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당은 1506년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세운 것에서 비롯하였다. 1656년에는 생사당을 다시 경현사(景賢祠)로 고치고, 손중돈과 영천(靈川) 신잠(申潛)을 함께 제향해오다가 1703년에 봉성서당(鳳城書堂)으로 편액하였다.
건축 특징
봉성서당(鳳城書堂)은 비교적 현대식 건물로 시멘트 담과 가운데 철문이 있고, 지붕은 팔작기와를 얹었다. 지붕 끝부분에는 물받이를 설치하였다.
건축 구성
이 서당은 마루 2칸을 포함한 정면 4칸, 왼쪽측면 2칸, 오른쪽측면 2칸 반의 구조이며, 좌?우에는 온돌방을 띤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의 형태로 기단위에 지어졌다.
매년 봄 음력 3월 17일에 향사를 지낸다. 봉성서당(鳳城書堂)이 세워진 계기는 1506년에 상주고을 백성들이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선정을 기려 속수촌에 선생의 사당을 세우고 제향한데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1552년 영천(靈川) 신잠(申潛)이 상주에 정자를 짓고, 대개 학교를 일으키는 것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아, 온 고을 안에 17개의 서당을 창설하여 사림의 학습 공간으로 삼았다. 봉성서당 또한 그 중에 하나로 처음에는 속수촌(涑水村)에 자리 잡았다. 1656년에는 손중돈을 모신 사당을 수리하여 경현사(景賢祠)로 고치고, 안렴사(按廉使) 신잠을 함께 배향하였다. 1703년 사림의 공론으로 서당을 승격시켜 속수서원(涑水書院)이라 하였으나, 이미 같은 이름이 있어 ‘봉성(鳳城)’으로 고쳐 용암(龍巖)으로 이건하였다. 봉(鳳)자를 취한 것은 단혈(丹穴)의 뜻을 취한 것이다. 이후 170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712년 옛 터에 다시 세웠으며, 1743년에 신당리에 옮겨 세웠다. 세월이 흘러 황폐해진 서당을 다시 세울 뜻을 모아 1991년에 중건하였다. 매년 봄 음력 3월 17일에 향사를 지낸 다음에는 서당에 물러나 충 ? 신 ? 효 ? 제의 도리를 강론하였다.
관련문집
- 우재집(愚齋集)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 1463 ~1529)의 문집으로 우재(愚齋)의 15대손 손후익(孫厚翼)에 의해 1935년 4권 2책으로 편집 간행되었다. 이 문집은 저자의 생존 연대와 문집의 편찬 연대가 상당히 간격을 두고 있고 자료들이 많이 전해지지 않아 문집의 내용에 빈약함을 보이고 있다. 손중돈 본인의 저술은 한 수(首)의 시(詩)와 한 편 서(書) 뿐이고 나머지는 저자가 관직 생활 중에 올린 소(疏) · 계(啓) · 차자(箚子) · 경연의(經筵議)를 성종(成宗) · 연산군(燕山君) · 중종(中宗) 삼조(三朝)의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의거하여 뽑고, 짧은 저자의 일기(日記)를 묶어 편집하였다. 특히 이 문집은 행장이나 연보 대신에 저자의 관직 생활 40년간의 행적을 권삼(卷三)과 권사(卷四)로 나누어「입조편년(立朝編年)」이라는 형식으로 싣고 있다. 문집 말미에 ‘관가정장판을해(觀稼亭藏板乙亥)’라는 간기(刊記)가 있다.
- 영천집(靈川集)[고령세고속편(高靈世稿續編)]
영천(靈川) 신잠(申潛 ; 1491~1554)의 시문집으로 3권 3책으로 되어있다. 문집의 원명(原名)은『고령세고속편(高靈世稿續編)』으로 되어있으나, 제2책의 표지서명이 『영천집(靈川集) 중(中)』으로 되어 있다. 문집에는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간기(刊記) 등이 없어 구체적인 간행 경위를 알 수 없으며, 내용도 시(詩)만을 모은 책이다. 신광한(申光漢)의『기재집(企齋集)』에 수록된 「고령세고서(高靈世稿序)」에서는 신주(申澍) . 신종호(申從濩) . 신항(申沆) 등 3인의 시문을 모아『고령세고(高靈世稿)』라 하였으며, 고령(高靈) 신씨(申氏) 집안에는 대대로 문장이 축적되어 왔음을 설명하였는데? 신종호(申從濩)가 신잠의 아버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신잠의 문집은『고령세고(高靈世稿)』의 속편(續編)으로서 간행된 것이라 사료된다.
관련인물
주향자
-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 1463 ~1529)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이며,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아들이고,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하였다. 148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양산군수.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다가 파직 당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직후에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당시 지역 사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추모하였다. 이어 공조·예조 참판을 역임하다가 1517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공조판서·이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도승지.대사간을 지냈으며, 경상도·전라도·충청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저서로 <우재집(愚齋集)>이 있다.
- 영천(靈川) 신잠(申潛 ; 1491~1554)
본관 고령(高靈). 호 영천자(靈川子)·아차산인(峨嵯山人). 자 원량(元亮).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 검열(檢閱)로 있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장흥(長興)에 17년 동안 유배되었다. 1543년(중종 38) 등용,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태인현감(泰仁縣監) ·간성군수(杆城郡守) 등을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 신잠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3절(三絶)로 일컬어졌다 한다.『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묵죽에 뛰어났다고 하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묵죽과 포도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할 만한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중탐매도(雪中探梅圖)」와「화조도(花鳥圖)」가 그의 작품으로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영천집(靈川集)[고령세고속편(高靈世稿續編)]』이 있다.
마을이야기
의성 > 서북권 > 주선1리
- 400여년 전 영양남씨(英陽南氏)가 개척한 마을
봉성서당(鳳城書堂)이 위치한 주선(注仙)마을은 400여년 전 영양남씨(英陽南氏)가 개척하였다. 마을 뒷산에는 신당(神堂)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가정에 환자가 생기면 기도를 하면 건강이 회복 되었다고 한다. 관동(官洞)에 상주목사 우재 손중돈이 선정을 펴 서당과 신당을 세웠으며, 고을 백성들이 손중돈을 위해 생사당을 건립하기도 하여 신당이라 하고, 마을이름을 신당동이라 하였다. 그 후 상주에 거주하는 진주강씨가 그 신당을 허물고 묘(墓)를 쓰게 됨에 따라 당은 산 아래 쪽으로 옮겨지었고, 이름도 신당(新堂)으로 고쳐지었다. 신당동은 비안군 단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내, 선장, 선하, 주하, 속상, 속하, 도암, 용암, 동각 일부와 단동면의 도호 일부를 병합하여 주하와 선상의 이름을 따서 주선이라 하고 단밀면에 편입되었다. 봉성서당은 만경산(萬景山) 아래 위강(渭江) 가에 있는 신당리(新堂里)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약 250년 동안 훼손되면 즉시 수리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제도가 사치스럽지 않고, 또한 검소하지 않으며, 배치한 규모가 방정(方正)하다. 그리고 동네가 탁 트였으며, 주변 경관이 한가롭고 조용하여 학문을 수양하기 좋은 장소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