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에 비를 세우다. [변계량이 찬한 비문]
문묘에 비를 세웠다. 비문은 이러하였다.
“영락 7(1409)년 기축년 가을 9월에 우리 국왕전하께서 신 계량에게 명하기를, ‘우리 선고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처음으로 방가를 세워 한양에 도읍을 정하자, 급히 종묘와 학교를 세웠으니, 선성을 높이고 문교를 중하게 여긴 것이다. 내가 큰 통서를 이어서 이루어진 법을 따라 거듭 묘궁을 신축하여 이미 완성되었다. 학관 최함 등이 돌에 글을 새겨 장래에 보이기를 청하니, 너는 이것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신 계량이 명을 받고 황공하여 물러와 그 시말을 물어보니, 갑술(1394)년에 태조께서 이미 도읍을 세우고 종사·조시·성곽·궁실의 제도가 모두 적당하게 되매, 곧 묘학을 영건하기를 도모하여 도성 동북 모퉁이에 땅을 정하였는데, 산이 그치고 땅이 넓고 물이 둘러 흘러, 그 위치는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흥부원군 민제에게 명하여 주관하게 하였는데, 공인을 모으고 재목을 다듬어 정축(1397)년 3월에 시작하여 무인(1398)년 7월에 일을 끝냈다. 성철은 높은 집이고, 종사한 이는 옆의 집이며, 학교는 사당 뒤에 있고, 가운데는 명륜당이며, 좌우에는 협실이 있고, 두 협실 남쪽에는 긴 행랑으로 둘렀으며, 좌협의 동쪽에는 청과 낭이 있어, 사생의 위치와 정록의 거처가 완비되지 않음이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집을 지은 것이 견고하여, 무릇 집을 지은 것의 크고 작은 것을 간수로 계산하면 96간 이었다. 밭을 두어 자성에 이바지하고 생도에게 식량을 주게 하며, 부역을 면제한 사람으로 쇄소에 응하게 하고 사령을 넉넉하게 하였으니, 묘학의 일이 구비하였다 할 수 있는데, 경진(1400)년 2월에 불에 탔다. 그해 11월에 전하께서 송경에서 즉위하매, 학당에 나아가 선성께 참알하고, 장자에게 명하여 입학하게 하였다. 을유(1405)년에 한양에 환도하여 선성선사께 친히 전을 드리었고, 3년 되는 정해(1407)년 정월에 사당의 옛터에 신축할 것을 명하였다.
성산군 신 이직과 중군 동지총제 신 박자청이 역사를 감독하여,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독려하고, 마음을 다해 계획하고 손수 지휘하니, 공사가 부지런히 일하여 넉 달이 지나 사당이 이루어졌는데, 높고 그윽하고 단정하고 큰 것이 옛날에 비하여 더함이 있었다. 신주를 사당 서쪽에, 동 서문을 양서의 아래에 짓고, 전구를 더 주었으니, 밭은 1만여 무에 이르고, 노비는 3백여 구나되었다. 의정부 좌정승 신 하륜의 의논을 채택하여 성(郕) ·기(沂) 두 공을 배향의 위에 올리고, 자장을 10철에 올렸으니, 묘궁의 제도가 더욱 유감이 없다. 신은 생각건대, 성인의 도는 커서 찬양할 수 없으니, 비록 억지로 말을 한다 하더라도, 천지를 그리고 일월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부자가 주나라 말년에 출생하여 여러 성인의 대성한 것을 모아 절충하고, 백왕의 대전을 지어 가르침을 남겼으니, 공은 화초에 극진하고 덕택은 무궁하게 흘러, 백성이 생긴 이래로 이렇게 성한 이가 있지 않았으니, 재아가 말한 ‘요·순보다 어질다’는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다. 당나라 이래로 하늘에 닿고 땅에 서리어, 사당의 면모가 서로 잇달아, 그 존숭하고 제사하는 것이 변하지 않았다. 하물며, 우리 동방은 상고 적부터 풍속이 예의를 숭상하고 기자팔조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이륜의 펼쳐진 것과 전장 문물의 갖추어진 것이 중국과 비길 만하였고, 우리 부자께서 일찍이 이 땅에 살고자 하신 뜻이 있었으니, 묘학을 영건하여 문교를 일으키고 높이는 것이 진실로 다른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생각건대, 태조 강헌대왕께서 천명에 응하고 인심을 순히 하여, 큰 기업을 창건하여 동방을 차지하고 도읍을 정하던 처음에, 곧 성인의 사당을 높이고 유술을 일으키는 일을 먼저 하였으니, 대개 그 덕을 높이고 그 도를 좋아하는 정성이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탁연하게 치도를 내는 본원과 당무의 급한 것에 본 바가 있음이니, 모책을 남기고 유복을 전하여, 인심을 화하고 국맥을 수하게 한 소이이다. 아! 지극하다. 우리 전하께서 인효 겸공하고 강건 예철하시어, 빛나게 선업을 이어받아 정사에 임한 여가에 경사를 즐겨보아, 매양 한밤중에 이르도록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격물·치지·성의·정심의 학을 극진히 하시고, 지영 수성의 도를 다하시니, 전고에 찾아보아도 대개 또한 거의 없고 어쩌다가 있는 것이다. 세도가 바야흐로 형통하고 인문이 밝아져서, 일시의 훈친·대신·백료·서부에서 숙위의 신하에 이르기까지 배움을 누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태조께서 학문을 높이고 교화를 일으키어 인재를 양육한 것과, 우리 전하께서 전왕의 공렬을 더욱 넓혀 위에서 몸소 행하여 많은 선비를 고무시키고, 이 백성을 진작시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업을 익히려면 학교가 있어야 하고, 제사를 받들려면 사당이 있어야만, 주선하여 오르내리고 추연하게 신명을 대하여, 관감 개발하여 순서에 따라 힘을 써서, 문에서 당으로, 실로 들어가는 것을 구하여, 덕을 이루고 재능을 이루어 임금을 요순같이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미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와, 삼대 적의 인재를 배출한 성대함에 도달할 것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보고 듣는 것만을 고치고 바꾸어 한때를 빛나게 할 뿐이겠는가? 실로 우리 조선종사 만세의 복이라 할 것이다. 신 계량은 삼가 절하고 머리 조아려 명을 드린다.
명에 이르기를, ‘위대하신 선성이 때에 응하여 났도다. 포희 씨에서 주공에 이르기까지 그 대성한 것을 모았도다. 백성이 생긴 이래로 성한 것이 누가 이보다 클 것인가? 혁혁하다! 높은 사당이 온 천하에 둘러 있고, 하물며 기봉은 예의를 먼저 하였다. 읍양과 조두는 예전부터 그러하였다. 하늘이 태조를 주었는데, 신성하고 문무를 겸전하였다. 밝게 제명을 받아서 능히 큰 공을 이루었다. 번성한 신도여 한수의 근원이로다. 이에 학궁을 경영하니, 성묘가 가운데에 있다. 전하여 드리고 강하여 익히니, 많은 선비가 그림자처럼 따랐도다. 밝고 밝은 우리 임금이 통서를 이어받아 공을 더하였다. 빛나는 성학이 고금에 같은 이가 드물도다. 높은 신궁에 두 공을 올려 제사하였다. 원량이 입학하니, 국본이 더욱 높아졌다. 내가 짓고 내가 따라 선성을 높이는 도다. 인재가 육성되고 풍속이 아름다워진다. 누가 병이가 없기에 자포자기하겠는가? 사람은 날로 학문이 진보되고, 세상은 날로 다스림에 나아간다. 삼왕보다 낫고 오제와 같은 것을, 날을 정하여 기다릴 수 있다. 화산은 높디높고, 한수는 쉬지 않고 흐른다. 나라와 더불어 끝이 없는 것은 오직 성인의 사당이다. 돌을 다듬어 말을 새기어 길이 보이는 바로다.” 예문관제학 변계량이 지은 것이다.
[太宗實錄 樹碑于文廟。 碑文曰]
永樂七年歲在己丑秋九月, 我國王殿下, 命臣季良, 若曰 惟我先考太祖, 受天明命, 肇造家邦, 定都漢陽, 亟建廟學, 所以尊先聖而重文敎也。予承丕緖, 聿遵成憲, 重新廟宮。旣成矣, 學官崔咸等, 請文之石, 垂示將來, 汝其筆之。臣季良承命隕越, 退而徵其始末。歲甲戌, 太祖旣建都, 其宗社、朝市、城郭、宮室之制, 咸底厥宜, 卽謀營廟學, 度地於都之東北隅, 山止土衍, 水環以流, 厥位面陽。命驪興府院君臣閔霽治之, 鳩工飭材, 經始于丁丑之三月, 蕆事於戊寅之七月。聖哲崇宇, 從祀旁序, 學在廟後, 中明倫堂, 左右有夾, 引脩廊于兩夾之南, 左夾之東, 有廳有廊, 師生之位, 正祿所處, 無一不完, 規模宏敞, 締築堅縝。凡爲屋大小, 以間計者九十六。置田以供粢盛廩生徒, 復戶以應灑掃足使令, 廟學之事, 可謂備矣, 而火于庚辰二月。其年十一月, 殿下卽位于松京, 詣學謁先聖, 命冑子就學。歲乙酉, 還都, 親奠于先聖先師; 越三年丁亥正月, 命卽廟之舊基而新之。星山君臣李稷曁中軍同知摠制臣朴子靑董役, 晨夕督視, 心計指授, 工師用勸, 四閱月而廟成, 崇深端大, 比舊有加。作神廚于廟之西, 東西門于兩序之下, 加給田口, 田至萬餘畝, 口以百計者三矣。用議政府左政丞臣河崙議, 躋郕、沂二公於配位, 陞子張於十哲, 廟宮之制, 益無憾焉。臣竊惟聖人之道大矣, 不可得而讃也。雖强有言, 其不類於繪天地而畫日月者幾希。吾夫子生於周末, 集群聖之大成而折衷, 作百王之大典而垂敎, 功極於化初, 澤流于無旣, 生民以來, 未有其盛。宰我所謂賢於堯、舜者, 其有以夫! 自唐以來, 際天蟠地, 廟貌相望, 崇祀不忒。矧吾東方, 爰自古昔, 俗尙禮義, 服箕子八條之敎, 彝倫之敍, 典章文物之備, 侔擬中國。吾夫子蓋嘗有欲居之志矣, 則營建廟學, 興崇文敎, 固非他邦之比也。恭惟太祖康獻大王, 應天順人, 草創鴻業, 奄有東方, 定都之初, 卽以崇聖祀興儒術爲先, 蓋其尊德樂道之誠, 出乎天性, 而卓然有見於出治之本源、當務之爲急矣。所以貽謀垂裕, 淑人心而壽國脈者, 嗚呼至哉! 我殿下, 仁孝謙恭, 剛健睿哲, 光紹先業, 臨政之暇, 樂觀經史, 每至夜分, 卷不釋手, 以極格致誠正之學, 以盡持盈守成之道焉, 求之前古, 蓋亦絶無而僅有矣。世道方亨, 人文宣朗, 一時勳親大臣、百僚庶府, 以至宿衛之臣, 莫不嚮學。惟我太祖, 右文興化, 育養人材, 而我殿下弘大前烈, 躬行於上, 以鼓舞多士, 作新斯民之致然歟! (隷)〔肄〕業有學, 承祀有廟, 周旋登降, 愀然對越, 觀感開發, 勉勉循循, 由門而堂, 以求其室, 成德達材, 致君澤民者, 接踵而出, 駸駸乎三代作人之盛, 可竢也。豈唯改觀易聽, 焜燿一時而已哉 實我朝鮮宗社萬世之福也。臣季良謹拜手稽首而獻銘。銘曰 於穆宣聖, 應時而生。包羲迄周, 集厥大成。自生民來, 孰盛與京! 赫哉崇祀, 周于普天。矧曰箕封, 禮義惟先! 揖讓俎豆, 從古則然。天錫太祖, 神聖武文。昭受帝命, 克集大勳。翼翼神都, 惟漢之源。迺經學宮, 聖廟在中。奠薦講(隷)〔肄〕, 多士景從。明明我王, 纉緖增功。緝熙聖學, 今古罕同。有卓新宮, 躋祀二公。元良入學, 國本攸隆。我作我述, 先聖是崇。人材是育, 風化是懿。孰無秉彝, 而自暴棄! 人日進學, 世日趨治。登三咸五, 刻日以竢。華山嶙嶙, 漢水亹亹。與國(無彊)〔無疆〕, 惟聖之祀。窮石琢辭, 于永厥示。藝文館提學卞季良所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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