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서원은 상주 목사를 지내고 병자호란에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과 척화신으로 소현세자와 함께 삼년간 심양에 구금되었던 김상헌을 배향하기 위하여 김필천(金必千)등이 경상감사인 홍만조의 도움을 받아 세운 서원이다.
처음에는 화동면 판곡리 미산(薇山)아래 세워졌을 때의 이름은 의미서원(義薇書院)이었다. 당시에 명칭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서원보다는 서숙의 성격이 더 강하였기 때문이다.
1797년(정조 21) 성재열, 성최열 등이 목사 김재순(金在淳)의 도움을 받아 상주 읍성 밖의 하서문리로 이건하였다. 1855년(철종 6) 김조순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2년 후에 서산서원묘정비를 세웠다. 1861년(철종 12) 현충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1990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축 구성
서산서원의 배치 형태는 교육 시설인 강당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는 묘우를 대신하여 서산서원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담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으며, 작은 쪽문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다. 좌학우묘 형식으로 일렬로 건립되어 있다.
내력과 기능
향사일
현재 묘우를 건립하지 못하여 향사는 지내지 않는다.
- 서산서원 사적비.
이 사적비는 1857년(철종 8)에 세웠으며, 영의정을 지낸 안동김씨 가문의 구심점에 있던, 김흥근이 지은 것이다. 내용은, “서산서원에 배향된 세 분의 행적을 소개하고, 서산서원이 처음에는 화동의 미산 아래에 세워진 의미서원(의미서원) 이었으며,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긴 이유를 설명하였다. 비문의 추기에는 상주의 선비인 성숙원(成肅源) 등이 서원에 사액하여 줄 것을 청원하는 청액소를 올려, 김병국이 예조에 올리고 글씨도 썼다고 하는 기록과 함께 이 비를 세우고 난 후의 변동사항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고 했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주향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본관은 안동이며, 아버지는 김극효이며, 어머니는 정유길의 딸이다. 자는 경택(景擇)이며, 호는 선원(仙源), 풍계(楓溪) 또는 계옹(溪翁)이다. 서울의 수진방(현 수송동·청진동)에서 태어났다. 다섯 형제 중 맏이이며, 병자호란 때 척화를 강력히 주장했던 김상헌은 그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행동이 단정하고 법도에 맞아 주위에서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찬하였다고 한다.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했고 30세(1590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어 임진왜란 때에는 영호남으로 다니며 군량을 조달하거나 명나라 군사를 접대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인조반정 이후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의 직책을 맡아 서울을 방어했다. 1632년과 1635년 우의정에 임명됐으나 얼마 안 있어 병으로 사직했다.
그의 일생은 정여립의 모반,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수많은 사건으로 점철됐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를 주로 기억하는 것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죽음을 맞이했던 짧은 순간일 것이다.
1637년 1월22일 청 군사가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이르자 김경징 등은 배를 타고 도망쳤고 마침내 강화도는 함락됐다. 적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주위에서는 김상용에게 피하기를 청했지만, 그는 ‘국가의 대신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며 어찌 구차스럽게 살려고 하겠는가’ 하였고 옷을 벗어 아들에게 전하라고 한 뒤 강화성 남문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이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1638년에 그에게 충신정려를 내렸으며, 1658년에는 김상용의 사당에 ‘충렬사’라 사액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더욱이 영조는 김상용을 기려 ‘선원이 불에 타 죽은 의리는 내가 일찍이 흠모하였다. 삼학사는 붙잡혀 갔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겠지만 선원은 피난한 대신으로서 반드시 죽을 것이 아닌데 스스로 죽었으니 장하고 장하다. 그 죽음이 어찌 탁월하고 열렬하지 않은가’라고 칭송했으며, 1758년에는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본관은 안동이며, 아버지는 김극효이며, 어머니는 정유길의 딸이다. 김상용의 동생이다. 자는 숙도(叔度)이며, 호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또는 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김대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윤근수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1590년에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좌랑·부교리를 역임했고, 1608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려던 정인홍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었고,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후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뒤에야 풀려났다. 심양(瀋陽)에 잡혀 있을 때,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고 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이 추진하던 대동법을 반대하였다. 문집으로 ≪청음전집(淸陰全集)≫ 40권이 있다.
-김조순(金祖淳, 1765~1832)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으로, 부사 이중(履中)의 아들이다. 자는 사원(士源)이며, 호는 풍고(楓皐)이다. 초명은 낙순(洛淳)이다.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 과 규장각대교를 거쳐 1792년(정조 16)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직각(直閣), 이조참의(吏曹參議), 승지(承旨), 총융사(摠戎使),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때부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정조(正祖)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가 작고하자 어린 순조(純祖)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이나 보필한 공적이 컸다.
마을이야기
상주 > 시내권 > 연원동
- 서산 서원이 있는 연원동은 조선 후기 상주군 내서면(外西面)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상리(新上里), 신하리, 구서원리(舊書院里), 안양리(安陽里), 오대리(五大里), 연정리(蓮井里) 등을 통합하여 연원리가 되어 내서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월 내서면 남장리(南長里), 외서면 남적리(南積里)와 함께 상주시에 편입되어 상주시 연원동이 되었다. 1988년 5월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상주시 연원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상주군과 상주시가 통합되어 도농복합형의 상주시가 됨에 따라 상주시 연원동이 되었다. 연원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남원동(南院洞) 관할 하에 있다. 연원이란 지명은 연정리와 구서원리의 이름에 연유한다.
구서원, 서원, 안양, 여너물, 징당, 오대 등의 자연마을, 보(洑)인 서보(西洑)가 있는데, 서보는 상주시에서 가장 오래된 보로 1701년(숙종 27)에 축조되었다. 광산마을은 전에 금광이 있었던 곳이며, 구서원 마을은 서원이 있었다는 데 연유한다.
주변의 유적으로는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 박호 등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휘하의 충신 3명과 김준신(金俊臣), 김일(金鎰) 등 이 지방 출신의 의병장 2명을 포함한 5명의 충절을 포상하기 위해 정조가 내린 단비(壇碑)인 충의단이 있는데 원래 상주 시내에 있었다가 1986년에 헐고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