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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절 3(士小節三) - 사전 3
교습(敎習)
인륜(人倫)
교습(敎習)
선비가 독서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한 언어(言語), 한 동작(動作)에서 반드시 성현(聖賢)의 행동과 훈계를 이끌어 준칙으로 삼아 전도됨이 없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속 사람이 글자 한 자도 읽지 않아 방향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거론할 것도 못되거니와, 글을 많이 읽었다고 본디 일컬어진 자까지도 다소 배운 글귀를 과거(科擧) 글에만 사용하고 자기 몸에는 한 번도 시험하여 그 효험을 받지 않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또한 옛글을 익히 외워 말끝마다 인용하는 자도 있으나 그 마음씨를 살피면 아첨 교활하고, 소위 인용하는 것이 한갓 입술을 꾸미는 자료로 삼을 뿐이니, 이런 식이면 글을 아무리 많이 읽더라도 어디에 쓰겠는가? 글을 읽어서 부드럽고 아첨한 태도를 짓는 자를 누구나 사랑하니 슬프다.
어떤 이가,
“선비가 지켜야 할 직분은 대체로 몇 가지인가?”
하고 묻기에 나는,
“대략 들면,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고,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 읽는 것, 이 네 가지 일일 뿐이다.” 하였다.
하루 종일 글도 읽지 않고 마음 단속도 않고 사우(師友)도 만나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서, 빈둥빈둥 돌아다니고 시끄럽게 떠들고 쓸데없는 망상을 하고 비스듬히 앉고 벌렁 눕고 장기나 바둑을 두고 술에 만취하고 한낮에 낮잠을 잔다면 한가로운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으나, 밤에 자다가 새벽에 깨어서 어제 한 일을 고요히 생각하면, 인사(人事)의 갖추어지지 못함이 마치 수족이 마비된 반신불수와 같은 것이다.
반나절을 헛되이 보내는 것은 비유하건대 상란(喪亂)을 당하여 가취(嫁娶)의 시기를 놓치거나, 수한(水旱)을 만나서 가색(稼穡)의 시기를 잃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상란과 수한은 어찌 내가 만든 것이랴?
오여필(吳與弼)001]은 이렇게 말했다.
“생활이 빈곤하면 모든 일들이 사람을 얽어맨다. 환경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편으로는 빈곤에 대처하고, 한편으로는 학문에 정진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고반룡(高攀龍)002]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재주가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니, 지식이 진전되면 재주도 진전된다. 도량이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니, 견문이 넓으면 도량도 넓어진다. 모든 것이 배움에서 얻어진다.”
시윤장(施閏章)003]은 이렇게 말했다.
“종일토록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성현의 길을 끊는 것이고, 종일토록 남의 허물을 즐겨 말하면 천지의 화기를 상하게 하는 것이다.”
남의 나쁜 글을 외어서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말고, 시문(詩文)의 찬자(撰者)를 바꾸어서 남을 속이거나 어린아이들에게 주지도 말라.
남의 재주는 추장해야 하지 가로막아서는 안 되고, 나의 재주는 수련해야지 자랑해서는 안 된다.
1푼쯤 유명해지려 하면, 벌써 1푼쯤 실속이 없어지는 것이다.
문장[文藻]004]만을 한다면 비록 80~90을 산다 하더라도 사람의 그림자 구실만 할 뿐이다.
내게 한 가지 재주가 있거든 남들에게 자랑하려는 마음을 먼저 막으라.
종일 자기 재능을 자랑하기 위한 일들만을 지껄이고 남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는다면 성인(聖人)의 경지에 들 수 없으니 역시 딱하다. 전(傳)에,005]
“실(實)해도 허(虛)한 듯하다.”
하고, 《주역(周易)》에는,
“겸손해야 보탬을 받는다.”
하였다. 나의 일만을 자랑하면 남의 일은 자연 배척된다.
남보다 유능하다는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겸손해지고, 남보다 나으려는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평탄해지고, 사치스러운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질투한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화평해진다는 것은 유사천(劉師川)006]이 마음을 다스리던 좋은 방법이다. 자신을 자랑하는 말, 남을 깎아 내리는 말, 케케묵은 말, 한만한 말, 희롱하는 말, 꾸미는 말, 근거 없는 말 등을 일체 하지 않고 종일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은 유즙산(劉蕺山)007]이 말을 삼가던 요지(要旨)다.
언어와 행동을 자기의 신심(身心)에 부합되지 않게 한다면 늙도록 허공만 더듬는 격의 인생일 뿐이다. 이는 모두 글을 잘 읽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니, 참으로 맹랑(孟浪)008]한 사람이다.
하흠(賀欽)009]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 글의 내용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가지도 소득이 없다.”
글을 읽고 몸을 닦는 데 만일 표준이 없으면 족히 그 효험을 보지 못한다.
강학(講學)ㆍ성찰(省察)ㆍ함양(涵養)ㆍ천리(踐履) 이것은 지행(知行)에 있어서 목표됨이 매우 중요하고 포괄된 바가 매우 넓다. 이것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호) 선생의 학문하는 방법이었다.
용촌(榕村) 이광지(李光地)010]는 이렇게 말했다.
“‘입에서는 육예(六藝)011]의 글을 읊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손에서는 백가(百家)의 책이 떠나지 않는다. 일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그 요점을 드러내고,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그 심오한 이치를 끌어낸다.’ 이상은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이 글 읽는 일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요지는 ‘일을 기록한다’느니 ‘말을 적는다’느니 하는 두 구절에 있다. 무릇 글이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이 결국[終]012]은 손으로 한번 써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손이 움직이면 마음이 반드시 따르는 것이므로 비록 20번을 읽어 왼다 하더라도 한 차례 힘들여 써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 요점을 드러낸다면 일을 보는 데 자세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반드시 그 심오한 이치를 끌어낸다면 이치를 생각하는 데 정밀하지 않음이 없을 것임에랴? 만일 그 중에서 다시 같고 다른 점을 살피고 옳고 그른 점을 판단하여 그 의심나는 점을 기록한 다음 그에 대한 변론을 붙인다면, 지혜의 개발됨이 더욱 깊고 마음의 안착됨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013]”
이상은 용촌이 자제들에게 책을 베끼기를 권면하는 방법이다.
글씨를 쓸 때에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획이 완성되지 못한 글자를 만들지 말라. 이를테면 유(劉) 자를 ‘刘’로, 권(權) 자를 ‘栦’으로, 나(羅) 자를 ‘罖’로 엄(嚴) 자를 ‘吅’으로 변(邊) 자를 ‘过’으로 쓰는 따위다.
육서(六書)014]에 밝지 못하면 육경(六經)015]을 통할 수 없다. 먼저 《설문(說文)》016]을 읽어 자획(字畫)ㆍ자의(字義)ㆍ자음(字音)을 분명히 알고 그 다음 글을 읽어야 그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 습속의 그릇된 점을 다 변경시킬 수는 없으니, 언어(言語)나 서찰(書札)에서 너무 심한 것만을 제외하고는 우선 습속을 따라야 하며, 기이한 글자나 옛날 음운을 써서 통하지 못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옛글을 배우되 거기에 고착한다면 참된 옛글이 아니요, 고금을 참작해야 오늘날의 참된 옛글인 것이다.
언어(言語)ㆍ문자(文字)ㆍ음운(音韻)017]의 평(平)ㆍ상(上)ㆍ거(去)ㆍ입(入)018]은 분명하게 발음해야 한다. 지금 속음(俗音)에 통제사(統制使)019]의 통(統) 자와 영남(嶺南)020]의 영(嶺) 자와 비변랑(備邊郞)021]의 비(備) 자를 다 평성(平聲)으로 하고, 동작진(銅雀津)022]의 동(銅) 자와 금수(禽獸)의 금(禽) 자와 간폐(肝肺)의 간(肝) 자를 다 거성(去聲)으로 하며, 또는 리(李)와 이(爾), 려(呂)와 여(與), 룡(龍)과 용(容), 련(蓮)과 연(緣)의 음을 혼동하고 심지어는 형(兄)을 성(城), 향(香)을 상(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따위는 모두 야비하다.
의심나는 일이나 의심나는 글자가 있으면 즉시 유서(類書)나 자서(字書)를 상고하라.
글을 읽을 때는 명물(名物)이나 또는 문의(文義)가 어려운 대문은 그때그때 적어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물으라. 선배인 장학성(張學聖)과 나의 일가인 복초(復初)는 남을 만나기만 하면 물었다.
글을 읽어서 좋은 구절을 발견하거든 반드시 동지에게 기꺼이 알려 주되 행여 다 알려 주지 못할 것처럼 하라. 교교재(嘐嘐齋) 김공(金公)023]은 머리가 하얀 노경에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가르쳐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총민한 소년을 만나면 반드시 쌓인 서책을 흔연히 펼치고 옛사람의 아름다운 일과 좋은 말을 찾아내서 읊조리고 강론하는 등 끈덕지고 자상하게 일러 주었다. 나는 찾아가 뵐 때마다 소득이 많았으니, 농암(農巖)ㆍ삼연재(三淵齋)024]의 유풍(遺風)을 볼 수 있었다.
사대부(士大夫)가 의서(醫書)를 읽으면 몸 조심하는 방법을 알 수 있고, 율령(律令)을 읽으면 처세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병과 죄가 곧 닥칠 것만 같은 생각으로 늘 경계하여 해(害)를 멀리하기 때문이다.
책을 볼 때에는 서문(序文)ㆍ범례(凡例)ㆍ저서인(著書人)ㆍ참교인(參校人) 그리고 권질(卷帙)이 얼마며 목록(目錄)이 몇 조목인지를 먼저 보아 그 책의 체재를 구별해야 하고, 대충대충 보아 넘기고서 박학(博學)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책을 읽을 때에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책장을 넘기지 말고, 손톱으로 글줄을 긁지도 말고, 책장을 접어서 읽던 곳을 표시하지도 말고, 책머리를 말지도 말고, 책 표면을 문지르지도 말고, 땀난 손으로 책을 들고 읽지도 말고, 책을 베지도 말고, 팔꿈치로 책을 괴지도 말고, 책으로 술항아리를 덮지도 말고, 먼지 쓰는 곳에서 책을 펴지도 말고, 책 보면서 졸므로 해서 어깨 밑에나 다리 사이에 떨어져서 접히게 하지도 말고, 책을 던지지도 말고, 심지를 돋우거나 머리를 긁은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지도 말고, 힘차게 책장을 넘기지도 말고, 책으로 창이나 벽에 휘둘러서 먼지를 떨지도 말라.
주명여(周明璵)025]는 말하기를,
“책을 쌓아 놓고 읽지 않으면 역시 물건을 마구 버리는 격이요, 여러 책을 널리 섭렵하는 것은 한만하게 노는 것과 같다.”
하였고, 왕승건(王僧虔)026]은 이들을 경계하기를,
“왕년에 역사에 뜻을 두고 《삼국지(三國志)》를 가져다 책상 머리에 1백 일 동안이나 놓아 두고서 다른 책을 보았으므로 일찍이 그 내용의 귀추를 분별하지 못했으니, 종일토록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었다. 남들은 너의 속임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황산곡(黃山谷)027]은 단돈례(檀敦禮)028]의 물음에 답하기를,
“《한서(漢書)》는 가장 읽기 좋은 책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권질(卷帙)의 선후에 따라 한 자 한 자 읽어 나가서 그 일대의 사실이 가슴속에 들어 있게 해야 반고(班固)029]를 저버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였고, 사마온공(司馬溫公)은 말하기를,
“학자 중에 책을 읽을 때 능히 한 권을 끝까지 다 읽고 그만두는 자가 적다.”
하였다.
학사(學士) 하섭(何涉)030]은 책상 위에 오직 한 책만을 놓고서 그 책을 끝까지 다 보기 전에는 맹세코 다른 책을 보지 않았다.
왕구산(王緱山)031]은 책을 읽을 때마다 첫머리부터 끝까지 교정을 하였고, 비록 수백 권 속의 잘디잔 전주(箋註)라 하더라도 한 글자도 소홀하게 보아 넘기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독서(讀書)는 입신(立身)과 같으니, 모름지기 본말(本末)을 두어야지 구차하게 할 것이 아니다. 지금 시렁 위에 있는 몇 권의 책을 대강만 훑어보고 곧 싫증이 나서 팽개쳐 버린다면 추솔하고 소략하여 앞에서 잊고 뒤에서 잃고 할 것이니 학문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곧 이익 없는 물건을 구경하여 뜻을 상하게 할 뿐인 것이다.” 하였다.
남의 집에 있는 책을 보면 첫 권은 반드시 파손되고 더렵혀졌으나 둘째 권부터 끝 권까지는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니, 선비의 뜻이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춘당(同春堂) 송(宋) 선생032]은 책을 남에게 빌려 주었다가 그 사람이 책을 돌려 왔을 때 책장이 부풀지 않았으면, 그 책을 읽지 않았다고 반드시 꾸짖고 다시 내어 주었으므로, 그 사람은 그 책을 꼭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책을 빌려다가 읽지도 않고는 꾸지람을 들을까 꺼려서, 책을 밟기도 하고 책 위에 눕기도 하여 일부러 파손하고 더럽힌 뒤에 비로소 돌려보냈으니, 이것은 또 도리에 어긋난 행동으로서 어른의 후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른이나 친한 벗이 요즘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거든, 글을 읽으면 글을 읽는다, 글을 지으면 글을 짓는다, 책을 베끼면 책을 베낀다고 반드시 솔직하게 대답하야 하고 ‘요즘 그저 놉니다.’라고 한결같이 대답해서 일부러 하는 일을 숨겨서는 안 되며, 또한 하는 일이 없는데도 과업(課業)에 열중하고 있다고 억지로 대답하여 일부러 그 나태함을 숨겨서는 안 된다. 대저 날마다 과정(課程)을 차리면 마음이 밖으로 달리지 않는다.
눈도 밝고 손도 잘 놀리면서 게으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자는 툭하면 반드시 ‘소일(消日)하기가 매우 어렵다.’하는데, ‘소일’ 두 글자는 석음(惜陰)033]과 상반되니, 크게 상서롭지 못한 말이다. 나는 비록 노둔하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김현(金鉉)034]은 이렇게 말했다.
“말과 웃음과 필찰(筆札)과 교유(交遊)와 망상(妄想)은 생략할 것이나, 촌각(寸刻)도 생략할 수 없는 것은 몸가짐을 삼감과 글 읽는 일뿐이다.”
글을 읽는 것은 청아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만 노역하면 진부한 습속이니, 어찌 공부에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글을 읽을 때 기운을 돋우고 소리를 빨리 내면 듣는 사람이 싫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먼저 싫증이 나서 계속하지 못한다.
글 읽는 소리는 침착하고 분명해야 한다. 만일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기 위해 억지로 좋은 소리를 낸다면 글뜻을 이해 못할 뿐 아니라, 기녀(妓女)와 영인(伶人)035]이 유행가나 타령(打令)036]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경서(經書)를 읽을 경우에 시(詩)를 인용한 부분은 마땅히 건너뛰고 소리내어 읽지 말아야 한다. 전주(全州) 사람 이겸진(李謙鎭)037]은 상중에 있으면서 《상서(尙書)》를 읽을 때 갱재가(賡載歌)038]와 오자지가(五子之歌)039]를 읽지 않았다 한다. 이 말은 이형상(李亨祥)040]에게 들었다.
상중(喪中)에 있을 때엔 부화(浮華)한 여느 글을 읽어서는 안 되고 다만 상례(喪禮)ㆍ제례(祭禮)를 읽되 소리를 내어서는 아니된다. 세상에 혹 상중에 과거(科擧)에 관한 시부(詩賦)를 짓는 자가 있는데, 슬픔을 망각하는 일이니 어찌하리요. 041]
병중에 한 가지 경서(經書)를 보면 가장 소득이 있을 것이다.
《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중용(中庸)》은 학문을 해 올라가는 과정에 있어서 계단이 일사불란하다. 그 뒤를 이어서 공부할 책은 《소학(小學)》ㆍ《근사록(近思錄)》ㆍ《격몽요결(擊蒙要訣)》ㆍ《성학집요(聖學輯要)》042]로서, 규모가 정밀하여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계단이니, 나는 일찍이 그것을 이름하여 후사서(後四書)라고 한다. 그것을 되풀이해 읽어 일관하면 자연 공효가 있을 것이므로 매양 동료들에게 학규(學規)를 삼도록 권한다.
사서(四書)043]ㆍ육경(六經)044] 및 염락관민(濂洛關閩)045]의 책은, 사람은 누구나 모름지기 종신토록 공부하기를 마치 농부가 오곡(五穀)046]을 가꾸듯이 해야 한다. 매양 한 경서를 공부할 때마다 반드시 자기의 능력을 다하여 철저히 힘써야만 좋다. 공부하는 방법은 첫째 경문(經文)을 익히 욀 것이요, 둘째 여러 사람의 설을 다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분별하고 장점과 단점을 비교할 것이요, 셋째 정밀히 생각하여 의심되는 것을 풀이하고서도 오히려 감히 자신감을 갖지 말 것이요, 넷째 밝게 분별하여 그릇된 것을 버리고서도 오히려 감히 스스로 옳게 여기지 말 것이다. 능히 한 경서에서 문호를 찾아 들어간다면 모든 책이 다 한방에 있을 것이요, 문호가 다른 책은 유추(類推)해서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학업을 이루어 세상에 이름을 낸 사람은 반드시 이렇게 했을 것이다.047]
이상은 이용촌(李榕村)의 독서법(讀書法)이니, 학자는 법삼을 만하다.
옛날이든 지금이든 일과 행실은 다 같은 것이니, 옛글을 잘 읽으면 그 하나하나가 오늘날 나의 일과 행실에 부합(符合)048]된다. 다른 글은 물론하고 《소학(小學)》 한 책만 해도 잘 사용한다면 대소경중이 어느 일에나 있으므로 척척 취해 써도 남음이 있다.
연의(演義)나 소설(小說)049]은 음란한 말을 기록한 것이니 보아서는 안 된다. 자제들에게 보지 못하게 금해야 한다. 혹간 남을 대해서 소설 내용을 끈덕지게 얘기하거나 남에게 그것을 읽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니, 애석하도다! 사람의 무식이 어찌 이 지경일까? 《삼국연의(三國演義)》050]는 진수(陳壽)051]의 정사(正史)와 혼동하기 쉬운 것이니,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후생들은 게을러서 경사(經史)를 읽지 않고 반드시 선배들에게 묻기를,
“무슨 글을 먼저 읽어야 과문(科文)을 잘할 수 있습니까?”
하고, 선배들은 연의(演義)나 소설(小說)을 읽도록 권하니, 슬프도다 똑같이 잘못함이여!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쳐 줄 때에는 많은 분량 가르쳐 주는 것은 절대 금기다. 총민(聰敏)한 자가 조금만 읽어서 잘 외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거니와 둔한 자에게 많은 분량을 익히는 것은 마치 약한 말에 무거운 짐을 실은 것과 같으니 어찌 멀리 갈 이치가 있겠는가? 글은 분량을 적게 해서 익히 읽어 뜻을 아는 것이 귀중하다. 만일 이와 같이한다면 비록 둔해서 잘 외지 못한다 하더라도 용서하는 것이 좋다. 헛되이 읽기만 하고 잘 외지 못하면 더욱 주의하여 그의 외는 것을 살피는 것이 좋다.
나는 어릴 때 하루 배우는 분량이 50줄에 불과하였으니 그것은 기질이 약했기 때문이요, 헛되이 읽지 않았으니 그것은 성질이 근졸(謹拙)했기 때문이요, 외는 것은 대개 잘하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히 읽어서 뜻을 알았기 때문에 어른이 책망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 엄하게 단속해서는 안 된다. 엄하게 단속하면 기백이 약한 아이는 겁을 먹고 기질이 강한 아이는 울분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다. 너그럽게 놓아두어서도 안 된다. 너그럽게 놓아두면 뜻이 졸한 아이는 게을러지고 기질이 강한 아이는 방종해지며 능멸하는 마음이 생긴다. 모름지기 말을 몰고 매를 부리는 것처럼 하여, 채찍이 항상 손에 있어 알맞게 조정하는 것이 옳다.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쳐 줄 때에는 번거롭게 말하는 것이 가장 금기다. 모름지기 그 재품(才品)의 고하에 따라 상세하고 간략하게 해설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무슨 침착하고 안정함이 있는 자이겠는가? 혼약(昏弱)하지 않으면 반드시 번조(煩躁)할 것이니, 만일 고묘(高妙)한 문의(文義)를 말해 준다면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며 ‘네, 네’ 할 뿐이다. 뛰어 일어날 마음이 있으면 정의(情義)가 이로 해서 막힌다. 전(傳)에 이르기를,
“중등 이하 사람에게는 높은 것을 말할 수 없다.” 052]
하였다.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쳐 줄 때에는 그 아이가 아무리 둔하더라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내가 일찍이 남의 부탁을 받아 수십 명의 아이를 가르쳤으나 필경에는 성취한 자가 적었으니, 그것은 모두가 부형의 익애(溺愛)에 연유된 것이다. 처음에는 비록 신신부탁을 하고 행여 엄하게 통솔하지 않을까 염려하나, 만일 매를 때리면 크게 괴이한 일로 여기고 아이도 배반하고 가버렸다. 그러므로 비록 엄한 사우(師友)가 있더라도 어진 부형(父兄)이 없으면 어질지 못한 자제는 금수처럼 되어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니, 그것은 사우의 허물이 아니라, 바로 부형의 무지 때문이다.
어린애를 부추켜 손님을 함부로 희롱하게 하고, 따라서 상스러운 말을 하며 때림으로써 웃음거리를 삼거나 또는 서로 칭찬하기를 ‘이 아이는 퍽 영리하니 커서 반드시 훌륭하게 될 것이다.’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애가 거리낌 없이 방자하여 장차 흉패(凶悖)해지게 만드는 조짐임을 모르는 일이니, 그런 짓은 엄격히 금해야 한다. 어찌 차마 그런 짓을 조장할 수 있겠는가? 《시경(詩經)》에 이렇게 말했다.
“원숭이에게 나무 오르는 일을 가르치지 말라. 진흙에 진흙을 붙이는 격이다.” 053]
[주D-001]오여필(吳與弼) : 호는 강재(康齋)로 명 나라 숭인(崇仁) 사람이며, 사업(司業) 보(溥)의 아들이다.[두주]
[주D-002]고반룡(高攀龍) : 자는 존지(存之), 호는 경일(景逸)로 명 나라 무석(無錫) 사람인데, 만력(萬曆) 때의 진사로서 행인(行人)을 제수받고 뒤에 좌도어사(左都御史)에 올랐다.[두주]
[주D-003]시윤장(施閏章) : 자는 우산(愚山)으로 선성(宣城) 사람인데, 청 나라 강희(康熙) 때 벼슬이 시독관(侍讀官)에 이르렀고《명사(明史)》를 찬수하였다. 의전(義田)을 두어 종족(宗族)을 구제하고 시문집을 남겼다.[두주]
[주D-004]문장[文藻] : 공안국(孔安國)의《상서전(尙書傳)》에 “조(藻)는 수초(水草)로서 문채가 있는 것이니, 문장을 비유한다.” 하였다.[두주]
[주D-005]전(傳) : 여기서는《논어》태백(泰伯)을 가리킨다.[두주]
[주D-006]유사천(劉師川) : 이름은 방채(邦采), 자는 군량(君亮)으로, 명 나라 안복(安福) 사람인데, 벼슬은 가흥부동지(嘉興府同知)에 올랐다.[두주]
[주D-007]유즙산(劉蕺山) : 이름은 종주(宗周), 자는 기동(起東), 호는 염대(念臺)로 명 나라 산음(山陰) 사람인데, 만력 때의 진사로 행인(行人)을 제수받고 시호는 충단(忠端)이다.[두주]
[주D-008]맹랑(孟浪) : 정요(精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두주]
[주D-009]하흠(賀欽) : 자는 극공(克恭), 호는 의려(醫閭)로 명 나라 정해(定海) 사람인데, 성화(成化) 때의 진사로 벼슬이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에 이르렀다.[두주]
[주D-010]이광지(李光地) : 자는 진경(晉卿)으로 안계(安溪) 사람인데, 강희 때 진사로 벼슬은 문연각태학사(文淵閣太學士)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문집이 있다.[두주]
[주D-011]육예(六藝) : 예(禮)ㆍ악(樂)ㆍ사(謝)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다.[두주]
[주D-012]결국[終] : 《용촌전집(榕村全集)》에는 총(總) 자로 되어 있다.
[주D-013]지혜의 …… 것이다 : “입에서는~더욱 견고해질 것이다,”의 내용은 《용촌전집》권21 적한자독서결과자제(摘韓子讀書訣課子第) 조에 보인다.
[주D-014]육서(六書) : 지사(指事)ㆍ상형(象形)ㆍ해성(諧聲)ㆍ회의(會意)ㆍ전주(轉注)ㆍ가차(假借)이다.[두주]
[주D-015]육경(六經) : 《역(易)》ㆍ《서(書)》ㆍ《시(詩)》ㆍ《예(禮)》.《악(樂)》ㆍ《춘추(春秋)》이다.[두주]
[주D-016]《설문(說文)》 : 한(漢) 나라 허신(許愼)이 지었다. 허신의 자는 숙중(叔重)으로 소릉(召陵) 사람인데, 화제(和帝) 때 좨주(祭酒) 벼슬을 지냈다.
[주D-017]음운(音韻) : 《옥편(玉篇)》에 “성음(聲音)이 조화된 것을 운(韻)이라 한다.” 하였다. 한ㆍ위(漢魏) 이전의 글에는 음(音)이라 말하고 운(韻)이라 말하지 않았는데, 진(晉) 이후로 음이 낮추어져 운이 되었는데, 운은 제량(齊梁)에서 시작되었다.[두주]
[주D-018]평(平)ㆍ상(上)ㆍ거(去)ㆍ입(入) : 곧 사성(四聲)이다.[두주]
[주D-019]통제사(統制使) : 벼슬 이름인데, 삼남(三南)의 주사(舟師)를 통솔하였다. 선조 임진왜란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서 여러 번 싸워 전승을 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설치하여 이공(李公)을 제배하였다.[두주]
[주D-020]영남(嶺南) : 경상도가 조령(鳥嶺)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칭한다.[두주]
[주D-021]비변랑(備邊郞) : 역시 벼슬 이름이다.[두주]
[주D-022]동작진(銅雀津) : 도성(都城) 남쪽 10리쯤에 있다.[두주]
[주D-023]교교재(嘐嘐齋) 김공(金公) : 이름은 용겸(用謙), 자는 제대(濟大), 본관은 안동인데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농암과 삼연재의 종자(從子)다.[두주]
[주D-024]농암(農巖)ㆍ삼연재(三淵齋) : 농암은 이름이 창협(昌協), 자는 중화(仲和)로 숙종조에서 문과에 괴장원으로 합격하여 문형(文衡)을 맡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門簡)이고 서원과 문집이 있다. 삼연재는 이름은 창흡(昌翕), 자는 자익(子益)으로 벼슬은 집의(執義),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서원과 문집이 있다.[두주]
[주D-025]주명여(周明璵) : 자는 숙로(叔魯), 호는 노대(魯臺)로 명 나라 강남(江南) 상해(上海) 사람인데, 저술에 《서원고(鋤園稿)》가 있다.[두주]
[주D-026]왕승건(王僧虔) : 제(齊) 나라 낭야(瑯琊) 사람인데, 벼슬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고 예서(隸書)를 잘 썼다.[두주]
[주D-027]황산곡(黃山谷) : 이름은 정견(庭堅), 자는 노직(魯直)으로 송 나라 분녕(分寧) 사람인데, 신종(神宗)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발탁되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시를 잘 지어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조종이 되고《산곡집(山谷集)》을 남겼다.[두주]
[주D-028]단돈례(檀敦禮) : 사람의 성명인데,《산곡집》연명(硯銘) 조에 보인다.[두주]
[주D-029]반고(班固) : 자는 맹견(孟堅)으로 한(漢) 나라 부풍(扶風) 사람인데, 명제(明帝) 때 난대영사(蘭臺令史)를 지내고《전한서(前漢書)》를 지었다.[두주]
[주D-030]하섭(何涉) : 자는 제천(濟川)으로 송 나라 남연(南兗) 사람인데, 진사로서 벼슬이 사봉원외랑(司封員外朗)에 이르렀고, 저서에는《춘추본지(春秋本旨)》와《여강집(廬江集)》이 있다.
[주D-031]왕구산(王緱山) : 이름은 형(衡), 자는 진옥(振玉)으로 명 나라 태창(太昌) 사람인데, 벼슬이 편수관(編修官)에 이르렀다.[두주]
[주D-032]동춘당(同春堂) 송(宋) 선생 : 이름은 준길(浚吉), 자는 명보(明甫), 본관은 은진(恩津)인데, 인조 갑오년 사마(司馬)시에 합격하고, 은일로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서원과 문집이 있다.[두주]
[주D-033]석음(惜陰) : 《진서(晉書)》도간전(陶侃傳)에 “우(禹) 임금은 촌음(寸陰)을 아꼈으니 우리는 분음(分陰)을 아껴야 한다.” 하였다.[두주]
[주D-034]김현(金鉉) : 자는 백옥(伯玉)으로 순천(順天) 사람인데, 명 나라 숭정(崇禎) 때의 진사로 벼슬이 병부 주사(兵部主事)에 이르고 시호는 충절(忠節)이다.[두주]
[주D-035]영인(伶人) : 영(伶)은 옛날의 악사(樂師)며, 지금의 악공(樂工)이다.[두주]
[주D-036]타령(打令) : 영(令)은 사곡(詞曲) 이름인데, 광대의 잡곡(雜曲)을 타령이라 한다.[두주]
[주D-037]이겸진(李謙鎭) : 자는 백익(伯益), 본관은 덕수(德水)이다.[두주]
[주D-038]갱재가(載歌) : 《서경》우서(虞書) 익직(益稷)에 보인다.[두주]
[주D-039]오자지가(五子之歌) : 《서경》하서(夏書) 편명이다.[두주]
[주D-040]이형상(李亨祥) : 자는 정부(正夫), 완산인(完山人)이다.[두주]
[주D-041]상중(喪中)에 …… 어찌하리요 : 상중에 있으면서 과체(科體)와 시부(詩賦)를 짓는 자는 모름지기 남조의 사혜련(謝惠連)이 아버지의 상중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 남에게 주었다가 폐고(廢錮) 당한 일로 경계를 삼을 만하다. 사혜련의 일은 위에 자세히 보인다. 과거(科擧)로 인재를 취하는 일은 수(隋) 나라에서 비롯되었다. 아조(我朝 : 조선조)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꾸준히 과거를 실시한다. 소과(小科)에는 시(詩)ㆍ부(賦)ㆍ의(義)ㆍ의(疑), 대과(大科)에는 표(表)ㆍ책(策)ㆍ부(賦)ㆍ논(論)ㆍ의(疑)ㆍ잠(箴)ㆍ명(銘)ㆍ송(頌)을 시제(詩題)로 하고 식년문과(式年文科)에는 명경시(明經試)가 있다.[두주]
[주D-042]《격몽요결(擊蒙要訣)》ㆍ《성학집요(聖學輯要)》 : 모두 율곡선생이 편찬한 책 이름이다.[두주]
[주D-043]사서(四書) : 《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중용(中庸)》이다.[두주]
[주D-044]육경(六經) : 《역(易)》ㆍ《서(書)》ㆍ《시(詩)》ㆍ《예(禮)》ㆍ《악(樂)》ㆍ《춘추(春秋)》인데, 위에 보인다.[두주]
[주D-045]염락관민(濂洛關閩) : 주자(周子: 주돈이(周惇頤))는 도주(道州) 영도현(營道縣) 염계(濂溪)에 살았고, 정자(程子 : 정이(程頤))는 대대로 중산(中山)에서 살아오다가 하남(河南) 즉 낙양(洛陽)으로 이사해 살았고, 장자(張子 : 장재(張載))는 장안(長安) 즉 관중(關中)에 살았고, 주자(朱子 : 주희(朱熹))는 휘주(徽州) 무원(婺源) 즉 민(閩)에서 살았다.[두주]
[주D-046]오곡(五穀) : 마(麻)ㆍ서(黍)ㆍ직(稷)ㆍ맥(麥)ㆍ두(豆)이다. 마(麻)는 호마(胡麻)로 혹은 거승(巨勝)이라고도 하는데, 속명으로는 진임(眞荏)이다. 서(黍)는 직(稷) 중에 차진 것이요, 직은 서 중에 차지지 않은 것이다. 맥(麥)은 대맥(大麥 : 보리)ㆍ소맥(小麥 : 밀), 두(豆)는 대두(大豆 : 콩)ㆍ소두(小豆 : 팥)인데, 모두《주례(周禮)》ㆍ《순자(荀子)》의 서(序)ㆍ《한서(漢書)》식화지(食貨志)의 주(注)에 보인다. 또《예기》월령(月令)에는 맥(麥)ㆍ숙(菽)ㆍ직(稷)ㆍ마(麻)ㆍ서(黍),《초사(楚辭)》대초(大招)의 주에는 도(稻)ㆍ직(稷)ㆍ맥(麥)ㆍ두(豆)ㆍ마(麻),《주례》직방(職方) 및《사기》와《맹자》의 주에는 서(黍)ㆍ직(稷)ㆍ숙(菽)ㆍ맥(麥)ㆍ도(稻)로 되어 있으니, 오곡의 이름의 전기(傳記)에 나타난 것이 동일하지 않다.[두주]
[주D-047]옛날 …… 것이다 : ‘사서(四書)ㆍ육경(六經)~이렇게 했을 것이다.’의 내용은 《용촌전집(榕村全集)》 권21 답왕중퇴문목사조(答王仲退問目四條)에 보인다.
[주D-048]부합(符合) : 부(符)를 옛날에는 대로 만들어 반으로 쪼개서 한 쪽씩을 가졌다가 뒤에 쪽을 서로 합하여 신표를 삼았으므로 부합이라 한다. 안사고(顔師古)는 “한(漢) 나라 때에는 대로 부(符)를 만들어 거기에 전서(篆書)를 새겨서 군수(郡守)에게 주었는데, 오른쪽은 서울에 두고 왼쪽은 군수에게 주었다.” 하였다.[두주]
[주D-049]연의(演義)나 소설(小說) : 연의는 사건을 부연한 것이고 소설은 패설(稗說)과 같은데, 패(稗)는 세소(細小)의 뜻이다.[두주]
[주D-050]《삼국연의(三國演義)》 : 찬자(撰者)는 미상인데, 명 나라 김인서 성탄(金人瑞聖嘆: 성탄은 자)이 비평(批評)하였다.[두주]
[주D-051]진수(陳壽) : 자는 승조(承祚)로 서진(西晉) 파서(巴西) 사람인데, 무제 때 벼슬이 저작랑(著作郞)에 이르고,《삼국지(三國志)》를 찬하였다.[두주]
[주D-052]중등 …… 없다 : 이 말은 《논어》옹야(雍也)에 보인다.
[주D-053]원숭이에게 …… 격이다 : 이 말은《시경》 소아(小雅) 각궁(角弓) 장에 보인다.[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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