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정조 이산이 남긴 것 - 화성행궁 : 사진으로 보는 수원 화성

장안봉(微山) 2014. 3. 2. 04:21

 

 

 

정조 이산이 남긴 것 - 화성행궁 :   사진으로 보는 수원 화성의 모든 것...5. 화성 행궁

 

스크랩은 마음대로 해가시되 출처 http://blog.daum.net/oldpavilion

표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변조,개작은 사절입니다.

 

 정조 이산...

그리고 아버지 사도세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

할아버지 영조...

조선시대 왕가 최대의 비극중의 하나로 꼽히는 장헌세자의 죽음.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직접 체험한 어린 세손 이산.

그가 갖은 질곡 끝에 임금이 된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며 건설했던

신도시 화성... 

수원 화성은 정조 이산을 떼어 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왕조시대 같으면 감히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던 나랏님의 이름을

 드라마의 제목으로 써서 세상에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좋아진 덕일 것이다.)

 

(화성행궁 옆 화령전의 운한각에 모신 정조임금의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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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요즈음 방영되는 드라마 '정조 이산'.

'정조 이산'이라는 드라마가 시작되면서부터 생각난 것이

500장 이상의 사진으로 수원 화성의 모든 것을  보여드린다고 일을 시작해서

시리즈의 네번 째 글까지 올렸으나 미처 500장을 채우지 못하고

별다른 이유나 설명도 없이 중단한 것이 벌써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진즉에 찍어 놓은 사진이니 별로 힘들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인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하긴 그 글을 읽어 보시던 어떤 분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야, 500장이 아직 안 되잖아?" 라고 지적을 해줄 만도 한데

아무도 그러지 않은 걸 보면 나의 글, 사진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도 흥미를 주지 못한 일이 아닌가,

혹은 나 혼자만 그저 좋아서 올리는 글이 되어 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어쨌든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500장을 넘기기 위해서는

화성행궁과 융릉,건릉의 사진을 보탤 수 밖에 없다.

 

화성의 어느 한 구석 정조를 벗어나서 생각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지만

행궁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화성에 오면 직접 머문 곳인 행궁은 화성의 다른 구성 요소인

성곽과 각종 부속물과는 그 의미 자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행궁을 130장 정도의 직접 찍은 사진으로,

그리고 화성의 홈페이지(http://hs.suwon.ne.kr/index.asp)의

설명을 빌려 오는 것으로 화성행궁의 모든 것을 보기로 한다.

(빌려온 부분은 청색으로 표시한다.)

내가 쓴 글, 사진의 분량이 너무 길다는 불만들을 들은 경우도 있으나

주제가 같은 것을 여럿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하나로 작성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것이 스스로의 판단이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글어스에서 빌린 화성의 사진,

그리고 내가 미로한정에서 찍은 사진에다가

각 건물의 명칭을 표기해서 올리기로 한다.

 

 

 

 

 

 

1. 신풍루 (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신풍루를 들어서면 왼쪽에 화성 건설의 또하나의 주역

거중기가 전시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고안이다.

 

2. 좌익문  (左翊門)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좌익문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본 모습. 

좌익문 안쪽 마당, 행각...

 

 

 3. 중양문(中陽門)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혜경궁 홍씨가...

 

아들 정조 부부로부터 문안을 받는 모습..

 

정조임금...

 

중양문 안, 봉수당 앞의 행각...

 

 

  

 

경룡관 (景龍館)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장락당 (長樂堂)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침소...

 

 

 

 

 

 

 

봉수당과 장락당의 뒷편...

  

 

 

 

 

 

봉수당과 장락당 뒤의 행각 방

내시의 독서, 의관을 채리는 모습... 

 

 

그리고 나인과 상궁의 바느질, 독서하는 모습... 

 

 

 

 복내당 (福內堂)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복내당에는 대장금의 흔적이 가득하다...

 

 

 

복내당 부엌... 

 

 

 

 

 

 

 

 

 

 

유여택 (維與宅)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공신루(供宸樓)

 

 

 

 

외정리소 (外整理所)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외정리소에서 빈의문을 보면, 그 안쪽이 유여택이다... 

  

기층헌 (起層軒)

 

기충헌은 외정리소의 한쪽에 있는 건물로서

각종의 궁중악기들이 보관되어 있다.

 

 

 

 

 

  

 

 

느티나무-수령 600년...  

 

 

 

집사청 (執事廳)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

(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좌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북군영(北軍營)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

 

 

 

 

 

 

 비장청 (裨將廳)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서리청 (書吏廳)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남군영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측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

 

 

 

 

입구에서 본 북군영의 담장...

 

 행궁의 뒷편

 

 

행궁의 뒤편-후원의 개념이라면 될 것 같다.-으로 나가는 문이 득한문(得閒門)이다.

한가로움을 얻으려는 정조의 뜻이 담긴 듯하다.

그리고 왼쪽의 건물이 득중정(得中亭)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득중정, 노래당과 고목...

  

 

 

 

 

 

낙남헌의 사진을 남기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미로한정(未老閒亭)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後苑)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1790년(정조 14)에 세워 졌는데 1칸 6각정으로 '육면정(六面停)'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수원 추팔경의 하나인 한정품국(閒亭品菊 : 국화꽃 벌여놓고 황상하는 미로한정의 가을 풍경)의 경관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미로한정에서 내려다 본 화성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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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령전 (華寧殿)

 

 

 

화령전은 1963년 사적 제115로 지정되었고 현재 원형의 일부가 훼손되어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나,

건립기록인 「영건등록(營建騰錄)」이 전해지지 않고, 일제시기인1933년에 한 차례 보수공사가 있었다는 단편적인 사실 외에는

해방 이전의 기록도 거의 찾기 힘든 상황이다.

다만 화령전 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령전은 순조 1년 4월 29일에 완성되었다.

화령전이 수원에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정조가 얼마나 수원을 사랑하고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조가 돌아가신 이후 정조의 신위는 종묘에 안장되었는데, 따로 수원에 영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순조 1년(1801)1월 6일에 당상관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화령전을 만들 것을 계획하고,

그 달 29일에 좌의정 이시수"관상감 제조 이서구"화성 유수 이만수 등이 상지관을 데리고 화령전의 터를 살펴보았는데,

화성행 궁의 강무당에서 남쪽으로 77보, 낙남헌에서 북쪽으로 79보가 되는 유좌 묘향이 길지라 하여 도면을 그려서 바쳤다.

화령전을 완성하고 5월 2일에 정조대왕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크고 작은 영정 2본을 봉안하여 큰 것은 펴서 보관하고, 작은 것은 궤짝에 봉안하였다.

화령전의 이름은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시경」국풍 주남 <갈담(葛覃)>의 마지막 구절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에서 '령'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정조는 왕으로서 살아있을 때 늘 베옷을 입고, 옷이 헤지면 기워 입는 등 검소함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와 같은 모습을 늘 눈으로 확인했던 당시 화성 유수 이만수는 화령전을 견고하면서도 검소하게 짓기를 원하였다.

이 뜻을 받아들인 순조의 하교에 따라 단정하면서도 장중하게 만들어져서 당대의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다.

 건물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팔작 지붕이며, 화강제 기단에 세워졌다.

건물 구조는 익공집으로, 이 시대의 사당 건물과 같이 간소한 수법으로 되었다.
정전의 "운한각"이란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친필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현재는 고인인 대통령 박정희 친필로 운학각이라 쓰여 있다.

경내에는 풍화당이란 건물이 있으며 이 곳은 순조가 풍악을 즐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오히려 순조가 선왕을 그리며 때를 보낸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구성은 외삼문과 내삼문, 운한각을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운한각 오른쪽에 전사청을 두었으며,

우측 담장 밖의 풍화당까지 아울러 조선 후기 기능적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조의 사당인 이 곳에서는 역대국왕이 현륭원과 건릉을 다녀갈 때마다 제향을 올렸으며, 탄신일과 납향일에도 제사를 올렸다.
정조의 영정은 1910년경에 일제의 강압으로 서울로 옮겼다가 잃어버리고,

1992년에 유네스코 경기도협의회의 건의로 새로운 영정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전사청 (典祀廳)  

 

 

 

 

 

제정 (祭井) 

 

 

 운한각 (雲漢閣)

 

 

 

 

 

 

 

 

 

 

 

이안청 (移顔廳)

 

 

풍화당 (風化堂)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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