)에 이르렀으며, 저서에는《독서록(讀書錄)》이 있다.[두주]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