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시내를 벗어나 서울 방면으로 나무고개를 넘으면 왕복 8차로의 비행 도로와 양 옆으로 넓은 논들이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는 소백산이 두르고 있으며, 희방계곡의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른다. 이 들 남쪽의 마을이 줄포리이며, 나주정씨들의 세거지에 검암정사 (儉巖精舍)가 있다.
건축 배경
1635년 안동 판관으로 있던 정언숙은 원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영주를 지나다가 산천이 수려함에 이끌려 집을 빌려 살았다. 병자호란 후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영주의 서쪽 줄포에 집을 짓고 김응조(金應祖)·나이준(羅以俊) 등과 교류하며 유연자적하였다. 그러다 1667년 원주로 이사하여 치악산 아래에 검암정사를 지었다.
후에 정사가 퇴락하여 후손들이 “옛 자리는 아니지만, 정언숙이 애상하여 머물었던 곳이고, 손수 심은 나무가 지금도 있으니, 치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1925년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 2동 줄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건축 구성
검암정사는 정면 4칸, 측면 칸 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 구성은 가운데 2칸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고, 전면에는 툇마루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기단은 시멘트로 높게 구축하여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전면 퇴주열만 두리기둥이고, 그 외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상부가구는 전퇴 5량가이고, 양측 온돌방 상부에는 외기 중도리 대신 중도리와 측면 처마도리를 연결하는 만곡재를 가구하여 추녀 및 서까래를 걸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1856(철종 7)년에 나주정씨 문중에서 설립한 봉강서당(鳳崗書堂), 주사와 호암사(扈菴祠)가 있다.
현판
검암정사(儉巖精舍)
비교적 노필(老筆)에 해당하는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이 쓴 검암정사라는 편액도 걸려 있다. 140㎝×44㎝ 크기이다.
검암정(儉巖亭)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검암정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95㎝×30㎝ 크기이다.
수고헌(壽考軒)
특이하게 미수(眉?) 허목(許穆)이 쓴 전서체 수고헌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100×55㎝ 크기이다.
검암정사중건기(儉巖精舍重建記)
관련인물
- 검암정사를 지은 정언숙
정언숙(丁彦王+肅, 1600~1693)의 자는 군서(君瑞), 호는 검암(儉巖) 또는 수고헌(壽考軒)이다. 정호공(丁好恭)의 아들이다. 1623년(인조 1)에 진사시에 장원했으나 파방되고, 이듬해 다시 진사시에 합격했다. 의금부 도사·사헌부 감찰·호조 좌랑·안동 판관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60이 넘어서도 모친상에 3년 시묘를 하였으며, 벼슬에 있어서도 공정함을 지켜 사사로움이 없었고, 엄하면서도 너그러웠다. 백성을 돌봄에는 살뜰하여 이르는 곳마다 칭송이 있었다. 병자호란을 겪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영주의 서쪽 줄포에 자리 잡았다. 저서로 시집 1권이 전한다. 정태진(丁泰鎭, 1876~1960)의 자는 노수(魯?), 호는 외재(畏齋)이다. 정덕규(丁悳奎)의 아들이다. 예사롭지 않은 기상과 도량에 아름다운 풍채가 있었다 하며, 이병호(李炳鎬)에게 글을 배우고, 자라서는 면우(?宇) 곽종석(郭鐘錫)에게 사사하여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1910년 나라를 잃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1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낼 때 대표로 참석하였다가 대구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출옥하여서 검암정사를 중수하고 학문에 잠심하자, 원근의 많은 학도가 모여 들어 후진 양성에 이바지 하였다. 저서로 외재집(畏齋集)이 있다.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이 그의 문인이다.
영주 > 시내권 > 가흥동
- 비옥한 충적평야가 펼져진 가흥동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은 동쪽으로 상망·영주·휴천동을 경계로 하고 있고, 서북부로는 안정면과 봉현면, 서남부는 장수면과 문수면을 접하고 있다. 가흥동은 조선시대 영천군 가흥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줄동·대사동을 병합하였고, 가흥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가흥리라 하고 영주군 영주읍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80년 영주시 승격에 따라 일부지역을 편입시켜 가흥 1·2동으로 구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흥동은 동으로 낙동강 지류인 서천이 흐르고, 북은 서천 지류인 남원천과 죽계천이 합류하여 넓은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서남쪽은 구릉형 산지로 서천연안에 경지와 가옥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대사동(한절마, 한저)은 7세기경 김억산이라는 부자가 자식을 두지 못해 그 소원을 이루려고 삼존불상을 건립하고 큰 절을 지어 한절마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삼존불이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옛날 마애 삼존불상 남쪽에는 덕산 숲이 있었는데, 조선 초 영천군수 하륜이 이곳에 수재가 심한 것을 보고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그 피해를 막게 했다. 또한 배고개는 조선 중종 때 구암 황효공이 서울 배고개에서 살다가 이곳에 이주하면서 전에 살던 서울의 마을 이름을 따서 그대로 배고개라 불렀다 한다. 또한 대부촌은 한절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광복 후에 집단촌으로 개척된 마을로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대부촌이라 했다 한다. 나무고개 밑 도화동은 광복 후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안에 복숭아나무가 많다 하여 도화동이라 불렸다. 지난날 가흥동에는 이조판서 백암 김륵의 구학정이 있었다. 현재 가흥동에는 가흥리 암각화, 매양정, 제민루, 가흥동 5층석탑, 괴정, 소고 박승임 사당, 육우당, 산천서원, 한정의 삼락당, 성잠의 심원정, 서릿골의 인동장씨 재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가흥동은 영주시의 서쪽 관문으로, 중앙고속도로와 강변로가 뚫린 교통의 요지이다. 시민운동장, 영주직업전문학교, 가흥농공단지, 영주시의 식수인 상수도 수원지, 초중고 3개 학교가 위치해 있으며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