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沙溪 金長生 先生 諡號 敎旨
[丁酉(1657년 孝宗9) 十月] : 道德博聞曰文 主義行德曰元
● 敎 贈 領議政 文元公 金長生從祀 文廟書
[康熙五十六年(1717, 肅宗43)]
● 문묘종사 교서 해설
왕이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正學을 표창하는 것은 士林의 취향을 정하기 위한 것이며 聖廟에 先賢을 배향하는 것은 道統을 밝히려고 한 것이므로 장차 縟禮를 거행하기로 公議가 결정 되었다. 내가 생각할 때 本朝에서는 儒述을 숭상하여 학교와 庠 · 序를 크게 갖추어 오랫동안 도학이 전수되고 총명한 호걸들이 줄을 이어 태어났으니 아! 人文이 융성하여 宣祖 때 이르러서는 더욱 전성기를 이루었다. 卿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大賢을 스승으로 하였다. 그 宏深한 것을 말한다면 땅이 만물을 지고 바다가 육지를 삼키는 기상이 있고 그 독실한 것을 말한다면 남들은 하나를 이룰 때 자신은 백 개를 이루는 공부가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 切問하는 것으로부터 덕을 노이고 이미 體가 선 뒤에 用이 행하였으며 그 탐구와 논의의 공은 먼 곳까지 미치었으므로 그 심오한 뜻을 탐구하고 沈潛하는 효과가 날로 고명한 지역으로 발전하여 뜻이 깊은 예설과 의심스러운 文意에도 세밀히 분석하고 길흉과 常變의 예설에 있어서 절충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많은 儒士들이 주장한 크고 작음과 높고 낮음의 설도 모두 혜택을 입어 온 세상 사람으로부터 태산과 북두처럼 추앙을 받고 어두운 네거리에 비추는 햇볕과 같았다. 이에 聖祖의 부름에 응하여 國人의 자랑이 되었다. 그 정심 · 성의의 학문은 임금의 非行沮止를 우선으로 하였으니 그 天德 · 王道의 해심은 국가를 위함에 있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깝게도 그 포부를 다 펴지 못하고 아직까지 그 典型만 이곳에 남아 있다. 평범한 趣味와 비단과 같은 문장의 고귀함을 아는 사람이 적다고 말하지 마라. 江漢에 씻은 것처럼 깨끗하고 가을볕에 쬐이는 것처럼 강렬하여 그 덕을 사모하는 것이 깊다. 공자 문하의 四科 중에서 덕행이 十哲의 위에 있고 曾氏의 三省과 忠恕가 一貫의 傳授를 얻어 그 공은 옛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고 후세의 학문하는 길을 열었으며 그 교화는 세상에 모범이 디고 풍속을 돈독하게 하여 기꺼이 英才하였으므로 巨儒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正道가 크게 밝혀져 후학들이 모두 표준으로 추앙하였으니 어찌 한 나라에서만 칭송할 일이 있겠는가? 또한 百代의 師宗이라고 할 것이다. 비록 贈職이 더 없이 높지만 높은 보답에 있어서는 그 실제의 공로에 맞지 않다고 하겠다. 聖廡(文廟)에 從祀하는 禮도 모든 사람들은 ‘타당한 일이다.’고 하니 대개 文正公을 높이 추앙하자는 여론이 어찌 아부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輿情이 三紀(約 30년, 1기는 12년, 또는 30년을 말함)동안 憂鬱한 가운데 많은 선비들은 팔방에 호소하여 조정에서 물어보기 전에 이미 나는 賢人을 속이고 정의를 더럽히는 관습에 은폐되었으니 저 반대파들은 어찌 다 죽일 수 있겠는가? 正道를 옹호하고 儒士를 숭상하는 성의를 지금 다하여 卿을 文廟에 從祀하니 道統은 前哲을 계승하고 位次는 文成公(李珥 시호)과 차이를 두었다. 吟風弄月은 어렴풋 石潭(李栗谷)이 강학한 곳)의 函丈과 같고 升堂入室(杏壇: 공자가 강학한 곳)에서 攝齊하는 것과 같으니 훌륭한 덕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어찌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하늘이 돕는 것 같다. 그 빛난 모습을 접할 수 없으니 얼마나 九原(地下 또는 저승을 말함)에서 환생하기 어려운가를 한탄 하였던가: 오랫동안 享祀하여 家廟에서 遠祖의 廟로 옮기지 말기를 다시 명한다. 이에 聖上의 교화가 밝게 드러나고 이에 여러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아! 功이 큰 사람은 반드시 그 보답이 隆崇한 것이며 덕이 많은 사람은 그 미친 혜택이 먼 것이니 英靈이 묵묵히 도와 혹 國脈이 廷長되고 文敎가 융성하여 세상이 태평하기를 기대하므로 이에 교시하오니 당연히 모든 사람이 이런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참고]
光金 27世이고 자는 希元이요 호는 沙溪이니 세칭 沙溪先生으로 戊申(1548년)에 生하여 辛未(1631년)에 졸하니 향수 84세하다. 龜峯 宋翼弼 門下에서 수업하고 장성하여 栗谷 李珥선생을 스승으로 도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학과 예학의 宗匠이 되다. 유림에 逸薦으로 山林 經筵官을 하고 가의대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변의 의례문해 서소잡록 가례집람 상례비요 근사록석의 와 사계전서 27권 등 51권을 저술하였다. 贈 議政府領議政 시호 文元公이라하니 道德博聞曰 文이요 主義行德曰 元이다. 숙종 정유 1717년 文廟에 從祀하고 후학이 여러 곳에 祠宇를 지어 享祀하다.[자료출처; 충남 논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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