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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담로」의 생명 사상
-왕필(王弼)의『노자주(老子注)』와 비교를 중심으로-
김 학 목
강남대학교
주제분류 생명윤리, 기독교윤리, 생태윤리, 기독교신학
주 요 어 노자, 생명, 유위(有爲), 무위(無爲), 인의
초 록
노자는 춘추시대의 제자백가와는 달리 덕목을 내세우지 않아야 도리어 세상이 평화롭게 되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생명을 아름답게 기를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런 노자의 사상은 무위(無爲)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되고, 그의 사상은『노자(老子)』또는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책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대로 수많은 학자들이 끊임없이『도덕경』을 주석하였는데 다양한『도덕경』주석 중에서 위진시대의 천재 소년 왕필(王弼)의『노자주(老子注)』가 노자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조선후기의 학자 이충익(李忠翊)의『초원담로』(椒園談老)』가 왕필의『노자주』보다 노자의 사상을 훨씬 더 정교하고 간결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조선시대 때 이충익 외에는 대부분 유학의
시각으로『도덕경』을 주석함으로써 원시유학의 덕목까지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충익은 노자의 시각으로 『도덕경』을 주석함으로써 당시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은 물론 원시유학까지도 모두 부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강화도를 기반으로 하는 독특한 집단의 학자들의 역할이 암암리에 작용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충익이 이처럼 통치이념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자유로운 생명의 고양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당쟁 패배로 어린 시절부터 겪은 혹독한 고초와 끝없는 좌절이 이념의 대립을 무화시키는『도덕경』의 사상 속으로 그를 강하게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왕필의『노자주』보다 더 뛰어난『도덕경』주석서『초원담로』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Ⅰ. 들어가는 말
『초원담로』1)(?)는 중기 강화학파의 한 사람인 초원(椒園) 이충익(李忠翊: 1744-1816)의 『노자』 주석이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현존하는『도덕경』주석은 모두 다섯 권인데,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도덕지귀(道德指歸: 1769-1777)』만 다소 예외이고, 모두 통치이념의 근거인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순언』(醇言: 1580년 혹은 그 이전)2)은 성리학의 형
이상학적인 명분론을 기반으로 점점 더 가열되는 정쟁을 완화시키기 위해 마음 비움과 절제의 수양을 강조한 것이다.3)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681)』은 심원한 성리학을 토대로 예송논쟁까지 벌일 정도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당쟁을 공자의 “문질빈빈(文質彬彬)”으로 비판한 것이다.4)
1)『초원담로』는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한적실에 소장된 2권 1책의 필사본으로 등록번호는 ‘166000100’과 ‘465008673’이다.
2) 김학목, 「江華學派의 『道德經』 주석에 관한 고찰」,『 東西哲學硏究』 34호, 한국동서철학회, 2004, p.278.
3) 김학목, 「『醇言』에 나타난 栗谷의 經世思想」, 『民族文化』 25집, 민족문화추진회, 2002,pp.194-207.
4) 김학목, 「『新註道德經』에 나타난 西溪의 體用論」, 『철학』 64집, 한국철학회, 2000,pp.42-51
보만재 서명응의『도덕지귀』는 통치이념인 성리학과 무관하게 상수학이나 선천역과 같은 사상으로『도덕경』을 주석했기 때문에5) 다른 주석서와는 다소 다르지만 역시 한편으로 성리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충익의『초원담로』이후에 나온 것으로 주자학을 신봉하는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정노(訂老: 1813)』는 이상의 주석에 대한 비판 특히 박세당의『 신주도덕경』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주자성리학에서 성리학만을 따로 분리·제거하여 주자학을 원시유학으로 다시 정초하려는 것이다.6)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노자』주석은 성리학 비판이 주된 흐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본고에서 논의하려는 초원 이충익의 『초원담로』는 조선시대의 다른『도덕경』주석과 달리 성리학은 말할 필요도 없고 원시유학까지 이탈한다는 점에서 아주 특이하다.『논어』의 “문질빈빈”과 인의(仁義)마저도『초원담로』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초원담로』에 나타나는 이충익의 사상은 모든 생명의 자연스러운 발현 곧 인위적인 제약이 가해지지 않은 생명의 고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가 젊은 시절에 불교에 심취하고7) 결국 통치 이념인 유학을 벗어나 이단으로 낙인찍힌『도덕경』을 노자의 시각으로 주석할 수 있었던 이유는8) 노자의 무위(無爲)가 모든 생명을 고양시키고 발현시킨다는 그의 사상 때문이다.
5) 金文植, 「徐命膺 著述의 種類와 特徵」,『한국의 경학과 한문학』, 태학사, 1996,pp.197-198.
서명응, 조민환·장원목·김경수 역주,『도덕지귀』, 예문서원, 2008,
pp.28-41. 김학목, 「『道德指歸』 編制에 나타난 保晩齋 徐命膺의 象數學.」『哲學硏究』64집, 철학연구회, 2004, pp.36-48.
6) 김학목, 「淵泉 洪奭周가『道德經』을 주석한 목적」, 『철학연구』 60집, 철학연구회,2003, pp.16-22.
7) 유호선, 「陽明學者 李忠翊의 佛敎觀 一考」,『한국어문학연구』 48집,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07, pp.123-138. 조남호, 「강화학파의 중흥」,『인천학연구』 9,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8, pp.164-170.
8) 조남호, 「이충익의 노자 이해」, 『인문학연구』 15집,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9,p.116.
『도덕경』의 목표는 천지가 자신을 비움으로써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통치자가 본받아 백성들을 무위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9) 『도덕경』에서 무위의 다스림을 주장하는 이유는 유위(有爲)의 다스림은 백성들의 생명을 억제·훼손시키기 때문이다. 유위에는 유가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는 인의(仁義)의 교화까지 포함된다. 『도덕경』 2장의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줄 아는 것, 이것은 추악한 것일 뿐이고, 모두 선함이 선한 것이 되는 줄 아는 것,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10)라는 구절로 볼 때, 유가의 인의는 천하가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알아야 할 덕목이기 때문에 추악하고 선하지 않은 것이며 생명의 발현을 막는 유위이다.
조선시대 다른『도덕경』주석에서 유학의 근본 사상을 부정하지 않는 것과 달리 이충익은 유학독존의 시대에 인의를 부정함으로써11) 국가의 통치이념에 반대했다.『순언』에서 율곡 이이는『도덕경』을 통해 수기치인이라는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유학에 어긋나는『도덕경』의 구절들을 제외시켰고,12)『신주도덕경』이나『도덕지귀』에서 박세당과 서명응은 원시유학의 이념이나 상수학 등의 논리로 유학에 대치되는『도덕경』의 구절들을 긍정하거나 적극적인 주석을 회피했다.13)
『정노』에서 홍석주는 노자는 이단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의를 부정한 것 역시 당시의 세속적인 병폐를 지적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했다.14)
그런데 이충익은 망설임 없이 유학에 어긋나는『도덕경』의 구절들까지 노자의 시각 그대로 수용했으니, 그만큼 노자의 무위를 생명 존엄의 사상으로 절실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유위는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세상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며, 무위는 사람들의 생명을 온전하게 발현하게 하는 것이다.『도덕경』의 가장 권위있는 주석은 왕필(王弼)의『노자주(老子注)』15)인데,16) 이충익은 그것보다 훨씬 더 간결하고 정교하게『노자』를 주석하고 있다.17) 그것도 왕필처럼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상적 분위기가 아닌 독존유술의 시대적 조류와 멸문지화의 역경 속에서18) 그가 이런 주석을 했다는 것은 고무적인데 아직까지 그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19)
『도덕경』은 각 구절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수많은 주석 때문에 그 의미를 밝히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문제 때문에『초원담로』와『도덕경』그 자체와의 의미 차이를 밝히기 위해 아직까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필의『노자주』를 부분적으로 참고하겠다. 필자가 보기에 왕필이나 이충익 모두『노자』의 무위를 통해 궁극적으로 생명의 고양과 발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들의 주석방식은 여러 곳에서 같지 않다. 그 차이를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곳이『도덕경』 2장과 37장 등의 주석이니, 이것들을 비롯하여 필요에 따라 왕필의 주와 비교를 통해 노자의 무위가 어떻게 이충익에게 생명의 고양과 발현으로 나타나는지 살피겠다.
9) 김학목, 「老子의 道와 無爲」, 『동서철학연구』 29호, 한국동서철학회, 2003, pp.189-204.
10) 『초원담로』 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필자가 보기에 이 구절은 왕필보다는 이충익의 주석이 더 탁월하기 때문에 『초원담로』의 주석에 따라 해석했다. 왕필주와의 차이는 본문에서 다시 서로 비교하면서 자세히 밝히겠다.
11) 『초원담로』 19장의 주, “어째서 반드시 한숨 쉬며 어짊과 의로움을 말한 다음에 이롭게 되겠는가? …. 그렇다면 효도·자애·충성·믿음은 불화와 혼란에서 드러나는 미덕이지만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효도·자애·충성·믿음이 조화롭고 고요한 곳으로 되돌아가 이름으로 내세워지지 않으면 거의 제대로 된 것이다.
(何必太息言仁義, 而後利哉. …. 然則孝慈忠信, 所以爲不和昏亂之文美, 而不足以願然者. 故孝慈忠信, 還之和靖, 而名不立焉, 則幾矣.)”,
18장의 주, “위대한 도가없어지자 어짊과 의로움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육친이 불화하고나라가 혼란해지자 충신과 효자가 나오는 것을 가지고 알았다.
(何以知大道廢, 而有仁義也. 以親不和國昏亂, 而有忠孝, 知之. 何以知智慧出, 而有大僞. 以有違情以徇忠孝之名者, 知之.)”
12) 김학목, 「『醇言』에 나타난 栗谷 李珥의 사상」, 『동서철학연구』 23호, 한국동서철학회,2002, pp.298-308.
13) 박세당, 김학목 옮김, 『박세당의 노자』, 예문서원, 1999, 2장·18장·19장 등의 주석. 서명응, 조민환·장원목·김경수 옮김, 『도덕지귀』, 예문서원, 2008, 2장·18장·19장 등의 주석.
14) 김학목, 「淵泉 洪奭周가 『道德經』을 주석한 목적」, 『철학연구』, 철학연구회, 2003, pp.19-21.
15) 왕필의 『노자주』는 「신흥서국(新興書局)」에서 영인한 「사부집요(四部集要)」 「자부(子部)」에 속해있는 화정장씨본(華亭張氏本)을 말한다.
16) 왕필의 『노자주』는 추만호가 ‘우리문화연구소’를 통해 1996년에 『老子講義』로, 임채우가 ‘예문서원’을 통해 1997년에 『왕필의 노자』로, 김학목이 ‘홍익출판사’를 통해 2000년에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등으로 번역·출간함으로써 아주 익숙하다. 추만호와 김학목의 번역은 제각기 모두 자신들 나름대로의 이해를, 임채우의 번역은 대만의 학자 루우열의 연구를 토대로 한 것이다.
17) 이충익의 『초원담로』가 왕필의 『노자주』보다 더 간결하다고 하는 이유는 『초원담로』 각 장의 주석 대부분이 원문의 글자보다 더 적기 때문이다. 물론 왕필의 『노자주』는 그렇지 않다.
18) 朴浚鎬, 「椒園 李忠翊의 生涯와 詩」, 『한문학연구』 제 9집, 1994년, pp.211-216.
19) 沈慶昊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椒園談老』를 1998년에 우연히 발굴하여 2000년에 아세아문화사를 통해 간행한 李種殷의 『한국도교문화의 초점』이라는 단행본에서 「椒園 李忠翊의 『談老』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발표했고, 이후에 필자를 비롯하여 송항룡·조민환·조남호·민홍석·김윤경 등에 의해 다소 연구되었다.
송항룡․조민환, 「李忠翊의 『談老』에 나타난 老子哲學」, 『東洋哲學硏究』 27집,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연구회.
조남호, 「강화학파의 중흥 - 이충익의 양명학적 사고-」, 『인천학연구』 제 9호, 인천학연구원, 2008.
조남호, 「이충익의 노자 이해」, 『인문학연구』 15집,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9.
김윤경, 「이광려의 「讀老子五則」에 대한 讀法」, 『정신문화연구』 32권 4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김윤경, 「하곡학파의 『노자』 독법」, 『도교문화연구』 33집, 한국도교문화학회, 2010.
김윤경, 「李忠翊의 『椒園談老』에 드러난 有無觀」, 『도교문화연구』 28집, 2008.
김학목, 「李忠翊의 『椒園談老』 硏究」, 『인천학연구』2-2,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3.
김학목, 「江華學派의 『道德經』 주석에 관한 고찰 」, 『東西哲學硏究』 34호, 한국동서철학회, 2004.
Ⅱ. 생명의 훼손인 유위
이충익의 생명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노자』에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이것들을 직역하면, ‘유위(有爲)’는 ‘시행함이 있음’이고, ‘무위(無爲)’는 ‘시행함이 없음’이다.
그 자세한 의미는 48장의 “배움을 시행하면 날마다 보태고, 도를 시행하면 날마다 덜어낸다.”20)는 구절을 이해하면 드러난다. 배움과 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도덕경』과 관계할 때, 아름답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배움이고, 거꾸로 그런 배움을 없애는 것이 도이다.
이미 앞의 Ⅰ장에서 살펴본 것으로『도덕경』2장의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줄 아는 것, 이런 것은 추악한 것일 뿐이다.”21)에서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인 줄 천하가 아는 것은 교화를 시행하는 유위이다. 반면에 교화를 시행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일을 날마다 덜어서 없애버리는 것이 무위이다.
무위에 대해서는 다음 Ⅲ장에서 다루고, 먼저 유위에 대해서 알아보자.
48장의 배움을 2장과 연결할 때,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 등 통치에 필요한 것들을 백성들에게 교육시켜 알게 하는 것 곧 교화를 시행하는 것은 모두 유위이다. 교화를 시행하면, 무엇이 배울 내용인지 알게 해야 하고, 또 그것을 넓고 자세히 시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힘써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배움을 시행하면 날마다 보탠다.”는 말의 의미는 대략 이처럼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인의처럼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으로 백성들이 교화되도록 배움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곧 유학의 이념인 통치이데올로기를 시행하는 것에 대해 무엇 때문에 추악한 것이라고 단정하는지 그 까닭에 대해 알아보자.
20)『초원담로』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21)『초원담로』 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필자가 보기에 이 구절은 왕필보다는 이충익의 주석이 더 탁월하기 때문에『초원담로』의 주석에 따라 해석했다. 왕필의 주를 따르면,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아는데, 이것은 추악한 것 때문일 뿐이다.”로 해석해야 한다. 뒤에서 이충익과 서로 비교하면서 자세히 밝히겠다.
1. 욕망의 자극인 유위의 교화
한마디로 노자가 유위를 반대하는 이유는 통치자들이 교화 곧 유위를 시행하면 백성들이 그것을 본받아 교묘한 행위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움으로써 국가를 혼란하게 만들어 결국 모든 생명을 위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3장에서 “현자를 높이지 않아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 백성들이 도적이 되지 않게 하며, 욕심날만한 것을 드러내지 않아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의 다스림은 …, 항상 백성들이 알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없게 하며, 지혜로운 자가 감히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한다.”22)라는 구절이 이것에 대한 설명이다.
3장에서 현자와 얻기 어려운 재화 및 욕심날만한 것은 2장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이충익은 다른 장의 주석과는 달리 길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2)『초원담로』3장,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心不亂. 是以聖人之治,
…,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현자를 높이고 어리석은 자를 천대하니, 어리석은 자가 (현명해지려고) 노력하며 자신이 있는 곳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금과 옥을 귀하게 여기고 잡다한 기구를 천하게 여기니, 농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의복과 먹을거리를 맛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들의 직업을 버린다.
높은 명예와 드러나는 직위를 사람들에게 과시하니, 영화를 바라는 것이 끝이 없어지고 풍속이 어지러워진다.
…. 이 때문에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들이 마음과 뜻을 물리쳐 배와 뼈를 기르도록 하고 ‘알고 싶은 것’[知]과 ‘하고 싶은 것’[欲]이 중심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농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에 전념해서 쇠약해지지 않는다. ….23)"
23)『초원담로』 3장의 주,
“尙賢而賤愚, 則愚者有所跂, 而不安其所矣. 貴金玉而賤什器, 則農工不甘美其衣食, 而失其業矣.
高名顯位以夸示於人, 則榮願無窮, 而俗亂矣.
…. 是以聖人之爲治, 使民黜其心志, 而養其腹骨, 知與欲無得以滑其中. 然後農工專其業, 而無羸瘠矣. ….”
통치자가 유위 곧 교화를 시행할 때 나오는 폐단은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하게 되려고 하는 것이고, 평범한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또 명예와 영화에 눈이 멀어 끝없는 욕망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곧 유위로 아름다움과 선함을 드러내서 백성들을 교육시키면, 교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욕망이 자극되어 마침내 국가나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쪽으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2장의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줄 아는 것, 이것은 추악한 것일 뿐이고, 모두 선함이 선한 것이 되는 줄 아는 것,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라는 구절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 분명하게 살아난다.
이충익의 이와 같은 해석은 노자의 사상을 노자의 시각으로 받아 들인다는 점에서는 왕필과 동일하다. 그러나 왕필이『도덕경』의 각 구절마다 모두 하나하나 주석한 것과 비교해보면, 이충익은 왕필과 다르게 노자를 이해하고 있다. 이충익은 각 장의 끝에서 그 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해서 주석했기 때문에 왕필보다 더 간결·정교하고, 심지어 많은 곳에서『도덕경』본문보다도 그 주석이 짧은 곳도 많다.24)
본 논문에 인용된『초원담로』와『노자주』모두를 비교한다는 것은 지면과 시간 낭비일 뿐이니, 여기서는 먼저 절을 바꾸어서 무위와 유위를 모두 설명하는 단서가 되는 2장의 왕필주를 중심으로『초원담로』와의 차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4) 대표적으로 짧은 곳은 12·43·47장 등으로 다음과 같다.
『초원담로』 12장 본문,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주석, “爲腹, 外於心知也, 不爲目, 耳目內通也.”,
43장 본문,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閒.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주석, “無爲之有益, 有爲者敗之. 不言之敎, 神道設敎, 而天下服.”
47장 본문,
“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주석, “離道而逐物, 彌遠而彌失.”
2. 이충익과 왕필의 2장 주석 차이
『도덕경』 2장의 첫 구절 곧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에 대해 이충익과 왕필의 해석이 달라지는 까닭은 대명사 ‘斯’자 때문이다.
곧 이충익은 ‘斯’자가 “天下皆知美之爲美”를, 왕필은 “美之爲美”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해 이충익은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줄 아는 것, 이런 것은 추악한 것일 뿐이고, 모두 선함이 선한 것이 되는 줄 아는 것, 이런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라는 의미로,
왕필은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줄 아는데, 이것은 추악한 것 때문일 뿐이고, 선함이
선한 것이 되는 줄 아는데,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 때문일 뿐이다.”라는 의미로 주석했다.
이충익은 이 구절에 대해 “아름다운 것·선한 것이 이름으로 명명되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에서 나오지 않게 되니,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선한 것이 욕심낼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추악한 것·선하지 않은 것이 서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진다.”25)라고 주석했다. 곧 그는 통치자들이 아름답고 선한 것을 이름으로 명명해서 교화를 통해 백성들에게 강조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욕망이 자극되어 추악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화를 통해 아름답고 선한 것을 강조할수록 백성들의 욕망이 더 자극되어 결국 국가나 개인의 생명을 어지럽히고 훼손시키니, 유위를 시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왕필은 2장의 첫 구절에 대해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은 기뻐하는 것과 노하는 것과 같고,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은 옳은 것과 그른 것과 같다. 기뻐하는 것과 노하는 것은 근원이 같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은 문호(門戶)가 같으므로, 한쪽만을 거론해서는 안 된다.”26) 라고 주석했는데, 그 의미가 애매하다.
그런데 18장의 주 “매우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은 아주 추악한 것에서 생기니, 이른바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문(門)을 같이한다는 것이다.”27)라는 말을 참고할 때, 2장의 첫 구절에 대한 왕필주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곧 선하지 않은 것과 추악한 것 때문에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드러나니,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결국 상대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5)『초원담로』2장의 주, “美善可名, 而不出於自然, 則天下皆知美善之可欲, 而惡與不善, 相因以成.”
26)『노자주』 2장의 주, “美惡猶喜怒也, 善不善猶是非也. 喜怒同根, 是非同門, 故不可得而偏擧也.”
27)『노자주』 18장의 주, “甚美之名, 生於大惡, 所謂美惡同門.”
이충익이나 왕필은 2장의 첫 구절에 대해 서로 다르게 주석했지만, 궁극적으로 모두 노자의 무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곧 이충익은 위에서 교화를 시행하는 것 때문에 백성들이 잘못되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생명을 해치니, 통치자들이 무위하면 비록 백성들 스스로 시행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멀리 벗어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강조한다.
곧 그는 “유가 있으면 반드시 무가 있게 되고, …, 장단과 고하가 불붙듯이 존립하니, 이에 있는 재주를 다해 헤아려도 헤아릴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만물이28) 시행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만물의 공에 머물지 않아서 바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으로 되돌릴 수 있으니, 만물의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을 영원히 하고 길이 떠나지 않게 한다.”29)라고 주석한다.
28) 주석의 ‘其’자를 만물로 해석한 것은 본문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구절에서 萬物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인데, 만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29)『초원담로』2장의 주,
“有有必有無, …, 長短高下, 熾然存立, 乃至巧歷所不能算. 是故聖人不恃其爲, 不居其功, 乃能反乎自然, 常其美善, 而長不厺也.”
반면에 왕필에게 아름다운 것은 추악한 것에 의해 성립하는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에 불과하듯이 나머지 본문의 유무 등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되고, 성인이 무위하는 것도 유위가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하여 교화를 베풀면 세상이 어지럽게 된다는 것이다. 왕필에게 절대적인 세계는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이 추악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으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있는 ‘저절로 그런 것’[自然]이기 때문에 한쪽만 거론해서는 안되는 것이다.30) 이런 점에서 이충익이 2장을 해석하는 관점과는 이상의 설명처럼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2장의 첫 구절 외에 나머지 본문을 이충익의 관점대로 해석하면
“그러므로 유(有)와 무(無)가 서로 낳아주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어지며, 긴 것과 짧은 것이 서로 드러나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서로 비교되며, 성(聲)과 음(音)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가 서로 연결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아무 것도 시행함이 없는 일삼음을 지키고 말없는 교화를 행한다.
만물이 어떤 것을 일으켜도 말하지 않고, 무엇인가 내놓아도 있다고 하지 않으며, 무엇을 시행해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머물지 않는다. 오직 머물지 않기 때문에 떠나가지 않는다.”31)로해야 한다.
30)『노자주』, 2장의 주, “기뻐하는 것과 노하는 것은 근원이 같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은 문호(門戶)가 같으므로, 한쪽만을 거론해서는 안 된다. 본문의 여섯 가지[有無․難易․長短․高下․音聲․前後]는 모두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自然]들을 진술했으니, 한쪽만을 거론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치’[明數]이다.
(喜怒同根, 是非同門, 故不可得而偏擧也. 此六者皆陳自然, 不可偏擧之明數也.)”
31)『초원담로』 2장,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聲音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厺.”
2장의 나머지 본문을 왕필의 시각으로 보면, 그 문구가 동일할지라도 의미내용은 다르다.
왕필에게 ‘유와 무가 서로 낳아준다.’는 의미는 유와 무가 상대적으로 서로 의지해서 성립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충익에게 그 의미는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게 하는 교화를 시행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점에서 유무상생이다. 곧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을 유라고 하면, 강조하는 것 때문에 도리어 잘못되어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무라고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왕필에게 ‘성인의 시행함이 없는 일삼음’이나 ‘말없는 교화’도 상대적인 것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이충익에게는 교화를 시행하면 잘못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충익이나 왕필 모두 궁극적으로 노자의 무위를 설명하기 위해 이상처럼 서로 다른 관점에서『도덕경』 2장을 설명했다. 필자가 보기에 두 사람의 설명 방법이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모두 노자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필의『노자주』는 노자의 의도를 아주 간략하게 잘 드러낸 최고의 주석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충익의『초원담로』는 왕필주보다도 훨씬 더 간략하게 노자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32) 그러니 그 만큼 더『초원담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계속해서 생명을 고양시키는 무위에 대해 장을 바꾸어서 살펴보자.
32) 간혹『초원담로』가『노자주』보다 분량이 더 많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2장의 주를 다음처럼 비교해 보면,『노자주』의 분량이 더 많다.
『초원담로』:
“美善可名, 而不出於自然, 則天下皆知美善之可欲, 而惡與不善, 相因以成. 有有必有無, 有難必有易, 長短高下, 熾然存立, 乃至巧歷所不能算. 是故聖人不恃其爲, 不居其功, 乃能反乎自然, 常其美善, 而長不厺也.”
『노자주』:
“美者, 人心之所進樂也. 惡者, 人心之所惡疾也. 美惡猶喜怒也, 善不善猶是非也. 喜怒同根, 是非同門. 故不可得而偏擧也. 此六者皆陳自然, 不可偏擧之明數也. 自然已足, 爲則敗也. 智慧自備, 爲則僞也. 因物而用, 功自
彼成. 故不居也. 使功在己, 則功不可久也.”
Ⅲ. 생명의 고양인 무위
48장의 “배움을 시행하면 날마다 보태고, 도를 시행하면 날마다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서 아무것도 시행하는 것이 없게 되면, 시행하는 것이 없지만 시행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33)라는 구절에서 배움은 2장의 아름다움 등에 대해 백성들이 알게 하는 것으로 교화를 시행하는 것 곧 유위이다.
그런데 유위는 백성들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그 목적과 상반되게 도리어 나라는 물론 백성들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무위는 앞에서 간략히 살펴본 것처럼 통치지가 시행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다. 48장의 말로 볼 때, 통치자가 시행할 것을 없애고 또 없앰으로써 아무것도 시행하지 않아 오히려 백성들이 제대로 되는 것이 무위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고할 때, 무위는 유위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곧 무위는 욕망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제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무위를 행하면 간혹 백성들 중에서 욕망을 자극시키는 일을 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게 됨으로써 저절로 안정된다고 이미 이충익이 앞의 Ⅱ장 2절에서 설명했다.34)
이충익의 관점에서 무위의 시작은 유위로는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만들 수 없고 도리어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곧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아는 것, 이것은 추악한 것일 뿐이고, 모두 선함이 선한 것인 줄 아는 것,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무위의 시작이다.
무위는 도를 본받는 것으로 “도는 비우면서 작용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듯하다. 그러니 …. 그 예리함을 꺾어 분란을 해소한다.”35)라는 구절과 “천지는 아마도 풀무와 같을 것이니, 비어 있어 다하지 않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놓는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니 마음속으로 지키고 있는 것만 못하다.”36)라는 구절과 관련된다. 이 구절들은 결국 ‘천지와 성인이 만물과 백성들에게 어질게 대하지 않은 것.’37)에 대한 까닭으로 압축된다. 곧 통치자가 유위의 폐단을 깨달아 자신을 비우고 무위로 무관심할 때 백성들이 무위의 교화 속으로 흡입되어 그들의 생명을 스스로 고양시킨다는 것이다. 무위에 대한 이충익의 설명을 32장과 37장을 통해 살펴보자.
33)『초원담로』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之, 以至于無爲, 無爲而無不爲矣.”
34)『초원담로』 2장의 주, “이 때문에 성인은 만물이 시행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만물의 공에 머물지 않아서 바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으로 되돌릴 수 있으니, 만물의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을 영원히 하고 길이 떠나지 않게 한다.
(是故聖人不恃其爲, 不居其功, 乃能反乎自然, 常其美善, 而長不厺也.)”
35)『초원담로』 4장, “道冲而用之, 或不盈. …. 挫其銳, 觧其紛.”
36)『초원담로』 5장,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37)『초원담로』 5장,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지푸라기로 엮어 만든 강아지처럼 취급하고,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지푸라기로 엮어 만든 강아지처럼 취급한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1. 생명의 고양인 무위의 교화
32장의 “도는 항상 ‘이름’[名]이 없다. 질박함이 비록 하찮을지라도 천하에서 아무도 신하 삼을 수 없다. 후왕이 만약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복종할 것이고, 천지는 서로 합침으로 단이슬을 내릴 것이며, 사람들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38)라는 말에서 첫 구절의 ‘이름’[名]이 2장의 아름다운 것·선한 것 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충익이 “아름다운 것·선한 것에 이름을 붙여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에서 나오지 않게 되니,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선한 것이 욕심낼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추악한 것·선하지 않은 것이 서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진다.”39)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이름의 있음과 없음 곧 이름으로 드러내는지 여부가 유위와 무위의 기점이다.
38)『초원담로』 32장,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不敢臣. 侯王若能守, 萬物將自賓, 天地相合, 以降甘露, 人莫之令而自均.”
39)『초원담로』 2장의 주,
“美善可名, 而不出於自然, 則天下皆知美善之可欲, 而惡與不善, 相因以成.”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을 이름으로 드러내어 알림으로써 교화시키면 그 때문에 세상이 잘못되어 서로의 생명을 훼손한다는 의미로 이충익은『노자』2장의 첫 구절을 해석했다. 위의 단락에서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는 구절 이하의 의미는 진정한 도는 이름으로 드러낼 수도 없고 드러내서도 안된다는 의미이고, 또 후왕이 도의 이름 없음을 본받으면 만물과 백성들이 저절로 복종하고 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충익은 이것에 대해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도에 대해 비록 억지로 이름을 붙여 도라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도의 영원함과 같은 것은 도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는 거칠게 비유한 것이다.
또 ‘질박함’[樸]으로 도의 크게 온전함에 대해 비유하고, 나누어서 마름질한 것으로 ‘그릇’[器]이라고 이름 붙였다. 질박함을 그릇으로 비유하면 하찮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도의 크게 온전함은 바로 임금의 도이니, 후왕이 그것을 지킴으로써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질박함이 나누어져서 그릇이 되면 온갖 이름이 성립한다.40)"
40)『초원담로』 32장의 주, “道雖强名之曰道, 然若道之常, 非道之可名. 則道是取譬之粗也.
又以樸取譬於道之大全, 而以散而制者, 名之曰器. 樸譬之器, 可謂小矣. 然道之大全, 卽君道也, 侯王所以守之, 以賓萬物者也. 樸散而爲器, 衆名立焉.”
위의 내용은 질박함으로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통치에 필요한 덕목을 이름으로 드러내어 교화시키면 도리어 백성들이 다스려지지 않고, 이름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오히려 다스려진다는 의미이다.
58장의 “화에는 복이 기대어 있고, 복에는 화가 엎드려 있으니, 누가 그 종극을 알겠는가? 그것에는 일정한 것이 없는 것 같구나! 일정한 것이 다시 느닷없는 것이 되고, 선하게 하는 것이 다시 재앙이 되게 하니, 사람들이 헷갈린 지가 시간적으로 꽤나 오래되었다.”41)라는 구절도 이상의 의미를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곧 유위를 복으로 여겨 시행하면 잘못되고, 무위로 가만히 놔두는 것이 재앙처럼 여겨질지라도 그렇게 하면 결국 제대로 된다는 의미이다.
이 시점에서 백성들에게 덕목을 드러내지 않게 시행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는데, 노자는 그 대답까지 준비해 놨다. 그는 37장에서 “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시행함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후왕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저절로 감화될 것이다. 감화된다고 이것을 일으키고자 하면, 나는 이름 없는 질박함으로 진정시킬 것이다. 이름 없는 질박함마저도 하고자 함이 없어야 할 것이니, 하고자 하지 않아 고요해진다면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42)라고 했기 때문이다.
37장은『도덕경』의 핵심인데, 여기서 노자는 ‘드러나지 않게 시행하는 것마저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충익의 주석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41)『초원담로』 58장,
“禍兮福所倚, 福兮禍所伏, 孰知其極. 其無正邪. 正復爲奇, 善復爲祅, 人之迷也, 其日固久矣.”
42)『초원담로』 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질박함으로 사물을 진정시키는 것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사물이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질박함이라고 말해버렸다면 형태로 드러난 것이 되어 32장의 시작을 마름질해 나누면 이름이 서로 함부로 생겨난다는 것과 비슷하게 염려되므로, “이름 없는 질박함”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이름 없음이라고 말했다면 말을 없앨 수 없으므로, 또 이름 없음마저도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질박함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단지 고요함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핵심을 지적한 것일 뿐이다. 고요해지는 것을 사용하니, 성대한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 저절로 바르게 된다. ….43)"
43) ?초원담로? 37장의 주,
“以樸鎭物之欲作, 欲物之歸根也. 然旣謂之樸, 則涉於形, 似恐與始制之名相濫, 故曰無名之樸.
然謂之無名, 則不能無謂矣, 故又不欲以無名. 名樸, 只要以靜. 以靜, 則芸芸者, 歸根而自正. ….”
이충익은 이름 없음이라는 말마저도 없애야 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곧 통치자가 무위 그것까지도 의도적으로 행해서는 결코 생명을 고양시킬 수 없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37장은『노자』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곳 중의 한 곳인데, 이충익은 노자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간파하고 있다. 37장에 대한 왕필의 관점도 이충익과 다르지 않지만 이충익의 주석만큼 분명하지가 않다. 그들의 주석을 서로 비교해 보면, 이충익의『초원담로』가 얼마나 뛰어난지 바로 실감할 수 있으니, 절을 바꾸어 왕필의『노자주』를 살펴보자.
2. 이충익과 왕필의 37장 주석 차이
『초원담로』와『노자주』의 차이를 직접 살펴봄에 왕필『노자주』에서 구절마다의 본문과 주석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원번호를 사용하겠다.
곧 본문 ①에 대해 그 주석에도 ①로 표시하겠다는 것이다.『초원담로』는 이미 앞의 1절에서 살폈으니, 이것을 가지고 왕필주와 서로 비교하면 된다.
본문:
①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시행함이 없지만,
②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③후왕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저절로 감화될 것이다. 감화된다고 이것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나는 ‘이름없는 질박함’[無名之樸]으로 그것을 진압할 것이나,
④이름 없는 질박함, 그것마저도 하고자 함을 없애겠다.
⑤하고자 하지 않아 고요해지면, 천하가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①道常無爲,
②而無不爲.
③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④無名之樸, 夫亦將無欲.
⑤不欲以靜, 天下將自定.)
왕필의 주석:
①저절로 그렇게 됨을 따른다.
②만물은 도로 말미암아 시행하는 것에 의해 다스려지고 완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
③ ‘교화된다고 일으키려고 한다.’라는 구절은 완성시키겠다고 일으킨다는 의미이고, ‘나는 이름 없는 질박함으로 그것을 진압할것이다.’라는 구절은 근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④내세우려고 함이 없다.
(①順自然也.
②萬物無不由爲以治以成之也.
③化而欲作, 作欲成也, 吾將鎭之無名之樸, 不爲主也.
④無欲競也.)
『도덕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했다면, 37장의 의미는 이충익의 해석처럼 쉽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왕필의 주석을 참고할 경우, 노자의 의도를 어긴 것은 아니지만 2장의 주석에서처럼 또 그 의미 파악이 다소 모호해진다. 이충익이 “그것을 이름 없음이라고 말했다면 말을 없앨 수 없으므로, 또 이름 없음마저도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의미파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한 것과 서로 비교된다. 왕필이 모호하게 주석한 것 때문에 이미 몇 권의 번역본이 시중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에서 대부분 전체적인 초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44) 사실 왕필『노자주』번역에 책임이 있는 필자도『초원담로』를 참고한 다음에『도덕경』을 더욱 깊이 이해했고, 또 왕필의 의도에 대해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물론 왕필『노자주』의 모든 곳이 이충익의『초원담로』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곳은 왕필의 주석이 뛰어난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충익의 주석이 훨씬 더 간결하고 정교하다는 것이다.
왕필은『도덕경』2장·11장·40장의 유와 무를 통해 우리의 지성이 절대적인 세계를 파악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이어 천도와 합일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성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는 마음 비움을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체계적으로 언급한다.45)『노자주』의 이런 점은 유(有)와 무(無)로 이루어진 사물의 자연스러운 존재 방식 곧 ‘사물로 드러나는 부분’[有]과 ‘사물이 사물로 드러나게 하는 그 상대적 이면’[無]을 통해『도덕경』전체를 설명하려는 구도로 왕필주의 탁월함이다.
44) 추만호 옮김,『老子講義』, 우리문화연구소, 1996년.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 예문서원, 1997년. 김학목 옮김,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홍익출판사, 2000년.
45) 김학목, 「王弼의 『老子注』에서 有·無에 대한 考察」, 『철학』 제 63, 2000년, pp.59-76.
그런데 이충익은 이미 2장의 주석에서 보았듯이 유(有)·무(無)의 상대적 구조보다는 바로 아름다움이나 선을 고양하려는 유위 때문에 세상과 모든 생명이 잘못된다고 지적하여 깨닫게 함으로써 무위의 절대적인 세계에 접근시키려고 한다. 곧 왕필이 유·무라는 사물의 존재 구조를 통해 마음 비움을 강조하고 결국 마음 비움을 통해 무위에 도달할 수 있음을 차례대로 설명하는 방법과는 다르다.
이충익은 1장의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구절에 대해 왕필이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로 구두한 것과 달리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로 구두하고는46) 이곳의 유와 무로 나머지 11장과 40장의 유와 무를 설명하는데,47) 2장의 유와 무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48)
46)『초원담로』1장의 주, “천지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무(無)라고 이름 붙이고, 만물이 이윽고 생겨나오는 것을 유(有)라고 이름 붙이는데, 무는 유에 상대적인 무가 아니고, 유는 무에서 유로 된 것이 아니다. 무는 바로 ‘영원한 무’[常無]이어서 이름붙일 수 있는 무가 아니니, 그 오묘함을 헤아릴 수 없다. 유도 ‘영원한 유’[常有]이어서 이름붙일 수 있는 유가 아니니, 그 미묘함이 끝이 없다.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함과 끝이 없는 미묘함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유와 무는 ‘영원한 유’[常有]와 ‘영원한 무’[常無]가 되어서 이름 붙일 수 있는 유와 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무가 그냥 독자적으로 무이기 때문에 유와 다르지 않고, 유가 그냥 혼자서 유이기 때문에 무와 구별되지 않는다.
(天地未有, 名之曰無, 萬物旣生, 名之曰有, 無非對有之無, 有非自無爲有. 無乃常無, 而非可名之無, 則其妙不測. 有亦常有, 而非可名之有, 則其徼無際. 能觀不測之妙, 與無際之徼, 則有無之爲常有無, 而非可名之有無, 可知矣. 無乃特無, 故不殊於有, 有乃獨有, 故不別於無.)”
47)『초원담로』11장의 주,
“유와 무가 서로에게 있어 이로움과 효용이 되는 것을 알면, 1장에서의 ‘나온 곳이 같은데 이름이 달라진다.’는 구절의 뜻을 알게 된다.
(知有無之相卽, 而爲利用, 則同出異名之旨, 見矣.)”,
40장의 주, “만약 ‘무가 있어 유를 낳고 유가 있어 사물을 낳았다.’고 말한다면 막혀서 이해되지 않는 곳이 허다할 것이니, 생사와 주야가 서로 일관되는 (1장의) ‘영원한 무’[常無]와 ‘영원한 유’[常有]가 아니다.
(若曰有無生有, 有有生物, 許多隔斷, 非死生晝夜, 相爲一貫之常無常有也.)”
48) 김윤경이 「李忠翊의『椒園談老』에 드러난 有無觀」에서 이충익과 왕필의 유무를 서로 비교·연구했지만, 아직까지 심도 있는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충익의 논리 전개로 볼 때, 2장의 유와 무 역시 무이면서 유라는 1장의 구조로49)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Ⅱ장 2절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아름다움을 이름으로 드러내어 강조하면 그 때문에 추함이 나오듯이 유와 무는 상생한다는 것이다. 곧 유와 무는 구분되지 않고 이름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이기 때문에, 유를 드러내면 무가 나오고 무를 드러내면 유가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은 것을 드러내어 교화하려고 하면 백성들이 자신의 분수를 망각하고 억지로 따라하려고 해서 잘못되고, 추악한 것을 드러내어 교정하려고하면 자신이 추악한 것에 편하지 않아 억지로 회피하려고 해서 잘못된다는 것이다.50) 결국 무엇이든 이름으로 드러내어 교화시키면 그 의도를 벗어나 나쁘게 된다는 의미이다.
유와 무가 상생하는 것은 그것들이 원래 하나였기 때문에 한쪽을 드러내면 다른 한쪽이 나타난다는 것이 이충익의 관점이다. 곧 백성들을 교화시키려고 선한 것을 이름으로 드러내면 선하지 않게 되니,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이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되니, 그것이 무위의 교화이다. 곧 통치자가 이것을 깨닫고, 말하지 않고 시행함이 없는 교화로 모든 생명을 고양·발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도덕경』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유와 무가 하나라는 이충익의 논리에는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양명학의 ‘심즉리’가 묘하게 전제되어 있는데,51) 이것에 대한 논의는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하겠다.
49)『초원담로』 1장의 주, “무가 그냥 독자적으로 무이기 때문에 유와 다르지 않고, 유가 그냥 혼자서 유이기 때문에 무와 구별되지 않는다.(無乃特無, 故不殊於有, 有乃獨有, 故不別於無.)”
50)『초원담로』 3장의 주, “현자를 높이고 어리석은 자를 천대하니, 어리석은 자가 (현명해지려고) 노력하며 자신이 있는 곳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 높은 명예와 드러나는 직위를 사람들에게 과시하니, 영화를 바라는 것이 끝이 없어지고 풍속이 어지러워진다.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 그런데 좋지 않은 자들을 ‘구제할 대상’[資]으로 취급하면 좋지 않은 자들이 좋지 않은 것에 불안해서 욕심낼만한 좋은 것으로 달려가니, 이것은 좋지 않은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도적질을 하고 난을 일으켜서 성인이 구제해야 할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尙賢而賤愚, 則愚者有所跂, 而不安其所矣. …. 高名顯位以夸示於人, 則榮願無窮, 而俗亂矣. 聖人之治, 以民爲本. 而以不善人爲資, 不善人不安於不善, 而騖善之可欲, 則是不善人爭起爲盜亂, 而聖人失其資矣.)
51) 금장태,『한국유학의 노자이해』, 서울대출판부, 2006년, p.258. 유호선, 「陽明學者 李忠翊의 佛敎觀 一考」, pp.119-39. 김학목, 江華學派의『道德經』주석에 관한 고찰,『동서철학연구』 제 34호, p.293.
Ⅳ. 끝맺는 말
어느 사상이든 그것이 생명의 고양과 발현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데, 노자의 사상은 여타의 사상과 다르다. 도가 이외의 다른 학파에서는 인의나 겸애 같은 것을 생명 고양의 근본 덕목으로 강조한다. 그런데 노자는 무엇이든 드러내어 강조하면 도리어 생명을 훼손하니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아야 된다고 한다. 이것이 노자의 무위로 여타의 사상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노자의 사상은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주석했지만, 일반적으로 왕필(226-249)의『노자주』가 간결하게 노자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왕필보다 더 간결하고 정교하게 노자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 이충익(1744-1816)의 『초원담로』이다.
이충익은 당쟁에 패한 가문의 후손으로 독존유술의 시대에 온갖 고난과 가난을 견디면서『노자』를 노자의 시각으로 주석했다. 그 주석 이면에는 양명학과 불교의 영향도 있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심각하게 폐단을 드러내는 주자성리학은 물론 그 원초적 기반인 원시유학까지 반성함으로써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진리탐구의 정신이 숨어 있다. 그런데 이충익의 통치이념 부정에는 조선조『노자』주석 유학자들이 대부분 성리학의 새로운 활로를『노자』에서 모색한 것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이충익(1744-1816) 바로
다음의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주자학자 홍석주(1774-1842)까지 그의『도덕경』주석『정노』에서 성리학을 긍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의 무위 교과서『노자』가 2천년 이상의 엄청난 세월 후에 유학 일색의 조선시대에 노자의 의도 그대로 생명을 고양하는 사상으로 재조명되었으니, 모두 초원 이충익의 진리탐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율곡 이이의『순언』으로부터 이어지는『도덕경』주석의 대부분이 모두 성리학을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초원담로』처럼 노자의 입장에서 원시유학까지 비판하지는 않았다. 더구나『도덕경』주석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필의『노자주』를 능가하는 간결하고 정교한 논리로 생명의 고양을 위해 조선조의 통치이념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이충익의『초원담로』는 조선시대 지성사에서 큰 획은 긋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이충익(1744-1816)이 왕필(226-249)보다 1,500년 이상 이후에 귀무론을 대표하는 왕필의『노자주』와 이것에 대립하는 숭유론52) 및 수많은 주석들을 참조하고『도덕경』을 주석했으니, 왕필보다 훌륭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점은 당연히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초원담로』의 탁월함이 결코 평가 절하 될 수는 없다. 다만 피비린내 짙게 풍기는 당쟁의 반동으로『초원담로』가 나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곧 가문의 당쟁 패배 여파로 어린 시절부터 겪은 혹독한 아픔과 헤어날 길 없는 좌절 때문에
이념의 대립을 무화시키는 노자의 사상에 강렬하게 매혹되어 이토록 훌륭한 주석을 남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저민다.
52)『초원담로』「後序」, “‘무를 귀하게 여기는 학파’[無家]는 세속의 학문이 근본에 헷갈리는 것을 비천하게 보고, ‘유를 높이는 학파’[有家]는 현묘한 이치가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제각기 스스로 높이고 폄하하여 서로 융합되지 못하니, 유와 무가 모두 성립하지 못하고 도술이 분열되었다. ….
(無家, 卑世學之迷其本, 有家, 嫌玄理之不綜物. 各自主奴, 不相融攝, 有無俱不成立, 而道術裂.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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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椒園談老」的 生命 思想
金學睦 | 江南大
在春秋時代, 諸子百家標榜各其道德規範, 而且主張用它來可以終熄當時的亂世. 但是老子與他們完全不一樣, 他强力主張我們不應該標榜所有道德規範, 才能成和平世界, 以能善養各自生命. 這樣的老子思想可略謂‘無爲’一詞, 其思想載於『老子』(一名『道德經』), 遠以影響到後代.
後來衆多硏究老子的學者, 對於『道德經』不斷的註疏, 而且許多人們讀其書. 其書可比西洋的基督徒『聖書』有名. 在『道德經』註疏中, 魏晉時代的天才王弼的『老子注』可謂最簡易標達老子的思想. 然我看來, 朝鮮末期的學者李忠翊的『椒園談老』, 可謂比於王弼的『老子注』更精巧的· 更簡易的標達老子的思想.
在朝鮮時代, 有五種『道德經』註疏. 其成書都是爲了修正·補充或是否定當時統治理念的根幹卽朱子性理學之病弊的. 然而, 在五種『道德經』註疏中, 除了李忠翊的『椒園談老』以外, 都是從儒家的看法來註疏『道德經』的. 所以它們都是不能否定先秦儒家的道德規範. 而李忠翊是從道家的看法來註疏『道德經』的. 因此, 他旣能否定當時統治理念的根幹卽朱子性理學, 又否定了先秦儒家的道德規範. 在這樣的情況裏面, 他當然受到了世稱江華學派的隱然影響.
據我的硏究, 李忠翊所以能如此全面的否定當時統治理念者, 應有多方面的原因. 然而最根本的原因, 應是他對自由自在的生命的提高及强烈的熱情. 因爲他的家早就在黨派鬪爭中失敗了, 他從小經過了極甚的苦難和無限的挫折, 所以他强烈的仰望了把理念對立無效化的『道德經』思想. 因此, 李忠翊終於能做成比於王弼的『老子注』更高超的『道德經』註疏卽『椒園談老』.
主要語: 老子, 生命, 有爲, 無爲, 仁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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