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흥암서원 이야기

장안봉(微山) 2014. 1. 19. 20:53

 

 

 

 

 

 

 

 

 

 

 

 

 

 

 

 

 

 

 

 

 

 

 

 

 

 

 

 

 

 

 

 

 

 

 

 

 

 

 

 

 

 

 

 

명 칭 :  흥암서원(興巖書院)
소 재 지 :  상주시 연원동 769외 2필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동 769번지 외 2필지)
건축시기 :  1702년(숙종 28)
사액시기 :  1705년(숙종 31)
문 화 재 :  경상북도지방문화재 기념물 제61호, 1985,10,15일 지정 지정


건축 배경
영남 지방 최초의 노론계열 서원으로 1702년(숙종 28)에 건립하여 11월에 숙종의 친필 사액을 받았다. 강당인 진수당의 사제문에 의하면 “숭정기원후 78년 을유년 10월에 건립하고 동왕 42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이를 기념하여 어필각과 하마비를 세웠다.” 고 한다. 송준길의 위패를 봉안한 묘우인 흥암사(興巖祠)와 동서재, 강당, 어필을 모사하여 비를 세운 비각, 목판을 보관한 판각고 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716년에 숙종이 “청주에는 화양서원이 있고, 상주에는 흥암서원이 있다. 사액을 하여 현판을 단지도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 퇴락하였으며, 글자의 자획은 더욱 형편이 없어 친필로 써서 판각하여 보낸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존경심에 의해서이다. 임금이 현인을 존경하는 정성이 이에 이르니, 또한 세상의 여론이 선비의 바로 나아갈 방향이 정하여지고 사사로운 말들이 그칠 것이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예조에 명하여 즉시 현판을 걸고 제사를 드리게 하라.”고 하여 민진후(閔鎭厚)가 교서를 받들어 행하였다.


건축 특징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통을 이어 받은 당대의 노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한분을 배향한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도 남은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해방이 되자 교육기관 설립의 기반이 미약하자 학교 교육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상주고등학교와 남산중학교가 이곳에서 발족되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 갔다. 1985년 지방문화재 제 6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5년 유교문화권 개발 사업으로 중수되었다.


건축 구성
흥암서원의 구성은 외삼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강학 공간인 진수당이 자리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 반으로 화려한 건물이다. 양쪽에는 온돌방이며, 중간 3칸은 마루이다.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의 벽체는 문으로 하여 필요시에는 공간 활용을 크게 하였다. 창방의 로반은 사실적인 조각으로 아름다움을 더하였으며, 방안의 환기를 원활하게 할 수 있게 하였다. 강당 내부 구조에서 보면 보 위의 항아리 모양 동자주는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예술미가 보인다.

강당의 뒤쪽으로 동재인 의재(義齋)와 서재인 경재(敬齋)가 마주보며 자리한다. 의재는 원생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며, 맞배지붕으로 양쪽은 온돌방이며, 가운데는 마루이다. 경재는 주사가 붙어있는 양식이며, 전면은 4칸이며 전면에 퇴칸 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강당 뒤편에는 묘정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삼칸 솟을 대문이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송준길선생의 위패를 모셔진 흥암사가 자리한다.

사방 담장 밖의 남쪽에는 숙종의 어필을 모사하여 비각을 지어 보존하는 어필비각이 있다. 비의 뒷면에는 숙종의 친필 사액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비를 새겨 보존하기로 하여 이를 비석에 새긴다는 사실로 권상하의 어필비 음기를 기록하여 놓았으며, 사면을 기둥으로 하였으며 쇠살칸으로 벽체를 처리하였다. 비각을 둘러 싼 담장 안으로 아름이나 되는 참나무가 네그루나 있어 가을이면 도토리가 온 마당을 덮는다.

경재 뒷면 담장 밖으로는 목판과 서책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2002년 복원되어 있다.

흥암서원의 전체적인 구성은 전면에는 강학 공간이며, 후면에는 향사 기능을 가진 조선 전기의 대표적 양식인 전학후묘의 양식이라 하겠다.


현판
흥암사(興巖祠)
묘우인 흥암사의 전면에 걸린 대형 현액이다. 흥암서원 현판은 숙종의 친필로 두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비망기문은 숙종이 친히 전에 쓴 글씨가 보잘것이 없으니 새로이 바꾸어 사액하라는 내용으로 좌찬성(左贊成) 민진후(閔鎭厚)가 받들어 시행하였다는 내용이다.
흥암서원(興巖書院)
강학당인 진수재의 처마 가운데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숭정후 78년 을유년 11월일 사액이라고 옆에 작게 새겨져 있다.
진수당(進修堂)
강학당 마루 안쪽에 걸려 있다.
어필비각(御筆碑閣)
어필 비각 처마 중앙에 걸려 있다. 병진년 계춘에 선산부사 조두수(趙斗壽) 교서(敎書)라고 옆에 새겨져 있다.

내력과 기능

관련의례
- 향사일
춘기향례(春期享禮)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이고
추기향례(秋期享禮) 음력 9월 초정일(初丁日)이며,
국기일(國忌日)이나 유고가 있을 경우는 중하정일(中下丁日)로 늦춘다.

향례(享禮)

봄과 가을 두 차례 추모하는 제사인 향례를 갖는다. 봄에 하는 춘기향례(春期享禮)는 음력 3월 상정일(上丁日)에 지내고 가을에 지내는 추기향례(秋期享禮)는 음력 9월 상정일(上丁日)에 지낸다. 향례 하루 전 제사를 지내는 유사들이 묘우의 청소와 제기를 씻어 놓고, 집사는 헌관의 자리를 묘정 가운데 북향으로 설치하며, 서쪽이 상석이 된다. 아헌관 종헌관의 자리는 그 다음이며, 여러 집사의 자리는 헌관의 뒷줄에 만든다. 찬창의 자리는 서쪽 계단 아래에 만들며 일반 제관의 자리는 집사의 뒤쪽에 둔다. 희생으로는 생돼지를 쓰며 제물이 들어오면 삼헌관과 여러 집사들이 몸을 굽혀 맞이한다. 관장하는 사람이 희생이 충실하다고 헌관에게 고하면, 축을 관장하는 사람이 다시 희생을 둘러보고 초헌관에게 아뢰고는 헌관의 뒤에 선다. 그 후에 주방으로 보내어 행사 시작 전에 묘우에 진설한다.

제사 복식

향례 참가자들은 모두 예복을 입는데 헌관은 사모관대를 갖추어 입고 집사와 유사들은 재복이나 도포에 유건을 갖춘다.

배향위치

흥암사 신문 정면에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관련유물

장판각에는 동춘당문집 목판 1,156매와 『동춘당문집(同春堂文集)』 6권, 『동춘당년보(同春堂年譜)』1권,『우복집(愚伏集)』5권,『우복별집(愚伏別集)』9권,『늑천선생집(櫟泉先生集)』8권,『운담선생문집(雲潭先生文集)』8권,『상산지(商山誌)』1권,『춘추(春秋)』이 보관되어 있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주향자
- 송준길(宋浚吉)
1606년(선조 39) ~ 1672년(현종 13). 우리나라 18현의 한분으로 자는 명보(明甫)이며,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다. 어려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20세 때에 송시열(宋時烈) 과 함께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에게 예학을 수학하였다, 또한 장인인 정경세(鄭經世)에게서도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세마(洗馬)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 이완과 함께 효종의 북벌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김자점(金自點)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서 좌절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에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대사헌을 역임했다. 현종이 즉위한 후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같은 기년제를 주장하였으며, 이후 좌참찬(左參贊) 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찬선(贊善)을 지냈다.

선생은 율곡학파의 성리학자로 율곡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준수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서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南陽)의 윤영(尹榮) 순절비문을 남겼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관련인물

- 송준길(宋浚吉), 권상하(權尙夏), 조정만(趙正萬)

마을이야기

상주 > 시내권 > 연원동
- 서산 서원이 있는 연원동은 조선 후기 상주군 내서면(外西面)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상리(新上里), 신하리, 구서원리(舊書院里), 안양리(安陽里), 오대리(五大里), 연정리(蓮井里) 등을 통합하여 연원리가 되어 내서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월 내서면 남장리(南長里), 외서면 남적리(南積里)와 함께 상주시에 편입되어 상주시 연원동이 되었다. 1988년 5월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상주시 연원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상주군과 상주시가 통합되어 도농복합형의 상주시가 됨에 따라 상주시 연원동이 되었다. 연원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남원동(南院洞) 관할 하에 있다. 연원이란 지명은 연정리와 구서원리의 이름에 연유한다.

구서원, 서원, 안양, 여너물, 징당, 오대 등의 자연마을, 보(洑)인 서보(西洑)가 있는데, 서보는 상주시에서 가장 오래된 보로 1701년(숙종 27)에 축조되었다. 광산마을은 전에 금광이 있었던 곳이며, 구서원 마을은 서원이 있었다는 데 연유한다.

주변의 유적으로는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 박호 등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휘하의 충신 3명과 김준신(金俊臣), 김일(金鎰) 등 이 지방 출신의 의병장 2명을 포함한 5명의 충절을 포상하기 위해 정조가 내린 단비(壇碑)인 충의단이 있는데 원래 상주 시내에 있었다가 1986년에 헐고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또한 흥암서원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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