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 제17하 임신년 공양왕 4년(명태조 홍무 25, 1392)
춘정월 사유(赦宥)하였다.
국대비(國大妃)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 권중화(權仲和)를 찬성사(贊成事)로, 이숭인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삼았다. 2월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가 새로 제정한 율(律)을 바쳤다.
정몽주가 《대명률(大明律)》ㆍ지정조격(至正條格 원 순제(元順帝) 지정(至正) 연간에 제정된 법규)과 본조의 법령을 취하여 참작하고 산정(刪定)한 뒤에 신율(新律)을 지어 바치니, 왕이 지신사(知申事)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6일 동안 진강(進講)하게 한 뒤에 매우 기꺼이 받아들였다. 《형법지(刑法志)》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고려의 제도는 대개 당(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형법에 있어서도 당률(唐律)을 채택하였으되 시의(時宜)를 참작하였으므로 총 60여 조를 일시에 시행하였어도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 폐단은 법망(法網)이 신장(伸張)되지 않아 형벌이 너그럽고 사유(赦宥)가 잦았던 탓으로 간흉한 무리들이 제마음대로 법망을 빠져나가되 금제할 수가 없었는데, 말세에 와서는 그 폐단이 극도에 달하여 이에 원조(元朝)의 《의형이람(儀刑易覽)》과 《대명률》을 섞어 쓰자는 건의가 있었던 것이니, 비록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적실한 일이었지만 이미 대강(大綱)이 허물어졌고 국세가 기울어졌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태백(太白)이 주현(晝見)하였다. ○ 사신을 명(明)에 보내어 사례하였다. ○ 혜성(彗星)이 경천(竟天)하였다. ○ 올량합(兀良哈)ㆍ알도리(斡都里)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이 앞서 태조의 헌의(獻議)로 동여진(東女眞)을 초유(招諭)하여, 귀순한 자가 3백여 명에 이르렀었다. 이때에 와서 올량합 및 동여진족의 알도리가 내조하여 서로 제가 장(長)이라고 다투다가 알도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온 것은 장을 다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옛날 시중(侍中) 윤관(尹瓘)이 우리 강토를 평정하고서 비(碑)를 세우기를 ‘고려지경(高麗地境)’이라고 하였으므로, 지금 경내(境內)의 백성이 모두 제군사(諸軍事 이성계를 말한다)의 위신(威信)을 사모하여 온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서로 장을 다투지 않았다. 태조는 집에서 두 추장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성심으로 복종한 때문이다. 여러 추장들에게 모두 만호(萬戶)ㆍ천호(千戶)ㆍ백호(百戶) 등의 관직을 제수하고 모두 우리 국경 안으로 옮겨 번병(藩屛)으로 삼았다. 【안】 올량합은 흑룡강(黑龍江) 남쪽 어양새(漁陽塞) 북쪽에 있는데 춘추 시대의 산융(山戎)이다. 원 때에는 태령로(太寧路)가 되었다가 홍무(洪武) 22년(공양왕 1 1389)에는 3위(衛)로 나뉘었으니 타안(朶顔)ㆍ복여(福餘)ㆍ태령(太寧)이라 하였다. 모두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살고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다. 그 땅이 곧 고해국(古奚國)인데 항상 여진과 통모해서 우리 나라 변방의 근심이 되어 왔다. ○ 왜적이 경상도 구라도(仇羅島)를 노략질하니, 만호 이흥인(李興仁)이 이를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쌀 20석(碩)을 하사하니, 이흥인은 이것으로 모두 술을 빚어 군사들을 먹였다. 3월 우리 태조가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세자가 명에서 돌아왔다.
세자가 명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황제는 특별한 은총으로 대우하여, 차서(次序)를 공후(公侯)의 다음에 하고 내전(內殿)에서 다섯 차례나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돌아올 때에 도당(都堂)에서는 금교(金郊)에 나아가 맞이하고 백관들은 선의문(宣義門) 밖에 나가 줄을 서서 영접하였다. 하4월 조준(趙浚)과 정도전을 먼 곳에 유배하였다.
정몽주는,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중외(中外)의 인심이 쏠리는 것을 보고, 또 조준과 정도전이 추대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은밀히 주선하였다. 5죄(罪)를 확정하여 탄핵과 논박을 억제하고, 옛 인물들을 등용시켰으며, 또 김진양(金震陽) 등을 끌어다가 간직(諫職)에 앉혀 놓고 기회를 타서 도모하려 하였다. 이때 마침 세자가 돌아오게 되자 태조가 황주(黃州)에 나가 맞이하여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게 되었다. 정몽주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기색으로 대간에게 지시하기를, “마땅이 이때를 타서 먼저 우익(羽翼)을 제거한 뒤에 도모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일(임자)에 김진양 및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 우사의(右司議) 이내(李來), 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 우헌납 권홍(權弘), 좌정언(左正言) 유기(柳沂) 등이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 전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 전 판서 윤소종(尹紹宗), 전 판사(判事) 남재(南在), 청주 목사 조박(趙璞) 등을 논핵하기를, “정도전은 미천한 출신으로 당초에 우현보의 먼 친척인 김전(金?)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인 수이(樹伊)의 처를 사통(私通)하여 딸 하나를 낳아 비밀리에 아끼며 키워 사인(士人) 우연(禹延)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딸을 낳아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을 가서 정도전을 낳았다. 정당문학의 지위를 도둑질하여 천한 근본을 감추려고 본주(本主 우현보를 말한다)를 모함해 쫓았으며 참소로 죄를 꾸며내어 수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 조준도 한두 사람의 경상(卿相) 사이에서 우연히 원수와 틈을 일으켜 정도전과 마음을 같이해서 권세를 농단하여 많은 사람들을 꾀고 협박하니, 이에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며 시세를 좇아 부침(浮沈)하는 무리와 그 뜻에 영합하여 일을 일으키려는 무리들이 호응하여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 남은ㆍ남재(南在) 등은 난을 선동하는 우익(羽翼)이 되고, 윤소종ㆍ조박 등은 말을 꾸며대는 후설(喉舌)이 되어 화답하 듯이 일어나 죄망(罪網)을 널리 펼쳐서 형벌을 가할 수 없는 사람 상고하건대 이는 우(禑)와 창(昌)을 가리킨 것이다. 에게 형벌을 시행하였으며, 본래 죄가 없는 사람 상고하건대 이는 이색 등 여러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에게서 죄를 찾아 내려 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라건대 조준 등의 죄를 국문(鞫問)하여 전형(典刑)을 밝게 바루시고 정도전은 배소(配所)에서 처형하소서.” 하므로 왕이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리니, 심덕부(沈德符) 및 정몽주가 의론하여 마침내 조준ㆍ남은ㆍ남재ㆍ윤소종ㆍ조박 등을 먼 곳에 유배하였다. 2일(계축)에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집의(執義) 정희(鄭熙), 장령(掌令) 김묘(金畝)ㆍ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ㆍ이신(李申)이 또 상소하여 조준 등을 죄줄 것을 청하고, 아울러 판전교(判典校) 오사충(吳思忠)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먼 곳에 유배하였다. 정몽주가 이색ㆍ우현보(禹玄寶) 등과 의론하기를, “만약 조준ㆍ남은 등을 탄핵하여 극형에 처하면 조박ㆍ윤소중ㆍ오사충 등의 무리는 족히 제압할 것도 없다.” 하고, 은밀히 대간으로 하여금 연일 번갈아 소장을 올리고 전정(殿庭)에 나아가 복합(伏閤)하고 간쟁(諫諍)하게 하여 조준ㆍ정도전 등을 목벨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조준ㆍ정도전 등이 공신이라 하여 갑자기 죽이고 싶지 않아, 명하여 먼저 남은 등의 공사(供辭) 관련 여부를 국문한 뒤에 아울러 국문하고자 하였다. ○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왕안덕(王安德)이 졸하였다. ○ 수시중(守侍中) 익양백(益陽伯) 정몽주가 졸하였다. 정몽주가 사람을 나누어보내 조준ㆍ정도전 등을 죽이려 하였는데 그때에 태조는 돌아오다가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렀다. 태종이 말을 달려가 고하기를,
“정몽주가 기어코 우리 집안을 함몰시키려 합니다.” 하고, 굳이 청하여 병을 무릅쓰고 밤새 돌아와 3일(갑인) 미명(未明)에 입경(入京)하여 조준 등의 억울함을 서너 차례나 왕복하면서 변론하였으나 왕은 들어 주지 않았다. 이에 태종이 근심에 싸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뵈며 말하기를, “백성의 이해를 결정할 때에는 바로 지금입니다. 왕후(王侯)ㆍ장상(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하니, 태종은 즉시 태조의 집으로 돌아와 휘하 장사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였는데, 태조의 형인 원계(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이 사실을 정몽주에게 누설하였다. 이때 정몽주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걱정하여 밥을 먹지 않은 지가 사흘이나 되었다. 정몽주는 태조의 집을 방문하여 사태의 변화를 살폈는데, 이에 태종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하고 이두란(李豆蘭)을 시켜 격살(擊殺)하도록 하니 이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공(公 이성계를 말한다)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므로 태종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에게 말하니, 조영규가 하겠다 말하고 해주목사(海州牧使) 조무(趙茂), 중랑장(中郞將) 고려(高呂), 판사(判事) 이부(李敷) 등과 길목에 잠복해 있었다. 정몽주가 돌아오는데 동개[?? 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지고 다니는 물건]를 멘 무부(武夫)가 스치며 지나가자 정몽주가 얼굴빛을 변하며 수행하는 녹사(錄事)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처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재삼 꾸짖으며 못 따라오게 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수행하는 몸인데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선죽교(善竹橋)에 이르자 조영규가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해 달아나자 조영규가 따라와 말머리를 쳐서 말이 꺼꾸러지고 정몽주가 땅에 떨어지니 고려가 쳐서 죽이므로 녹사도 끌어안고 같이 죽었다. 이날이 바로 4월 4일(을묘)로 정몽주의 당시 나이는 56세이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를 참고하여 썼다. ○ 녹사의 일은 심씨(沈氏)의 《악부(樂府)》에서 나온 것이다. 태종이 들어가 이 사실을 고하자 태조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함부로 대신을 죽였으니, 국인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라고 하겠느냐? 우리 가문은 본디 충효(忠孝)로 소문이 났는데 너희들이 감히 불효를 저질렀구나!” 하니, 태종이 대답하기를, “정몽주 등이 우리 가문을 망치려 하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마땅히 휘하의 군사들을 모아 불의의 변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였다. 당초에 태조가 정몽주의 기국(器局)이 큼을 알고 여러 차례 천거하여 함께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태종이 일찍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저버리겠습니까?” 하자,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잘못 참소를 당했다면 정몽주는 죽기로써 나의 억울함을 밝힐 것이지만 만약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다.” 하였다. 심씨의 《악부》를 참조하여 편수하였다. 정몽주의 머리를 베어 저자에 효수(梟首)하고 그 가산을 적물(籍沒)하고 그 죄목을 방(榜)에 써서 붙였다. 정몽주는 자(字)를 달가(達可)라 하는데, 사람됨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충효의 대절(大節)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함이 없었으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당시 국가에 변고가 많아 기무(機務)가 매우 번잡했는데, 정몽주는 대사(大事)를 처리하고 미심쩍은 일을 결단함에 있어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좌우로 수답(酬答)하되 모두가 도리에 합당하였으며, 새로 베푼 일이 많아 당시에 왕을 보좌할 인재라고들 하였다. 당시의 풍속이 상례(喪禮)나 제례(祭禮)의 제도가 문란해지고 오로지 상문(桑門 불교를 말한다)만을 숭상하여 사대부(士大夫)가 상(喪)을 당해도 모두 1백 일만 되면 곧장 길복(吉服)을 입었는데, 정몽주만이 돌아간 양친을 시묘(侍墓)하며 애례(哀禮)를 다 갖추었으므로 국가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겨 정려(旌閭)하였다. 귀하게 되어 국사를 처리하게 된 뒤에는 비로소 사족(士族)과 서인(庶人)들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본받아 가묘(家廟)를 세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또 수령(守令)을 참외(參外)나 이서(吏胥)로 마구 임용하여 품계가 낮고 인품이 용렬하므로, 비로소 참관(參官) 중 청망(淸望)이 있는 자를 가려서 등용하고 출척(黜陟)을 엄격히 하였다. 또 금전이나 곡식의 출납이 오직 도평의사 녹사(都評議司錄事)의 백첩(白牒)만으로 시행되어서 외람된 일이 많았으므로 경력도사(經歷都事)를 두어 그 출납을 장부에 올리게 하였으며, 또 서울에는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의 각 고을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니 문풍(文風)이 다시 떨쳤다. 나아가 기강을 바로잡아 국체(國體)를 확립하고 용관(冗官)과 산직(散職)을 도태시키고 준량(俊良)을 등용하며, 호복(胡服)을 바꾸고 중국의 복제를 따르며,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자를 진휼(?恤)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하게 한 것이 모두 그의 계책이었다.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은 호방(豪放)하고 준결(俊潔)하였는데 학자들이 포은 선생(圃隱先生)이라 일컬었다. 행장(行狀)을 참조하여 편수하였다. ○ 우리 태종 을유년(1405 포은 연보에는 태종 원년으로 되어 있다)에 권근(權近)이 상소하여 봉작(封爵)과 시호를 주고, 그 자손에게 녹봉(祿俸)을 지급할 것을 청하여 영의정을 중직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이라 시호하였다. 중종(中宗) 정축년(1517)에 태학생 권전(權?) 등이 상소하여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명종 을묘년(1555)에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세워지고, 선조(宣祖) 경오년(1570)에 개성에 숭양시원(崧陽書院)이 세워졌다. 묘는 용인현(龍仁縣) 관아의 북쪽 20리 지점인 쇄포촌(?布村)에 있고, 또 서원을 세웠는데 지금 능곡(陵谷)이라 부른다.
○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을 유배하고 조준 등을 소환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뒤 태조가 황희석(黃希碩)으로 하여금 왕에게 아뢰어 조준ㆍ남은 등을 소환하도록 청하여 대간과 변명(辨明)하도록 하였고 또, “만약 정몽주 일당의 죄를 묻지 않는다면 신등을 죄주소서.” 하고 청하게 하니, 왕이 부득이 대간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김진양ㆍ이확(李擴)ㆍ이내(李來)ㆍ이감(李敢)ㆍ권홍(權弘)ㆍ정희(鄭熙)ㆍ김묘(金畝)ㆍ서견(徐甄)ㆍ이작(李作)ㆍ이신(李申) 및 이숭인ㆍ이종학(李種學) 조호(趙瑚) 등을 국문하여 유배하였다. 이내는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인데 뒤에 본조(本朝)에 들어와 좌명공신(佐命功臣 1401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운 이들에게 내린 공신호)에 참여하였으며, 서견은 개국 후에 금천(衿川)에 숨어살면서 나오지 않았다. 허씨(許氏)는 이렇게 적었다. 고려가 망할 때 정몽주ㆍ이색ㆍ김진양ㆍ이종학ㆍ길재ㆍ서견 등 몇몇 군자가 〈고려를 위해〉 죽기도 하고 죽지 않기도 했지만 스스로 충절을 지킨 점에서는 한결같다. 【안】 야사(野史)에는, “서견이 아조(我朝)가 건국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지은 시에,
천년의 신도가 한강을 격했는데 / 千載神都隔漢江 충량한 제제다사 밝은 임금 돕는구나 / 忠良濟濟佐明王 삼국을 통일한 공업 어디 있는가 / 統三爲一功安在 전조의 왕업 길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이에 대간이 죄주기를 청하자, 태종은 낯빛을 고치면서 ‘이 사람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 같은 유(流)이니, 상은 줄지언정 죄를 줄 수는 없다.’ 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수찬(修撰) 허봉(許?)이 계청(啓請)하여 대사헌에 증직(贈職)되었다.” 하였다.
○ 배극렴(裵克廉)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조준ㆍ유만수(柳曼殊)를 찬성사로 삼았다. ○ 지용기(池湧奇)가 배소(配所)에서 졸하였다. ○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이색이 풀려나 한주(韓州)로 돌아갔다.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이색에게 이르기를, “경은 물러가오. 양강(兩江)의 바깥 지방만이 경이 갈 수 있는 곳이오.” 하니, 이색이 실의(失意)에 찬 모습으로 아뢰기를, “신은 돌아보아도 전택(田宅) 하나 없으니 과연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였다. 드디어 금천(衿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여흥(驪興)에 이배(移配)되고, 겨울에 사유되어 한주로 돌아갔다. 이색은 자를 영숙(?叔)이라 하는데 자질이 명민(明敏)한 데다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읽어 시문을 지을 때는 붓을 잡고 곧장 써내려가되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후학(後學)을 양성하여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배우는 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여 목은 선생(牧隱先生)이라 일컬었다. 나라의 문한(文翰)을 맡은 지 수십 년에 여러 차례 중국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여 낯빛을 변하는 일이 없고 모난 행동을 드러낸 일이 없었으며, 치산(治産)을 염두에 두지 않아 비록 어려운 처지를 당했어도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정몽주와 시종 뜻을 같이하여 신하의 절개를 변하지 않았으나 불법(佛法)을 숭신(崇信)하여 세상 사람들의 기롱을 받았다. 문인(門人) 권근이 지은 화상찬(?像讚)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천품은 순수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났고, 성학(聖學)은 정미함이 극치에 달해서 마음이 환히 틔어 밝게 빛나네. 실천은 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문장은 표현이 기묘하였네. 증 점(曾點) 같은 광(狂)이 아니면서도 읊조리며 돌아오는 흥취를 가졌고, 유하혜(柳下惠) 같이 화(和)하면서도 불공하다는 비난은 받지 않았네. 학자들은 태산(泰山)과 북두(北斗)같이 우러러 보았고 나라에서는 시귀(蓍龜) 처럼 믿어 의지하였네, 높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마음씀이 한결같았고 큰 어려움을 당하여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충성심이 더욱 미더웠고 결백한 지조는 변치 않았네.
【안】 권근이 찬(撰)한 행장(行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임신년(1392) 7월에 공을 꺼리는 자들이 공에게 극형을 가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성 망령된 말을 한 일이 없는데 감히 거짓 자복할 수 있겠는가? 비록 죽더라도 나는 바른말하는 귀신이 되겠다.” 하자 이 말을 듣고 왕이 특별히 용서해 주었으니 공의 덕택으로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았다. 겨울에 풀려가 한주(韓州)에 돌아갔다가 을해년(1395) 가을에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머물러 있었는데, 왕이 불러 옛 친구의 예로 대우하였고, 병자년 5월에 여강(驪江)에서 졸(卒)하니 향년이 69요, 묘는 지금의 한산군(韓山郡) 서쪽 가지현(加知峴)에 있다. ○ 야사(野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을해년에 이색이 오대사(五臺寺)에 거처하고 있을 때 태조가 여러 번 글을 보내어 부르므로 이색이 교자(轎子)를 타고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뵈니, 태조가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옛 친구의 예로 맞이하면서 말 한 마디 해주기를 원하자 이색은 아뢰기를,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로 편히 살기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해골이나 고향에 묻히게 해주십시오.” 하니, 이에 태조도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중문(中門) 밖까지 전송하고 서로 읍(揖)하면서 이별하였다. 병자년(1396)에 여흥(驪興) 월남촌(月南村)에서 피서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3일에 벽란도(碧瀾渡)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호송하는 중사(中使)도 왔다. 7일에 여흥 연자탄(燕子灘)의 배 안에서 몰(沒)하니 세상에서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개 고려 왕씨의 자손들이 배 안에서 처치된 자가 많았으니, 모두 정도전ㆍ조준 등의 음모이다. ○ 이숭인ㆍ이종학(李種學)ㆍ김진양(金震陽) 등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
우리 태조의 휘하 선비들이 상소하여 정몽주의 당을 다스릴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숭인ㆍ이종학ㆍ이종선ㆍ조호(趙瑚)ㆍ김진양ㆍ이확(李擴)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 이숭인은 자를 자안(子安), 호를 도은(陶隱)이라 하는데, 천품은 영민(英敏)한 예기(銳氣)가 있고,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이색이 매양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흔하지 않다.” 하였고,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 원장(朱元章))가 일찍이 숭인이 지은 표문(表文)을 보고 칭찬하기를, “표문의 말이 진실하고 간절하다.” 하였으며, 중국 사대부들이 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종학(種學)은 이색의 아들로 호를 인재(麟齋)라 하는데, 벼슬이 첨서밀직(簽書密直)에 이르렀고, 형 종덕(種德)은 관직이 지밀직(知密直)이었는데 본조(本朝 고려를 말한다)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켜, 사직이 바뀔 때 목숨을 바쳤다. 김진양은 박학(博學)하고 뛰어난 재주로 사람들이 크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항상 초가집에 살았으므로 호를 초옥자(草屋子)라 하였으며, 유배된지 얼마 안 되어 졸하였다. 【안】 신씨(申氏)는 이렇게 적었다. 정도전과 이숭인은 함께 목은(牧隱)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재명(才名)이 쌍벽을 이루었으나 뜻은 판이하였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불평을 품어 우리 태조가 천명(天命)을 받기에 이르러 정도전이 권력을 잡은 신하가 되자, 자기 심복인 황거정(黃居正)을 이숭인이 유배된 고을의 원으로 내보내 곤장을 쳐서 숭인을 때려 죽였으니, 심하구나 소인의 용심(用心)이여! 얼마 안 있어 정도전이 방석(芳碩)의 난에 관여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황거정도 정도전의 문객(門客)이었기 때문에 태종 때에 훈적(勳籍)을 삭탈당하면 지금껏 〈그 자손이〉 서용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정도전의 화가 숭인보다 훨씬 더하고,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에 빛나고 있으니,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음이 뒷날의 소인들을 경계하기에 충분하다. ○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태종이 전교하기를, “임신년(태조 1 1392)에 곤장을 맞아 죽은 이숭인ㆍ이종학 등의 무리는 실은 곤장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교살(絞殺)하였거나 억울한 형벌로 죽었다 하니 실정을 조사해서 아뢰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이종학이 죽을 죄가 아닌데 죽은 것은 실로 태조의 본의가 아니라 당국자가 보복하기 위하여 부당한 형벌로 죽인 것이니, 그때에 손흥종(孫興宗)ㆍ황거정(黃居正)을 교사해서 왕명을 거짓으로 꾸미고 임금을 속인 죄를 국문하도록 하되 부당하게 중형(重刑)을 한 율을 적용하라.” 하니, 공신 등이 아뢰기를, “정도전ㆍ남은 등이 황거정과 손흥종을 사주(使嗾)하여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행위는 비록 죄가 있기는 하나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전ㆍ거정ㆍ흥종은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固)에 처할 것이며, 남은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 야사(野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도은(陶隱)과 정도전은 다같이 목은(牧隱) 문하에서 나왔는데 목은이, 도은이 지은 7언 장편시 ‘오호도(嗚呼島)’를 보고 칭찬하기를 마지않자 정도전이 시기하였다. 뒤에 도전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 와서 오호도 시를 지어 중국인의 시 속에 섞어 목은에게 보이자 목은이 보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도전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크게 칭찬하자 목은이 말하기를, “이 시편은 좋기는 좋으나 그대들도 지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였다. 도전이 이 뒤부터 더욱 자기의 재주가 도은만 못함을 알고 꼭 죽이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도은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 우리 태조를 시중으로, 태종을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심덕부(沈德符)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5월 대사헌 민개(閔開)가 상소하여 정몽주의 당여(黨與)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민개가 상소하여 우리 태조의 공덕을 열거하여 아뢰고, 정몽주의 죄를 극력 늘어놓으면서, “정몽주는 부귀를 탐하고 회뢰(賄賂)를 자행하며, 권세를 제멋대로 행사하고 당을 심어 난을 꾀하였으니, 만일 그 계략이 이루어졌더라면 조정을 탁란(濁亂)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을 것이므로 그 당여의 죄를 묻지 않는다면 화의 계제(階梯)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 당여인 설장수(?長壽)ㆍ이무(李茂)ㆍ이빈(李彬)ㆍ김이(金履)ㆍ안노생(安魯生)ㆍ최관(崔關)ㆍ김섬(金贍)을 아울러 파직시키고 먼 곳에 유배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상시(左常侍) 김자수(金子粹)가 또 강회백(姜淮柏)ㆍ유기(柳沂)를 탄핵하여 외방에 유배하였다. 6월 전 판삼사(判三司) 우현보(禹玄寶) 및 종실 남평군(南平君) 화(和) 등을 먼 곳으로 유배하고, 정도전과 남은을 소환하였다.
조준 등이 바야흐로 우리 태조를 추대하려고 모의하였는데 구신(舊臣)을 매우 꺼렸다. 이에 도평의사사(都平議使司)에서 우현보 및 그 아들 홍수(洪壽) 등 4인과 안익(安翊)ㆍ김남득(金南得)ㆍ최을의(崔乙義)ㆍ왕승귀(王承貴)ㆍ도흥(都興)ㆍ안원(安瑗)ㆍ유정현(柳廷顯)ㆍ허응(許應)ㆍ박흥택(朴興澤)ㆍ안준(安俊)ㆍ신원필(申元弼)ㆍ최함(崔咸)과 내관(內官) 강인부(姜仁富), 그리고 종친 중 남평군 화 등 7명을 잡아다가 먼 곳에 유배하고, 경력(經歷) 장지화(張至和)를 시켜 왕에게 아뢰기를, “우현보 등은 여러 차례 죄를 범하였으나 과람한 용서를 입었는데도 개심(改心)하지 않고 다시 난을 꾀하여 화의 기미가 급박하므로 미처 계문(啓聞)하지 못하고 우선 현보 등을 잡아다가 외방에 나누어 유배하였습니다. 신등이 듣기로는,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누구든지 잡아 벨 수 있다 하였으므로 감히 먼저 처리하고 뒤에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안】《기언(記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고려가 망하자 태조가 우현보에게 공신호(功臣號)를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상(上)이 특별히 후사(厚賜)하고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특별히 단양백(丹陽伯)을 제수하였다. 현보가 죽으니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후손이 매년 10월 상일(上日 초하루를 말한다)에 제사지내면서 하는 고향문(告享文)이 있는데, “서울을 떠나 유랑할 때는 흥망의 즈음이었습니다. 고심(苦心)한 지조(志操), 몸바친 충성심을 저희 후손에게 물려 주셨습니다.” 하였다. ○ 조준ㆍ남은 등을 제주(諸州)의 절제사(節制使)로 삼았다.
조준은 경기 좌우도(京畿左右道)를, 남은은 경상도를 맡고, 각도도 다 이와 같이 하여 그 도의 군마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때에 정도전ㆍ남은ㆍ윤소종(尹紹宗)ㆍ조반(趙?)ㆍ윤호(尹虎)ㆍ김사형(金士衡)ㆍ경의(慶儀)ㆍ권중화(權仲和)ㆍ정희계(鄭熙啓)ㆍ윤사덕(尹師德)ㆍ김용초(金用超)ㆍ이의(李?)ㆍ김조(金稠)ㆍ이행(李行) 등을 차등 있게 제배(除拜)하였다. ○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와 장경(藏經)을 구하였다. ○ 노루가 효사전(孝思殿)에 들어왔다. ○ 송충이 태묘(太廟)의 솔잎을 다 갉아먹었다.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은 것이 해마다 있는 일이나 태묘의 솔잎을 먹는 일은 없더니, 이때에 와서 다 갉아먹었다. ○ 명에 사신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였다.
평리(評理) 김주(金湊)를 보내어 표(表)를 올려 고명을 청하였는데, 사행(使行)이 숙천(肅川)에 이르러 왕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추7월 왕이 우리 태조와 맹약을 맺었다.
이때에 정몽주가 이미 해를 당하고 이색ㆍ우현보 등도 잇달아 방축되었으며 조준 등이 서용되니, 왕은 마음속으로 불안하여 5일(갑신)에 우리 태종 및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이시중과 동맹하려고 하니 맹약하는 글을 초안(草案)하여 오라.” 하니, 조용이 아뢰기를, “맹약은 귀한 것이 아니므로 성인(聖人)도 싫어한 것입니다. 만약 열국(列國) 사이의 동맹이라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나 군신간의 동맹은 의거할 고사(故事)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어떻든 초하라 하므로, 조용과 태종이 태조에게 가서 왕의 분부대로 고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희들은 마땅히 상교(上敎)대로 기초(起草)하라.” 하였다. 이에 조용이 물러나와 기초하기를, “경이 아니었다면 내 어찌 이런 자리에 이르렀으랴. 경의 공덕(功德)을 내 감히 잊겠는가? 황천(皇天)이 위에 있고 후토(后土)가 곁에 있으니 자손대대로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내가 경을 저버리는 일이 있다면 이 맹약이 있다.” 하여, 왕에게 올리니 가하다고 하였다. ○ 큰 바람이 불고 추웠다.
6월 이후로 찬바람이 밤낮으로 계속 크게 불어 기후가 가을과 같았는데, 이에 이르러 싸늘한 바람이 항시 불어 모래먼지가 크게 일어나서 길가는 사람이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모든 곡식이 말라 버렸다. ○ 왕이 손위(遜位)하고 원주(原州)로 가니, 고려가 망하였다.
이 앞서 회군한 뒤부터 동지밀직(同知密直) 남은과 이조 판서 조인옥(趙仁沃) 등이 우리 태조를 추대하려고 밀의(密議)하다가 회군하게 되자 태종에게 고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이 일은 큰일이니 가볍게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에 민심이 서로 추대하려고 하여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떠들기를, “천명(天命)과 인심은 이미 붙인 데가 있는데 어찌하여 빨리 즉위하도록 하지 않는가?” 하기도 하였다. 지난달부터 태종이 남은과 계획을 정하고, 남은이 비밀리에 조인옥ㆍ조준ㆍ정도전, 대사성 조박(趙璞) 등 52인과 같이 추대할 일을 모의하였으나, 태조가 진노할 것이 두려워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남은 등에게, “즉시 의식을 준비하여 즉위를 권함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이상은 권남(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注)》에서 보충 이달 12일(신묘)에 왕이 북천동궁(北泉洞宮)에 있다가 우리 태조의 집에 행행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다시 태조와 맹약하고자 하여 의위(儀衛)가 이미 정렬되고 백관이 도열(堵列)하였는데, 우시중(右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 안씨(安氏)에게 아뢰기를, “지금 임금은 혼암(昏暗)하므로 인심이 이미 다 이반하여 임금으로 삼을 수 없으니 청컨대 폐하소서.” 하고, 드디어 왕대비의 교서를 받들어 왕을 폐하고는 태조에게 아뢰니, 태조가 노하여, “폐한다면 누구를 세울 것이냐?” 하니, 남은이, “저희들은 반드시 밝은 임금을 구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드디어 문하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더불어 교서를 가지고 와서 우부대언(右副代言) 한상경(韓尙敬)에게 읽게 하니, 왕은 엎드려 교지(敎旨)를 들었다. 또 헌납(獻納) 송인(宋因)에게 뜰에 내려 읽게 하여 백사(百司)에게 효유(曉諭)하고, 드디어 왕을 폐하여 원주로 방축하였다. 왕이 나아가려 할 때 남은이 꿇어앉아 아뢰기를, “상(上)께서 우현보(禹玄寶)를 죽이지 않으시어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만약 허물을 뉘우치신다면 오래지 않아 곧 복위(復位)되실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본디 너희들의 임금이 되고자 하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억지로 세운 것이고, 또 내가 불민(不敏)하니 어찌 여러 아랫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림이 없었으랴.”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떠나니, 왕비ㆍ세자 및 빈(嬪)이 따라갔다. 얼마 후 간성(杆城)으로 옮기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봉(降封)되었다가 삼척부(三陟府)에서 훙(薨)하니, 향수(享壽)가 50인데 뒤에 공양왕이라 시호를 추봉하였다. 우리 태종 16년 병신(1416)에 예조에서 아뢰어 추봉하였다. 고려는 태조 무인년(918) 후량 말제(後梁末帝) 정명(貞明) 4년 으로부터 공양왕 임신년(1392) 명 태조(明太祖) 홍무(洪武) 25년 에 망할 때까지 모두 34왕 4백 75년이다. 신씨(申氏)는, “성조(聖祖 이성계를 말한다)가 천명을 받으니 천심(天心)과 인심이 모두 귀부(歸附)하였다. 왕조가 바뀌는 날에도 저자는 철시(撤市)하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반열(班列)이 바뀌지 않았으며, 한도(漢都 서울을 말한다)의 관개(冠蓋 벼슬아치)는 모두가 송도(松都)의 구신(舊臣)들이었으니, 아조(我朝)로 말한다면 어찌 만물을 포용하는 성덕(盛德)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왕씨(王氏 고려를 말한다)로 논한다면 바로 임금과 나라를 저버린 무리임에 틀림없으니 《춘추(春秋)》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반역의 주벌(誅罰)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정상을 미워해야 될 자로는 직언(直言)하는 척한 윤소종(尹紹宗)이며, 상(上)을 위협한 남은이며, 음모를 양성(養成)한 정도전이며, 허명(虛名)을 얻은 권근이다. 늙은 성석린(成石璘)은 좌우에서 간세(奸細)를 부렸으며, 퇴매군(椎埋軍)인 조영규(趙英珪)는 충성스런 대신을 저격하였으니 왕씨의 선조가 알고 있다면 은미(隱微)한 주벌(誅罰)이 없겠는가? 남은과 정도전이 아조에 들어와서 함께 극형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인과 응보이다.” 하고, 또, “고려 역사에서 왕위의 주고 빼앗은 일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말년의 사적(事蹟)이 더욱 어긋난다. 그것이 비록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전해 오는 글이 어찌 그 실정을 모두 없애어 덮어버려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임씨(林氏)는 이렇게 적었다. 천하가 생긴 지 오래므로 민생(民生)의 변고가 없는 바는 아니나 고려 4백 75년 동안에 삼강(三綱)과 구법(九法)이 어찌 이렇게도 무너졌는가? 이 어찌 조종(祖宗)이 창업 초에 가국(家國)을 세우면서 선왕의 도(道)를 상고하지 않아 후세의 패란(敗亂)을 자초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이자겸(李資謙)ㆍ척준경(拓俊京)ㆍ이의방(李義方)ㆍ이의민(李義旼)ㆍ홍복원(洪福源)ㆍ홍다구(洪茶丘)ㆍ최탄(崔坦)ㆍ한신(韓愼) 이후부터 안으로는 권흉(權兇)이 임금을 손에 쥐고 왕명을 마음대로 조작하였으며, 밖으로는 반적(叛賊)이 상국(上國 원을 말한다)에 의탁하여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니, 이에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게 되었다. 보탑 공주(寶塔公主)가 이강(釐降 황녀(皇女)가 제후에게 시집가는 것을 말한다)하니 지어미가 지아비의 위에 있게 되고,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젊어서 과부가 되니 아들이 어머니를 범하게 되어, 이에 지아비는 지아비답지 못하고, 지어미는 지어미답지 못하게 되었다. 충렬왕(忠烈王)과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은 아버지와 자식간에 서로 송사를 하여 한 나라에 임금이 물이 있으면서 서로 교체되어 이에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였으니, 삼강이 윤락(淪落)하고 법도가 없어지게 되어 온갖 괴변이 다 갖추어져 승려가 궁중에 들어오고 여승이 여염집에서 아이를 낳게 되어 고려의 멸망은 결판이 난 것이다. 공민왕은 시해(弑害)를 당하였고, 우(禑)와 창(昌)은 서로 이어 폐위되어 추방을 당하였으며, 공양왕에서 망할 때까지 18년 사이에 왕씨의 종실(宗室)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가 거의 없다. ○ 백관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어 대비전(大妃殿)에 두고 청정(聽政)하게 하였다. 이튿날 13일(임진)에 대비가 교서를 내려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명하였다. 이때에 도당(都堂)이 단양군(丹陽君) 우성범(禹成範)과 진 양군(晋陽君) 강회계(姜淮季)를 베니, 모두 왕의 사위이다. 또 찬성(贊成) 성석린(成石璘), 정당(政堂) 이원굉(李元紘), 청성군(菁城君) 강시(姜蓍)가 대제학(大提學) 한위(韓?), 밀직(密直) 성석용(成石瑢), 전 밀직 유혜손(柳惠孫), 군자윤(軍資尹) 강회중(姜淮仲), 소윤(少尹) 유순(柳珣), 부령(副令) 김윤수(金允壽), 호군(護軍) 강여(姜餘)를 외방(外方)에 유배하였다. 16일(을미)에 배극렴ㆍ조준ㆍ정도전이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ㆍ기로(耆老)와 함께 옥새(玉璽)를 받들고 태조의 사저(私邸)에 나아가 합사(合辭)해서 즉위하기를 권하여 17일(병신)에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니 바로 7월 17일(병신)이다. ○ 혁명이 일어날 즈음에 절의(節義)를 지킨 이들은 정몽주ㆍ길재(吉再)ㆍ서견(徐甄) 등 여러 사람 외에, 또 이양중(李養中)ㆍ김주(金澍)ㆍ원천석(元天錫) 등 몇 사람이 있는데, 모두 지조를 지켜 굴하지 않았으니 우뚝하게 뛰어났다 할 만하다. 이양중은 호를 석탄(石灘)이라 하는데, 광주인(廣州人)으로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으며 혁명 후에 시골 농장에 숨어살면서 징소(徵召)의 명을 받지 않았다. 태종이 잠저(潛邸) 때의 친구이기 때문에 특별히 한성윤(漢城尹)에 제배(除拜)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상(上)이 언젠가 광주(廣州)에 행행하여 불러 보니 양중은 야인(野人)의 복장으로 거문고를 끼고 물고기 안주에 술을 올리니 상이 매우 기뻐하였으나 끝내 그 지조를 빼앗지는 못하고 그 아들에게 특별히 관직을 주어 그 충절을 장려하였다. 김주는 선산인(善山人)으로 공양왕 임신년(1392)에 사신의 명을 띠고 하 절사(賀節使)로 경사(京師 명의 서울)에 갔다 돌아오다 압록강(鴨綠江)에 도착하여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했다는 소문을 듣고 부인 유씨(柳氏)에게 편지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더라도 몸 붙일 곳이 없소.” 하고, 이어 조복(朝服)과 신발을 보내면서, “부인이 돌아가거던 이것과 합장하고, 압록강에 도착하였다가 중조(中朝)로 되돌아간 날을 제사날로 삼을 것이며, 장사 후에는 묘지(墓誌)나 비갈(碑碣)을 쓰지 말라.” 하고는, 드디어 중국으로 되돌아가 형초(荊楚) 지방에 살았다. 뒷날 사람들이 농암 선생(籠巖先生)이라 일컬었다. 원천석은 자를 자정(子正), 호를 운곡(耘谷)이라 한다. 정치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치악산(雉岳山) 아래에 숨어서 몸소 농사지어 부모를 봉양하면서 살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나 부(部)를 조사할 때에 군적(軍籍)에 등록되자 부득이 과거를 보아 단번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지만 역시 벼슬길에 나가고 싶은 뜻이 없었고, 이색 등 여러 사람과 잘 지냈다. 태종이 어려서 그에게 수업(授業)한 일이 있었으므로 귀하게 된 뒤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상(上)이 그 초옥(草屋)에 행행하였으나 숨고 나타나지 않자 상이 초옥을 지키고 있는 여종을 불러 음식물을 주고 돌아갔다. 원천석에게는 감추어 둔 책 6권이 있었는데, 고려가 망한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임종 때에 유언하기를, “자손 중에 성인(聖人)이 아닌 자는 열어보지 말라.” 하였는데, 몇 대를 지나 한 자손이 가만히 열어보고는 크게 놀라며 ‘우리 가문이 멸족당하겠구나.’ 하고는 드디어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시편(詩篇)은 남은 것이 있어 세상에서 시사(詩史)라고들 한다. 그 시의 제목 주(注)에 우왕(禑王) 이전을 ‘국가(國家)’라 하고, 그 이후를 ‘국(國)’이라 하고,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신국(新國)’이라고만 하였다. ○ 고려가 망한 뒤에 구신(舊臣) 가문의 자제들은 즐겨 벼슬하려 하지 않아, 신분을 감추고 외부와 접촉을 끊으며 절개를 지키다 죽으면서 스스로 깊숙이 폐장(閉藏)하니, 지금 그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이른다. 우리 태조가 친히 경덕궁(敬德宮) 송도(松都)에 있는 태조 잠저(潛邸) 때의 구택이다. 에 임어(臨御)하니 정성을 다해 달래고 스스로 일신(一新)할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과거를 실시하고 선비들을 시험보였으나 한 사람도 응시하는 자가 없었다. 모두 세 차례 과거를 베풀었으나 모두 그러하므로 태조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는 1백 년 동안 과거를 보이지 말라는 명까지 내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하는 데 따르지 않은 자들은 금고(禁固)에 처하였다. 이에 사족(士族)의 자제들도 모두 초관(草冠)ㆍ포삼(布衫)ㆍ갈신[葛履]ㆍ면대(綿帶)를 하고 분수 밖의 일은 경영할 생각도 않았다. 여자들이 문 밖을 나다닐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두 사람이 서로 부를 때는 으레 댁(宅)이라고 불렀으며 화장도 않고 색깔 있는 옷도 입지 않아, 풍습이 검박(儉朴)한 것을 숭상하며 스스로 정절(貞節)을 지켜 지금까지 이 풍습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 성종(成宗) 5년에 송도에 행행하여 금고와 과거 정지령을 해제하였다.
[주D-001]증점(曾點) …… 흥취를 가졌고 : 이색의 풍도(風道)를 증점에 비겨 그 이상임을 말한 것. 증점은 공자의 제자로서 뜻이 실천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커서 상규(常規)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한번은 각기 소회를 말해보라는 공자의 말에 “늦은 봄에 옷이 마련되면 관동(冠童) 6~7인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공자가 이 말에 공감(共感)을 표시하였다. 《論語 先進》 [주D-002]유하혜(柳下惠)의 …… 비난 : 유하혜는 노(魯)의 대부(大夫) 전금(展禽)인데, 맹자가 평하기를 “유하혜는 공손하지 못하니 공손하지 못한 행동은 군자로서는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주D-003]시귀(蓍龜) : 점(占)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을 말한다. 고대에는 큰 일이 있을 때 시초나 거북의 등껍질로 길흉(吉兇)을 점쳤는데 그 점괘(占卦)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다. [주D-004]이자겸(李資謙) …… 조작하였으며 : 이자겸은 두 딸을 인종(仁宗)의 비로 들여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 드디어는 반역을 꾀하다가 반목하고 있던 부하 척준경(拓俊京)에 의해 제거되었고, 이어 척준경도 정권을 천단(擅斷)하다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방축(放逐)되었다. 이의방은 정중부(鄭仲夫) 등과 무신난을 일으켜 의종(毅宗)을 폐한 뒤 명종(明宗)을 세우고, 딸이 태자빈(太子嬪)이 됨으로써 권세를 부리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에게 살해되었다. 이의민은 천민 출신으로 무신난에 출세하였으나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부자를 죽여 왕권을 확립시킨 뒤에는 이를 두려워하여 고향에 돌아가 있다가 경대승이 죽은 뒤 정권을 잡고 나중에는 또 반역을 꾀하다가 최충헌(崔忠獻)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홍복원(洪福源)은 몽고가 고려를 칠 때, 몽고의 앞잡이가 되어 본국을 괴롭혔으며 다구(茶丘)는 복원의 아들로 역시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갖은 횡포를 부렸다. 최탄은 원종(元宗) 10년(1269)에 임연(林衍)을 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켜 서경(西京)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 및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6성을 가지고 몽고에 귀부(歸附)하여 원에 의해 이지방의 총관이 되었고, 한신(韓愼)은 최탄과 같이 반란을 일으킨 자이다. [주D-005]보탑 공주(寶塔公主)가 …… 되고 : 보탑은 충선왕(忠宣王)의 왕비인 계국 대장공주(?國大長公主), 원명은 보탑실련(寶塔實憐). 원 진왕(晋王)의 딸로 충렬왕(忠烈王) 22년(1296)에 세자빈(世子嬪)이 되었다가 즉위한 뒤 비가 되었다. 그러나 왕이 자기를 멀리하고 조비(趙妃)를 총애하는 데 앙심을 품고 이를 원 황실에 고자질하여 충선왕을 소환하도록 만들었다. 이 뒤에도 왕과의 불화가 계속되어 왕과 부왕인 충렬왕 사이를 이간시켰으며, 원에서는 보탑 공주를 개가시키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고려에서는 충렬왕으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정비(正妃)를 원의 황실에서 맞아들여야 했으므로 왕비들이 본국의 세력을 믿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았다. 《高麗史 卷八十九 列傳二 后妃二》 [주D-006]숙창원비(淑昌院妃)가 …… 되어 : 숙창원비는 명장 김취려(金就勵)의 손녀로, 진사 최문(崔文)에 시집갔으나 일찍 과부가 되었다. 당시 충렬왕의 총희(寵姬) 무비(無比)가 방자한 행동을 하다가 이를 미워한 당시 세자인 충선왕에 의해 살해되어 충렬왕이 실의에 차 있었으므로 이를 위로하려는 세자의 뜻에 의해 충렬왕에게 들여보내져 숙창원비에 봉해졌다. 이어 충렬왕 또한 죽자 다시 충선왕과 관계하여 주야로 미태(媚態)를 부려 왕이 정사를 돌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高麗史 卷八十九 列傳二 后妃二》 [주D-007]충렬왕(忠烈王) …… 송사를 하여 : 충선왕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부왕(父王)인 충렬왕의 측근에서 횡포를 부리던 무비와 환자(宦者)들을 죽임으로써 부자간의 불화가 싹트게 되었고, 실의에 빠진 부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는 왕비 계국 대장공주(?國大長公主)와의 불화로 원으로부터 국인(國印)을 빼앗겨 다시 부왕에게 선위하고 연경(燕京)으로 갔다. 연경에 장기간 있는 동안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ㆍ충선 부자간의 이간을 꾀하는 한편 그를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전(瑞)에게 계국 대장공주도 개가시키고 왕위도 계승하게 하려는 음모가 진행되자, 충렬왕도 이에 동조하여 원 조정에 그의 폐위를 건의하기에까지 이르자 부자간의 불화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 무종(元武宗)의 즉위에 공을 세움으로써 부왕이 죽자 복위되었다. 또 충숙왕도 충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왕위를 탐내는 심양왕(瀋陽王) 고(暠) 일파의 이간질로 정치에 권태를 느끼고 1330년에 아들인 충혜왕(忠惠王)에게 선위하고 원으로 갔으나, 충혜왕은 즉위한 이래 정사는 돌보지 않고 황음무도한 행위만을 일삼았으므로 원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이리하여 1332년 충숙왕이 복위되어 1339년까지 재위하다가 그가 죽자 다시 충혜왕이 복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