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의 신라 경순왕릉은 사적 244호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재위 927~935)의 능은, 높이 약 3m, 지름 7m의 원형봉토분이다. 능 앞에는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서 있다. 비석 앞에는 계체석(階?石)과 장명등(長明燈)이 놓여 있고 양 옆에는 돌로 만든 양과 망주석(望柱石)이 1쌍씩 서 있다. 봉분의 삼면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고 봉분은 돌을 다듬어 둘레돌을 돌렸다.
다른 신라왕들의 무덤이 경주일원에 있는데 반해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곳에 있다. 고려 경종 3년(978)에 그가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이 그의 유구를 경주로 모셔가고자 하였으나 “왕의 관은 개경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여 지금의 자리인 장단에 능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비록 망국의 왕으로 고려의 관리를 지냈지만 그를 왕으로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 주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고려 최초의 경주 사심관이 되었다. 그리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자녀를 여럿 두었다. 그러나 왕건에게 복속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그의 큰 아들 마의태자는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의 딸 덕주공주 역시 덕주사에서 마애불을 세우고 아버지와 마의태자를 위해 기도하며 평생을 보냈다.
능의 위치가 처음 확인된 것은 영조 때의 일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잊혀졌다가 1973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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