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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學志 제160집(2012년 12월),
‘道’의 인식
: 地下의 서적과 紙上의 서적을 통해 본『노자』 철학의 형성과 전개 Ⅱ
이 승 률**
<차 례>
1. 머리말
2. 곽점본의 ‘도’의 인식: 감각과 지적 사유 작용 부정
3. 마왕퇴본과 현행본의 ‘도’의 인식: 감각의 부정에서 긍정으로
4.『荀子』와『凡物流形』에서 ‘도’의 인식
5. 소결
<국문요약>
철학의 형성과 전개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자는 전국시대의 곽점본에서 한대의 마왕퇴본을 거쳐 현행본의
단계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철학사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본고에서는 ‘도’의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고찰했는데, 도의 인식에서도 변화의 양상이 포착된다. 먼저 곽점본에서는 도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감각에 의한 지각 작용은 물론 언어에 의한 지적 사유 작용을 모두 봉쇄해야 한다고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감각과 사유에 의하여 분절되기 이전의 만물제동의 세계와 일체화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곽점본의 인식론은 일종의 신비주의나 신비주의적 직관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마왕퇴본과 현행본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감각을 이용하여 도를 파악하는 것을 긍정하는 쪽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변화하게 된데에는 존재론에서의 변화, 즉 도가 만물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인식에서 도가 만물에 내재하고 편재해 있다는 인식으로 바뀌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왕퇴본과 현행본에서의 인식론은 감각적 경험과 신비주의적 직관인식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내에서 도에 대한 인식이 이와 같이 전환하게 된 데에는, 도는 마음의 수양을 통하여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순자』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범물류형』과 같은 문헌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도의 인식론에서의 이러한 변화와 전개는 도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알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인식에서, 도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알고 실천하기 쉬운 것이라는 인식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핵심어: 노자, 곽점본, 마왕퇴본, 현행본, 도, 인식론, 순자, 범물류형
* 이 연구는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의 인문학 심화연구 지원사업을 통해 수행되었음.
**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 연구교수, 동양철학.
1. 머리말
본고는 ‘道’의 인식이라는 관점에서『老子』철학의 형성과 전개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노자』철학의 연구사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紙上의『노자』즉 현행본(王弼本)만을 이용하여 연구가 진행되어 온 시기이고, 또 하나는 地下의『노자』가 출현함으로써 그것과 현행본을 비교하는 형태로 연구가 진행되어 온 시기이다. 그 분기점은 1970년대이며, 지하의『노자』란 1973년 湖南省 長沙市 馬王堆 3호 漢墓에서 출토된 帛書本 『노자』甲本과 乙本을 가리킨다(이하 마왕퇴본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지하의『노자』와 현행본과의 비교라는 형태의 『노자』철학 연구 또한 두 시기로 나누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획기를 이루는 것이 바로 1993년 湖北省 荊門市 郭店 1호 楚墓에서 출토된 竹簡本 『노자』甲本‧乙本‧丙本의 출현이며,(이하 곽점본이라고 한다) 시기는 이 자료가 공표된 1998년이다. 이것이 왜 획기를 이루는가 하면, 마왕퇴본의 경우는 문자‧章節‧분량은 물론 철학사상에서 현행본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부분이 곽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書寫 시기도 漢代이기 때문에, 이 때까지만 해도『노자』철학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었는가라는 것은 거의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곽점본이 공표되고 나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왜냐 하면 우선 분량이 현행본의 ⅓밖에 되지 않고, 서사시기도 전국시대이며,1) 장절은 물론 문자에도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곽점본이 完本인지, 초록본이나 발췌본인지, 형성 과정 중에 있는 판본인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에 따라『노자』라는 텍스트의 형성과 전개의 문제도 자연히 쟁점이 되었다.
1) 필자는 일찍이 『老子』 『莊子』 『荀子』등에 보이는 ‘自然’ 개념의 연구를 통하여 곽점초간 『노자』의 성립 시기의 상한선은 전국시대 중기 이후이고, 하한선은 『순자』이전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졸고, 「『莊子』의 ‘自然’과 『荀子』의 ‘性僞之分’」, 『東方學志』 146, 2009, 346∼347쪽 참조.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노자』라는 텍스트의 형성과 전개의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지만, 『노자』철학의 형성과 전개의 문제에 관해서는 체계적인 연구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별고에서『노자』는 곽점본에서 마왕퇴본 및 현행본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철학사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기본 입장을 피력하고, 그것을 ‘도’의 존재론이라는 관점에서 증명한 바 있다.2) 여기서 요점만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선진시대에 도가철학자들은 이 세계는 ‘一’이면서 ‘無’를 특징으로 하는 ‘도’의 세계와 ‘多’이면서 ‘有’를 특징으로 하는 ‘만물’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2세계론’을 처음으로 주창하였다.3) 이러한 2세계론에서 도는 곽점본 단계에서는 만물로부터 초월해 있는 실재로 인식되었지만, 마왕퇴본과 현행본 단계에서는 만물에 내재하고 편재해 있는 실재로 인식이 전환되게 된다. 존재론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사회나 정치를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에도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키게 되는데, 모든 사람에게 사회정치적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노자』특유의 사회분업론과 포용의 철학이 마왕퇴본과 현행본 단계에서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도와 만물의 2세계론에 관한 이론 중 존재론에서의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는 도를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에도 그 파장이 미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가정 하에 존재론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도의 인식의 문제에서도 나타나는지, 나타난다면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또 어떤 특징이 있는지, 더 나아가 그 원인은 어디에 있고 사회정치적 배경은 무엇인지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졸고, 「‘道’의 존재론-地下의 서적과 紙上의 서적을 통해 본 『老子』 철학의 형성과 전개Ⅰ-」, 『東方學志』 159, 2012, 95∼125쪽.
3) 도와 만물의 2세계론 및 후술할 도의 형이하화에 관해서는 池田知久, 「中國思想史における「自然」の誕生」, 『中國-社會と文化』 8, 東京: 中國社會文化學會, 1993, 19쪽;
同, 『老莊思想』, 改訂版, 東京: 放送大學敎育振興會, 2000, 143∼148쪽도 함께 참조.
2. 곽점본의 ‘도’의 인식: 감각과 지적 사유 작용 부정
필자는 앞에서 도와 만물의 2세계론에 관한 이론 중 존재론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는 도를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에도 그 파장이 미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다.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파장의 주된 내용을 먼저 말하면, 곽점본 단계에서는 감각 인식을 완전히 부정했던 것이 마왕퇴본과 현행본 단계에서는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 전개되어 간다.
그것을 먼저 곽점본부터 확인해 보자. 곽점본에서는 도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감각에 의한 지각 작용과 언어에 의한 지적 사유 작용을 모두 봉쇄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함으로써 감각과 사유에 의하여 분절되기 이전의 萬物齊同의 도의 세계와 일체화하게 된다고 한다.
【원문①】음악과 음식은 지나가던 길손도 멈추게 한다. 그러나 도에서 나온 말은 담박하여 아무런 맛도 없다. (도는) 눈으로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귀로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지만, (그것을 써도) 다 쓸 수 없다.4)
4) 곽점 병본 제4∼5호간(제35장), “樂與餌, 過客止. 古(故)道[之出言], 淡可(呵)丌(其)無味也. X(視)之不足見, 聖(聽)之不足X(聞), 而不可X(旣)也.”
異體字나 假借字의 경우는 어떤 글자의 이체자 혹은 가차자인지를 ‘( )’에 넣어 표기했고, 誤字의 경우는 어
떤 글자의 오자인지를 ‘< >’에 넣어 표기하였다. 缺字의 경우는 그것이 추측 가능할 경우 ‘[ ]’에 넣어 표기하였다. 脫字의 경우도 ‘[ ]’에 넣어 표기하였다. 또, 곽점본의 缺文은 마왕퇴 갑본에 의거하여 보충했지만, 갑본에 결문이 있을 경우에는 을본에 의거하여, 을본에 결문이 있을 경우에는 현행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이하 동일.
아울러 곽점본과 마왕퇴본의 저본으로는 國家文物局古文獻硏究室 編, 『馬王堆漢墓帛書〔壹〕』, 北京: 文物出版社, 1980; 荊門市博物館 編, 『郭店楚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98을 이용하였다.
단, 필자가 사진 도판을 직접 보고 또 선행 연구를 참조하여 문자를 고친 부분도 많다. 그리고 곽점본과 마왕퇴본을 해석하거나 내용을 확정할 때에는 許抗生,『帛書老子注譯與硏究』, 增訂本, 杭州: 浙江人民出版社, 1985(초판:1982);
高明, 『帛書老子校注』, 北京: 中華書局, 1996; 李零, 『郭店楚簡校讀記』,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2; 廖名春, 『郭店楚簡老子校釋』, 北京: 淸華大學出版社, 2003;
池田知久,『老子』, 東京: 東方書店, 2006; 同, 앞의 책, 2011 등을 참조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池田知久의 연구로부터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다만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일이 주를 다는 것은 생략하였다.
여기서는 도의 인식을 음악 및 음식과 대비하면서, 음악과 음식은 인간이 청각과 후각을 통하여 알 수 있지만, 도는 미각‧시각‧청각과 같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5) 인간이 도를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노자』내에서는 명언하고 있지 않지만,『莊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일반적으로 도를 형체가 없고 작위함이 없는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5) 곽점 갑본 제14호간(제63장)의 “未(味)亡(無)未(味).”도 함께 참조.
"대개 도는 실제로 존재하고 진정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작위를 가하는 일이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은 (말로) 전해줄 수는 있지만 (손으로) 받을 수는 없고, 체득할 수는 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다.6)"
6)『莊子』, 「大宗師」, “夫道, 有情有信, 無爲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도는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파악할 수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곽점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문②】진정으로 알고 있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실제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눈ㆍ귀ㆍ코ㆍ입의 구멍을 막아 감관의 문을 닫고 감각의 빛을 누그러뜨려서 먼지와 같은 혼돈한 세계와 통하게 되며, 예리한 두뇌를 꺾어서 어지러운 만물제동의 세계 그 자체에 녹아들어간다. 이것을 심오한 합일이라고 한다.7)
7) 곽점 갑본 제27∼28호간(제56장), “X (知)之者弗言, 言之者弗X(知). X(閟)亓(其) X(穴),X (塞)亓(其)門, 咊(和)亓(其)光, 迵(通)亓(其) X(塵), X(剉)亓(其)X (銳),X (解)亓(其)紛. 是(謂)玄同.”
‘光’과 ‘銳’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원문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문장 전체를 통관해 보면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문장 첫머리에서는 知와 言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道에 관한 인간의 知와 言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其穴과 其門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때의 穴과 門은 인간(其는 인간을 가리킴)의 눈‧코‧입‧귀와 같은 감관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其光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보면 이때의 其는 穴과 門을 가리키고 光은 穴과 門 즉 감관에 의한 知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銳의 경우는 앞에서 감관에 의한 知를 비유하는 말로 光을 사용했기 때문에, 두뇌 작용에 의한 사유의 銳利함이나 銳敏함 정도로 해석하면 동어반복의 오류를 피하면서 매끄럽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其銳의 其는 물론 인간을 가리킨다. 이 점에 관해서는 池田知久, 앞의 책, 2006, 74∼75쪽도 함께 참조.
먼저 ‘知’와 ‘言’을 통하여 도를 아는 방법을 부정한 후, 곧바로 눈‧귀‧코‧입 등 인간에 나 있는 구멍을 막아 감각의 빛이 도의 인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감관을 차단할 것을 요구한다.
‘和其光’이라고 할 때의 ‘光’은 학자들마다 해석이 분분한데, 위의 문장에서 ‘其’가 ‘知者’와 ‘言者’를 가리키고 ‘穴’과 ‘門’이 耳目口鼻와 같은 감관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光’은 감관을 통한 지각 작용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和’는 여기서는 ‘온화하게 하다’, ‘조화롭게 하다’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장자』 「제물론」편 ‘瞿鵲子‧長梧子’ 문답의 다음의 문장에서 ‘和之以天倪’라고 할 때의 ‘和’를 의미한다.
"(長梧子) (……) 비인위적으로 갈아 으깨는 방법으로 융화시키고 어떤 구분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따르는 것이 천수를 누리는 방법이다.
(瞿鵲子) 비인위적으로 갈아 으깨는 방법으로 융화시키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長梧子) 그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을 그렇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8)"
8) 『莊子』, 「齊物論」,
“……和之以天倪, 因之以曼衍, 所以窮年也. 何謂和之以天倪. 曰, 是不是, 然不然.……”
‘天倪’는 『經典釋文』에서 “班固曰, 天硏.”이라고 하는 것을 참조.
‘硏’은『說文解字』에서 “䃺也”라고 하는 것에 의하면 ‘갈다’를 뜻한다. 「제물론」편의 ‘天鈞’도 ‘天倪’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天’은 물리적 내지는 이법적인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人爲나 作爲를 의미하는 ‘人’의 반대 개념으로 ‘非人爲’나 ‘非作爲’를 의미한다.
이 문장에 의하면 ‘和之以天倪’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가치판단이나 그러함과 그렇지 않음을 구분하는 사실판단 등을 ‘비인위적으로 갈아 으깨는 방법으로 융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가치판단이나 사실판단 등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것을 감관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감관에 의한 지각 작용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곽점본의 다음의 문장은 이러한 감각 부정의 인식론을 윤리론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원문③】(지각의) 문을 닫고 (눈‧귀‧코‧입의 감각의) 구멍을 막는다면 평생 힘쓰지 않아도 되지만, (눈‧귀‧코‧입의 감각의) 구멍을 열고 작위적으로 일을 행한다면 평생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9)
9) 곽점 을본 제13호간(제52장), “閟亓(其)門, X(塞)亓(其) X(穴), X(終)身不X(敄).啓亓(其)X (穴), X(濟)亓(其)事, X(終)身不X(來).”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은 지각 작용만이 아니다. ‘예리한 두뇌를 꺾는다’고 하는 것에 의하면, ‘知’와 ‘言’의 능력으로 도를 분석하고 개념화‧ 이론화하는 지적 사유 작용 또한 부정하고 배제한다. 그렇게 되면 정신은 먼지와 같은 혼돈한 세계에 스며들어 통하게 되는데, 이처럼 정신이 만물제동의 세계와 일체화되는 것이 바로 ‘玄同’이다.『노자』의 현동 개념이 추상적이라고 한다면, 아래에 보이는『장자』의 현동은 보다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曾參과 史鰌의 행위를 제거하고 楊朱와 墨翟의 입을 봉합하며 仁義를 버리면, 천하 사람들의 덕은 심오한 합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10)"
10)『莊子』, 「胠篋」, “削曾史之行, 鉗楊墨之口, 攘棄仁義, 而天下之德始玄同矣.”
이러한 현동의 세계는 지각과 사유에 의하여 分節되기 이전의 전체로서 하나인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언급할 「제물론」편의 만물제동의 철학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만물제동의 세계와 자신의 정신이 일체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장의 저자가 말하는 도에 대한 진정한 앎의 세계이다.11) 이러한 곽점본의 인식론은 일종의 신비주의 내지는 신비주의적 직관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12)
11) 이상 제56장에 해당하는 문장의 해석과 관련해서는 池田知久, 앞의 책, 2006, 73∼76쪽 참조.
12) 許抗生, 앞의 책, 1985, 27쪽; 盧育三, 老子釋義, 天津: 天津古籍出版社, 1987, 217쪽 참조.
단, 許抗生이 ‘明’과 함께 ‘光’을 신비주의적 直覺智慧라고 하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光’은 감관에 의한 지각 작용을 의미하고, 그것을 부정 배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감관에 의한 지각 작용과 지적 사유 작용을 모두 차단하고 봉쇄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마왕퇴본과 현행본에도 거의 그대로 계승된다. 다음의 문장은 그러한 예 중의 하나이다.
【원문④】도는 텅 비어 있어서 아무리 사용해도 가득 채우는 일이 없다. 깊고 깊어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 (도는) 사람들의 예리한 두뇌를 꺾어버리고 혼돈한 만물의 세계에 녹아들게 하며, 사람들의 감각의 빛을 누그러뜨려서 먼지와 같은 혼돈한 세계와 하나가 되게한다. 물을 깊숙이 가득 채우고 (도는) 그 가장 깊은 곳에 실재하는 듯하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상제보다 더 오래전의 조상인 것 같다.13)
13) 마왕퇴 갑본 제100∼101행(제4장),
“[道沖(盅), 而用之有(又)弗]盈也˪. 潚(淵)呵始(似) 萬物之宗˪. 銼(剉)其[兌(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呵始(似)]或存. 吾不知[誰]子也˪, 象帝之先˪.”
현행본의 경우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거의 동일하다. 이하, 본고에서 인용하는 마왕퇴본의 문장은 현행본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마왕퇴본만 인용하기로 한다.
이 문장에서 밑줄 친 부분은 더 이상 분석할 필요도 없이 원문②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원문②에서는 ‘知者’가 주어인 반면, 원문④에서는 도가 주어인 점이 다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도를 ‘상제’(帝)와 비교하면서 ‘상제보다 더 오래전의 조상’으로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도가 최고신인 상제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새로운 규정은 전국후기
에서 말기 및 통일진의 출현, 즉 ‘분열에서 통일’이라는 사회정치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추측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3. 마왕퇴본과 현행본의 ‘도’의 인식
: 감각의 부정에서 긍정으로
그런데 원문②와 원문④와도 다른 것이 마왕퇴본의 다음의 문장이다.
【원문⑤】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은 지혜라고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인함이라고 한다. 감각의 빛을 이용하여 밝은 지혜로 돌아가면 내 몸의 재앙은 모두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항상 불변함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14)
14) 마왕퇴 갑본 제30∼31행(제52장),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亓(其)光, 復歸亓(其)X(明), 毋遺身央(殃), 是胃(謂)襲常.”
이 문장에서 ‘小’는 곽점본에서 “도는 항상 이름이 없는 존재이다. 가공하지 않은 원목은 비록 작다 하더라도”라고 하고, 마왕퇴본에서 “도는 …… ‘작다’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에 의하면, ‘도’를 역설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15) 그렇다면 ‘見小’는 곧 ‘見道’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5) 곽점 갑본 제18호간(제32장), “道X(恆)亡(無)名. X(樸)售(雖) X(細)”; 마왕퇴 갑본 제162∼163행(제34장), “道……可名於小.” ‘小’가 ‘道’를 가리키는 점에 관해서는 福永光司,『老子』下, 東京: 朝日新聞社, 1987, 86쪽; 盧育三, 앞의 책, 1987, 217쪽 참조. 단, 盧育三은 “형상과 감각에 사로잡히면 ‘見小’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明’은 ‘진정한 지혜’를 의미하는데, 곽점본에는 다음과 같이 단 한군데에만 보인다.
【원문⑥】많은 덕을 품고 있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갓난 애기와 같다. ……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메지 않는 것은 (신체 기운의) 조화의 극치이다. 이처럼 (신체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항상 불변함이라고 하고, (신체 기운의) 조화를 잘 아는 것을 밝은 지혜라고 한다.16)
16) 곽점 갑본 제33∼34호간(제55장), “酓(含) X(德)之X(厚)者, 比於赤子. …… X(終) 日X(呼)而不X(嗄), 咊(和)之至也. 咊(和)曰常, X(知)咊(和)曰明.”
이 문장에 의하면, ‘明’은 신체의 기운의 조화를 잘 아는 지혜, 다시 말하면 갓난 애기와 같은 도의 왕성한 생명력(=德)을 잘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것은 인식론이라기보다는 양생론과 관련된 ‘明’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곽점본 단계에서는 도의 인식과 관련된 ‘明’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마왕퇴본과 현행본의 단계가 되면 다음의 내용들이 추가된다.
【원문⑦】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고요함을 철저히 지킨다면, 만물은 일제히 생장하기 시작하고, 나도 만물이 도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대개 만물은 왕성하게 자라면서 각각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 이것을 고요함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요함은 사물이 (도가) 명령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도가) 명령한 곳으로 되돌아감으로서 (세계의) 항상 불변성이 성립하게 되는데, 이러한 (세계의) 항상 불변성을 아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17)
17) 마왕퇴 갑본 제122∼123호간(제16장),
“至虛極也, 守X(靜)表(篤)也, 萬物旁(竝)作, 吾以觀其復也. 天<夫>物雲(X)雲(X), 各復歸於其[根. 曰X(靜). 情(靜)]是胃(謂)復命. 復命, 常也. 知常, X(明)也.”
【원문⑧】성인은 항상 사람들을 잘 구제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고, 물건은 어떤 재화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거듭된 밝은 지혜라고 한다.18)
18) 마왕퇴 갑본 제146∼147행(제27장),
“聲(聖)人恆善X(救)人, 而无棄人, 物无棄財˪. 是胃(謂)X (疊)X(明).”
【원문⑨】타인을 아는 것은 단지 지적으로 아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밝은 지혜이다.19)
19) 마왕퇴 갑본 제161행(제33장), “知人者知(智)也, 自知[者明也].”
【원문⑩】장차 줄이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잠시 동안 펼쳐두어야 한다. 장차 약하게 하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잠시 동안 강하게 해 두어야 한다. 장차 제거하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잠시 동안 기용해야 한다.
장차 빼앗으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잠시 동안 베풀어 주어야 한다. 이것을 희미하여 파악하기 힘든 진정한 지혜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부드럽고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원리이다. 물고기는 깊은 연못에서 꺼내서는 안 되듯이, 이상에서 말한 나라의 편리한 도구도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20)
20) 마왕퇴 갑본 제166∼168행(제36장),
“將欲拾(歙)之, 必古(姑)張之. 將欲弱之, [必古(姑)]强之. 將欲去之, 必古(姑)與(擧)之˪. 將欲奪之, 必古(姑)予之. 是胃(謂)微X(明)˪. 友(柔)弱朕(勝)强. 魚不[可]脫於潚(淵), 邦利器不可以視(示)人˪.”
이 문장에서는 유약한 방법으로 ‘張之‧强之‧擧之‧予之’를 들고 강한 방법으로 ‘歙之‧弱之‧去之‧奪之’를 든다. 이러한 지혜를 특별히 ‘微明’이라 하여 일반사람들은 알 수 없으며 알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원문⑦은 만물이 도에서 나와서 도로 복귀하는 세계의 항상 불변성을 아는 지혜를 가리키고, 원문⑧은 성인이 인간과 사물에 대하여 세간의 상대적인 ‘善ㆍ不善’의 가치관을 초극한 절대적인 입장에서 양자의 장점을 통찰하는 지혜를 가리키며, 원문⑨는 타인을 아는 ‘智’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자기 자신을 아는 지혜를 가리키고, 원문⑩은 정치나 군사 영역에서 유약한 방법이 강한 방법을 이긴다는 지혜를 가리킨다. 원문⑤는 도의 인식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위의 네가지 ‘明’ 중 원문⑤의 ‘明’과 관련이 있는 것은 원문⑦이다. 이상에 의하면, ‘明’이란『노자』에서 도를 인식하는 최고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논의를 여기까지 진행시켜 오게 되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왜 ‘小’ 즉 도를 ‘보는 것’(見)을 최고의 지혜인 ‘明’이라고 했을까 하는 점이다.
‘見’은 곽점본과 마왕퇴본에서 “눈으로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다”라고 하듯이,21) 인간의 시각이라는 감각을 통하여 도를 보려고 하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러한 시각과 같은 감각으로는 도는 절대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되어 왔다.
21) 곽점 병본 제5호간(제35장), “ (視)之不足見.”; 마왕퇴 갑본 제115∼116행(제14장), “視之而弗見.”
그런데 원문⑤에서와 같이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은 지혜라고 한다”라고 하면, 도는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띠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잠재적 가능성에서 끝나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그 다음에 “감각의 빛을 이용하여 밝은 지혜로 돌아간다”라는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이 구절에서는 감각의 빛인 ‘光’을 이용한다고 하여 긍정하고 있으며, 그것을 진정한 지혜인 ‘明’으로 돌아가는 매개적인 수단이나 과정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것은 원문②와 원문④에서 “감각의 빛을 누그러뜨린다”라고 하여 ‘光’을 부정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행본 제52장에 해당하는 장 자체 내에서도 사실은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제52장에 해당하는 문장은 앞에서 곽점본 및 마왕퇴본의 일부를 인용했는데, 논의의 편의상 전체 원문을 다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⑴【곽점 을본】“閟亓(其)門, X(塞)亓(其)X (穴), X(終)身不 X(敄). 啓亓(其)X (穴), X(濟)亓(其)事, X(終)身不X(來).”
⑵【마왕퇴 갑본】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X(旣)得亓(其)母, 以知亓(其)[子, X(旣)得亓(其)子], 復守亓(其)母˪, 沒身不殆.
⒝• 塞亓(其) (穴)˪, 閉亓(其)門, 終身不蓳(勤). 啓亓(其)悶(穴), 濟亓 (其)事, 終身[不來].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亓(其)光, 復歸 亓(其)X(明), 毋遺身央(殃), 是胃(謂)襲常.”
⑶【마왕퇴 을본】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亓(其)母, 以知亓(其)子, 旣得知亓(其)子, 復守亓(其)母, 沒身不佁(殆).
⒝塞亓(其)X(穴), 閉亓(其)門, 冬(終)身不蓳(勤). 開亓(其)X(穴), 齊(濟)亓(其)[事,冬(終)身]不來.
⒞見小曰眀(明), 守[柔曰]强. 用[亓(其)光, 復歸亓(其)明. 毋]遺身央(殃), 是胃(謂)[襲]常.”
⑷【현행본】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우선 곽점본과 마왕퇴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부호에 관하여 잠시 언급하면, 마왕퇴본의 ‘˪’는 구두점의 역할을 하는 부호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곽점본의 ‘’와 마왕퇴 갑본의 ‘•’이다.
전자는 장을 종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장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부호이다. 먼저 곽점본의 경우는 ‘終身不來’ 다음에 ‘’ 부호를 표기하여 이 장이 여기서 종결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마
왕퇴 갑본의 경우는 현재 남아 있는 백서의 사진 도판에 의하면 ⒜와 ⒝ 두 군데에 ‘•’가 있다. 이것은 곧 ⒜와 ⒝의 문장은 마왕퇴 갑본의 단계에서는 서로 별개의 문장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곽점본의 문장이 ⒝ 부분만 있는 것을 통하여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곽점본에는 ⒞에 해당하는 문장도 없다. 그런데 앞에서 ⒝와 ⒞의 문장의 의미를 분석하는 자리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는 감각을 부정하고 있고 ⒞는 감각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서로 모순되는 문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는 차치하더라도, ⒞가 없고 ⒝만 있는 곽점본의 문장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정합적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마왕퇴갑본 단계에서 ⒞가 삽입됨으로서 오히려 내용에 모순 충돌이 일어나고 훨씬 부자연스럽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태가 마왕퇴 을본을 거쳐 현행본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52장에 해당하는 문장은 곽점본과 같이 ⒝만으로 구성된 문장이 원래의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마왕퇴본 단계에서 ⒜와 ⒞가 새롭게 삽입되어 있는 것은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때 우리가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이 ⒜가 갖는 의미이다. ⒜는 별고에서 이미 논급했듯이 도의 내재성과 편재성을 의미하는 문장이다.22)
그것은 다음의 문장에 보이듯이 도를 ‘有名’이라 하여 形而下의 만물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22) 졸고, 앞의 글, 2012,
【원문⑪】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항상 불변한 도가 아니다. (도를)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 불변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시원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욕망이 없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서 신묘한 세계를 보고, 항상 욕망이 있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서 명료한 세계를 본다. 이러한 (유명의) 도와 만물 양자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 이 양자로부터 출발하여 심오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또 거슬러 올라가면, 마침내 많은
신묘한 것이 있는 문에 도달하게 된다.23)
23) 마왕퇴 갑본 제93∼94행(제1장),
“•道可道也˪, 非恆道也˪. 名可名也˪, 非恆名也. 无名, 萬物之始也˪. 有名, 萬物之母也˪. [故]恆无欲也, 以觀其眇(妙)˪. 恆有欲也, 以觀其所噭(曒). 兩者同出, 異名同胃(謂)˪. 玄之有(又)玄, 衆眇(妙)之[門].”
별고에서 이미 논급했듯이, 이 문장의 서두에서는 인간이 언어나 지적 사유 능력으로 도를 고정화하거나(可道) 이론화하는(可名) 순간, 그 도는 항상 불변한 절대적인 도가 아니게 된다고 하고 있다. 이때 말하는 도란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시원”이라고 할 때의 ‘무명’의 도, 즉 이 장의 저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衆妙之門’으로서의 근원적인 실재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무명’의 도를 말함과 동시에, ‘有名’의 도를 말하고 있다. ‘유명’이 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그것을 ‘만물의 어머니’로 규정하고 있는 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노자』에서 ‘어머니’라는 것은 도를 상징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여 어떠한 부정적 매개도 없이 도의 ‘유명’을 말하게 되면, 도에 이름이 부여되어 도가 형이하의 만물과 동일한 차원으로 내려오는 의미를 갖게 됨과 동시에, 그러한 도가 개별 사물에 내재하고 편재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만물의 세계도 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다.
도가 형이하의 만물과 동일한 차원으로 내려오는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한 근거 중의 하나는, 그래야만 “양자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양자는 形而上의 ‘무명’의 도와 만물이 아니라, 形而下化한 ‘유명’의 도와 만물을 가리킨다. 왜냐 하면 형이상의 ‘무명’의 도, 즉 ‘玄之又玄’하여 도달한 ‘중묘지문’으로서의 근원적인 도를 양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同出’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이나 ‘중묘지문’으로서의 도보다 더 근원적인 도는 논리상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도를 ‘무명’의 초월적인 도와 ‘유명’의 내재적인 도라는 두 종류로 구분하여 보는 관점은 곽점본에는 없고 마왕퇴본에 이르러 처음 등장한 새로운 철학이다.24)
24) 졸고, 앞의 글, 2012, 111∼114쪽 참조. 아울러 부정적 매개를 통하여 도를 언어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예로는 곽점 갑본 제21∼22호간(제25장)의 “未X(知)亓(其)名, X(字)之曰道. X(吾) X(强)爲之名曰大.”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 이 문장에서는 ‘字’와 ‘强’이 부정적 매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도가 형이하화 하여 만물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면, 만물과 마찬가지로 도도 또한 인간이 감각을 매개로 하여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데 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원문⑪의 “인간은 항상 욕망이 없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서 신묘한 세계를 보고, 항상 욕망이 있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서 명료한 세계를 본다”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서는 ‘觀’이라는 글자가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두 번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노자』의 세계관이 2세계론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원문⑪에는 도의 초월성을 주장하고 그러한 초월적인 도만을 추구하려 했던 곽점본 단계의 철학에는 보이지 않는 독특한 구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독특한 구조란 곧 두 세계의 특징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를 구분하고 있는 구조를 가리킨다.
먼저 두 세계의 특징을 보면, 한쪽은 ‘妙’를 특징으로 하고, 다른 한쪽은 ‘曒’를 특징으로 한다.25) 전자는 희미하고 심오하여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마왕퇴본의 다음의 문장에 보이는 ‘妙’도 이것과 같은 의미이다.
25) ‘曒’는 사진 도판에 의하면 마왕퇴 갑본ㆍ을본 모두 ‘噭’자를 쓴다. ‘噭’는『說文解字』「二上ㆍ口部」에 “吼也.”라고 하는 것에 의하면 如字로는 통하지 않는다. 현행본은 ‘徼’ 자로 쓰는데, 王弼이 “歸終也.”라고 주석을 내린 이래 해석이 분분하다. 한편 羅振玉에 의하면 敦煌本은 ‘徼’를 ‘曒’로 쓰고 있는데, 朱謙之는 돈황본에 의거하여 읽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曒’는 ‘妙’와 대구를 이루어 의미가 잘 통하게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朱謙之의 설을 따른다. 朱謙之, 『老子校釋』, 北京: 中華書局, 1984, 6∼7쪽 참조.
【원문⑫】옛날 도를 잘 수양한 사람은 지극히 작아 희미하고 신묘하며 심원하면서도 팔방으로 통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깊이는 너무나도 깊어 알 수 없을 정도였다.26)
26) 마왕퇴 을본 제230행상(제15장), “古之善爲道X(者), 微眇(妙)玄達, 深不可志(識).”
이것이 곽점 갑본 제8호간에는 “ X(長)古之善X(爲)士者, 必非(微) X(妙)玄造, X(深)不可X(識)_.”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경우는 ‘무명’ 내지는 ‘중묘지문’이라고 할 때의 형이상의 도의 세계의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후자는 밝게 드러나 있어서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경우는 형이하의 만물의 세계의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그 앞에서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有名’化 즉 形而下化한 도 또한 ‘曒’ 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그 다음의 “양자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라는 문장의 의미가 통하게 된다. 즉, 여기서의 양자란 이미 언급했듯이 ‘유명’의 도와 만물을 각각 가리키고, 내용이 같다는 것은 양쪽 다 ‘曒’를 내용으로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은 형이하화한 도와 만물이 모두 중묘지문의 근원적인 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세계의 내용이 이와 같이 다르기 때문에, 이 두 세계를 파악(觀)하고자 할 때의 태도 또한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즉, 중묘지문의 근원적인 도의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恆无欲’의 태도를 취해야 하고, ‘유명’화한 도와 만물의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恆有欲’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유욕’을 말하는 이유는 앞에서 ‘유명’을 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종래와 같이 ‘欲’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27)
요컨대 원문⑪은 원문⑤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감각을 매개로 하여 ‘유명’화한 도와 만물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도가철학사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감각적 경험과 신비주의적 직관인식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제1장에 해당하는 원문⑪은 도의 존재론은 물론 본고에서 고찰한 도의 인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곽점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롭게 전개된 매우 독특한 구조와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곽점본에 제1장 에 해당하는 문장이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된다.28)
27)『노자』의 ‘欲’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논할 예정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더 이상 깊게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28) 아울러 尹振環이 마왕퇴본과 현행본의 제14장에서 도는 한편으로는 감관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유를 통하여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고, 또, 제14장과 제21장의 예를 들면서 곽점본은 도에 대하여 不可知論으로 나아가지만 마왕퇴본은 可知論으로 이끌고 있다고 하는 것도 참조.(「楚簡≪老子≫道論的主題-簡、帛≪老子≫道論比較」, 『貴州社會科學』 2001-1, 貴陽: 貴州省社會科學院,2001, 91~92쪽) 특히 마왕퇴 갑본 제118행에서 “執今之道, 以御今之有˪, 以知古始.”라고 하여 ‘古始’(시원적인 도)를 알 수 있다고 하는 점에 주의. 이때의 ‘知’는 사유를 통한 ‘知’일 것이다.
이상의 고찰에 의하면, 현행본 제52장에 해당하는 문장에서 곽점본에는 없는 ⒜가 삽입된 것은 도를 형이하의 만물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유명’화와 관련이 있고, ⒞가 삽입된 것은 ‘유명’화한 도는 만물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매개로 하여 파악할 수 있다는 감각의 부분 긍정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도의 ‘유명’화는 도의 내재화 및 편재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도의 내재화와 편재화는 앞에서 말한 ‘분열에서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철학적으로는『노자』적인 사회분업론, 정치철학적으로는 포용의 철학으로 전개되어 간다. 그것은 도가 만물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든 유용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새로운 철학이다.
만물의 유가치성이라는 이러한 새로운 철학은 인간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선한 자(善者)이든 선하지 않은 자(不善者)이든, 신실한 자(信者)이든 신실하지 않은 자(不信者)이든 모든 인간이 도를 갖고 있다는 철학으로 더욱 확장되게 된다.29)
현행본 제52장에 해당하는 원문⑤에서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은 지혜라고 한다. …… 감각의 빛을 이용하여 밝은 지혜로 돌아가면 내 몸의 재앙은 모두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항상 불변함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도는 감각을 이용하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인과 같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만이 아니라, 그러한 특별한 능력이 없는 자는 물론 선하지 않은 자나 신실하지 않은 자와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당할 위기에 있는 사람, 즉 모든 사람이 직시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와의 모순을 무릅쓰고 후대에 새롭게 삽입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29) 『노자』의 사회분업론과 포용의 철학에 관해서는 졸고, 앞의 글, 2012, 115∼124쪽 참조.
4.『荀子』와 『凡物流形』에서 ‘도’의 인식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노자』의 도가 곽점본에서 마왕퇴본 및 현행본으로 형성 전개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근본적인 의미 변화를 겪는 그 구체적인 실상을 확인하였다. 근본적인 의미 변화란 도를 ‘유명’화 함으로써 감각 부정에서 부분 긍정으로 철학이 변화하고 전개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전개는 도는 至人이나 眞人이나 聖人과 같이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알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인식에서, 후술하듯이 도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알고 실천하기 쉬운 것이라는 인식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노자』이외에 현재 남아있는 선진에서 兩漢시기의 도가 계통의 문헌, 예를 들면『장자』, 『管子』 4편, 『呂氏春秋』, 『淮南子』등과 같은 문헌에서는 도의 인식과 관련하여 감각을 긍정하는 문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들 문헌이 전래문헌이고 후대인들의 첨삭이 가해진 문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들 문헌에서 감각 부정의 전통은 줄곧 맥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점은 바로『노자』와 다른 도가 계통의 문헌들과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을 도가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먼저 외적인 면에서는 마왕퇴본이 형성되어 가던 시기, 즉 전국후기에서 前漢초기에 도가의 최대 라이벌 중의 하나였으며 이 시기 철학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순자 및 그 학파의 철학이 간접적이나마 원인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하지않았나 추측해 본다.『순자』 「解蔽」편의 다음의 문장을 보자.
"정치의 요체는 도를 아는 것에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도를 아는가? 그것은 곧 마음으로 안다. 마음은 어떻게 해서 (도를) 아는가? (마음을) 텅 비우고 집중하게 하며 고요하게 하면 된다.
…… (마음을) 텅 비우고 집중하게 하며 고요하게 하는 것을 마음이 크게 맑고 밝은 상태라고 한다.
…… (이러한 마음을 체득한 사람은) 어찌 인식에 가리어짐이 있겠는가.
…… (마음을) 도에 집중하게 하여 사물을 잘 살피고 생각하면 만물을 두루 알 수 있게 된다.
…… 그런데 이 세 가지 기술(農賈工)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세 직능을 다스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도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한다.
…… 그러므로 군자는 (마음을) 도에 집중하게 하여 사물을 잘 살피고 생각한다.30)
30)『荀子』, 「解蔽」,
“治之要在於知道. 人何以知道. 曰, 心. 心何以知. 曰, 虛壹而靜.
……虛壹而靜, 謂之大淸明.
…… 夫惡有蔽矣哉.
…… 壹於道以參稽之, 萬物可兼知也.
……有人也, 不能此三技, 而可使治三官, 曰, 精於道者也.
…… 故君子壹於道, 而以參稽物.”
이 문장에 의하면 정치의 요체는 도를 아는 데 있는데, 도는 마음을 텅 비우고(虛) 집중하게 하며(壹) 고요하게 함(靜)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를 마음이 크게 맑고 밝은 상태(大淸明)라고 하는데,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천지만물의 모든 것에 정통하게 되고, 이러한 인물에 대해서는 마음이 가리어 구애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농공상의 기술은 없지만 농공상을 다스릴 수는 있는데, 이러한 사람이 바로 순자가 말하는 군자이며 현실에서는 다름 아닌 군주이다.
순자는 도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도를 人道에 한정시키고 인도의 극치를 禮로 보고 있는 점에서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순자의 관점은 거꾸로『노자』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다음의 문장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원문⑬】나의 이론은 너무나도 알기 쉽고 너무나도 실천하기 쉽지만, 세상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한다.31)
31) 마왕퇴 갑본 제73∼74행(제70장),
“吾言甚易知也, 甚易行也. 而人莫之能知也, 而莫之能行也.”
이것은 원문①에서 “도에서 나온 말은 담박하여 아무런 맛도 없다”라고 하여 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와 같이 인식이 전환되게 된 데에는, 아마도 도가 외적인 면에서 순자의 영향이 간접적으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순자는 도는 마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고 있지는 않다. 도를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문헌은 지금까지는 없었지만, 최근에 그것을 주장하는 출토문헌이 공표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도가 계통의 문헌으로 지적되고 있는 上博楚簡 『凡物流形』이 바로 그것이다.32)
이 문헌은 천지만물의 존재와 운동 및 자연계ㆍ종교계ㆍ인간계의 모든 현상과 질서의 안정ㆍ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 근원적 실재인 ‘一’ 즉 ‘도’에 관하여 묻고 대답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일’의 인식과 관련하여 다음의 문장에서는 일 즉 도는 인간의 오감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32) 사실『범물류형』을 도가 계통의 문헌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지의 문제는 앞으로 좀 더 신중히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직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일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범물류형』을 黃老도가의 문헌으로 좁게 규정하지 않고,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도가의 한 계통으로 보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필자가『범물류형』을 도가 계통의 문헌으로 간주하는 이유는,『노자』나『장자』와 마찬가지로『범물류형』 또한 ‘一’을 만물을 존재하고 운동 변화하게 하는 궁극적 근원적 실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범물류형』에서는 ‘一’과 ‘道’를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일을 명찰할 수 있으면, 만물은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만약 일을 명찰할 수 없으면, 만물은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만약 일을 명찰하고자 한다면,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고, 고개를 숙여 그것을 헤아리면 된다. 그러나 먼 곳에서 규준을 찾을 필요는 없다. 자기 자신 안에서 그것을 생각하면 된다. 일을 얻어서 도모하는 것은 천하를 병합하여 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을 얻어서 사용하는 것은 천하를 병합하여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을 잘 지키면 하늘과 땅의 모범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은 그것을 입으로 씹으면 맛이 나고, 코로 맡으면 냄새가 나며, 두드리면 소리가 나고, 눈에 가까이 대면 볼 수 있으며, 손으로 만지면 만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손으로 쥐면 잃어버리고, 손상시키면 말라 시들고, 해치면 없
어지게 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을 잘 살펴야 하는데, 그것은 최초의 단서가 되는 것을 하나로 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33)"
33)
아울러 『범물류형』의 저본으로는 馬承源 主編, 『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七)』,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8을 이용하였다. 단, 필자가 사진 도판을 직접 보고 또 선행 연구를 참조하여 문자를 고친 부분도 많다. 그리고 『범물류형』의 이 부분에 관해서는 졸고, 「出土資料の思想編年をめぐる諸問題-上博楚簡『凡物流形』を中心にして-」, 谷中信一編, 『出土資料と漢字文化圈』, 東京: 汲古書院, 2011, 87∼89쪽 참조.
이 문장에 의하면, 도가 내적인 면에서 『노자』철학에서 감각 부정에서 부분 긍정으로의 전환에는『범물류형』과 같은 문헌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하나의 자료만 가지고『노자』철학에서 감각 부정에서 부분 긍정으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것은 아직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도가는 도를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기존의 통념을『범물류형』의 출토로 재고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것을 계기로『노자』철학에도 감각 부정뿐 아니라 부분 긍정의 철학이 있다는 것이 재조명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5. 소결
이렇게 본다면 존재론에서 도의 내재화와 편재화 및 도의 인식에서 감각의 부분 긍정은『노자』내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된 변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사회정치적 배경은 무엇인가? 『노자』내에서 철학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 즉 전국후기에서 말기34)라는 시기에 일어난 사회정치적 변화 중 가장 큰 것 을 들자면, 역시 秦에 의한 육국의 멸망과 천하 통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패러다임에도 큰 변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분열에서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국후기에서 말기에 걸쳐 천하 통일이 가시화되면서 앞으로 도래하게 될 새로운 통일 세계의 정치질서를 어떻게 구상해야 하는가라는 현실적 고민이 제자백가 철학자들에게 풀어야 할 철학적 과제로 주어지게 된다.35) 예를 들면 유가에서는 『순자』 「非十二子」편ㆍ「解蔽」편, 도가에서는『장자』 「天下」편, 그밖에 『呂氏春秋』와『淮南子』등과 같이 각자의 입장에서 諸家를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나타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와 같이 새롭게 떠오른 현실적 과제에 대하여 마왕퇴본에서 그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사회철학적으로는 사회분업론, 정치철학적으로는 포용의 철학이었으며, 이것을 주창함으로서 분열된 사회를 통합 쪽으로 이끌어 가려고 했을 것이다.
34) 물론 마왕퇴본은 漢高祖에서 文帝시기의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전한초기까지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35) 彭浩는 백서본이 형성되었을 때『노자』가 크게 변동되고 정리되었다고 하면서, 백서본의 출현은 150여년의 발전을 거치면서『노자』가 나날이 성숙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동력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제기된 해결해야 할 많은 긴요한 문제들에서 나왔다고 지적한다(「郭店一號墓的年代與簡本≪老子≫的結構」,『道家文化硏究』 17, 北京: 三聯書店, 1999, 20∼21쪽).
彭浩는 철학 내용의 변화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고, 또 곽점 1호묘의 연대 판정에 관해서도 필자와 견해를 달리 하지만, 그의 이러한 관점만은 필자가『노자』를 바라보는 관점과 기본적으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원문④에서 도를 ‘상제보다 더 오래전의 조상’이라고 새롭게 규정한 것은 ‘분열에서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도를 상제보다 더 오래전의 조상으로 규정하면 고대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신인 상제보다 도가 더 근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곧 상제와 관련된 전통 신앙은 물론 그와 관련된 철학‧정치‧제도 등이 모두『노자』적인 도 아래에 포섭되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상제와 관련된 모든 신앙‧철학‧정치‧제도의『노자』적 ‘도’ 아래에서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정치철학은 도는 만물로부터 독립해 있고 초월해 있으며 감각이나 사유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하는 종래의 존재론과 인식론만으로는 구현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 하면 종래의 존재론에
서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고, 종래의 인식론에서는 도는 성인과 같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만이 체득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 예를 들면 不善人(다른 말로 不善者‧不信者‧無德)과 같은 자는 자연히 도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자의 실질적 설득 대상인 侯王과 같은 현실의 통치자들에게도 도는 파악하기 어렵다는 종래의 신비주의적 관점보다는 도는 파악하기 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공감을 얻기 쉬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 대안으로 새롭게 고안해낸 것이 도의 내재화와 편재화 및 감각의 부분 긍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문제는『노자』철학의 형성 전개와 관련된 논의를 앞으로 수차례에 걸쳐 다각적으로 분석한 후 다시 한 번 고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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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2. 11. 7 심사일: 2012. 12. 3 게재확정일: 2012. 12. 7
Epistemological Analysis of Dao (道: Way)
: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Laozi(老子) Philosophy Viewed through Traditional Literature and Excavated Literature Ⅱ
Yi, Seung-Ryul*
From a perspective of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philosophy, the transformation stage of Laozi (老子) starting from the stage of Guodian (郭店) Laozi during the Age of Wars to the Mawangdui (馬王堆) Laozi in the Han (漢) dynasty, to the current text stage over several centuries has brought fundamental changes in philosophical ideas. This study will examine this issue in the perspective of the epistemological analysis of Dao, where changes also exist in such recognition. In the Guodian Laozi, it is stated that Dao cannot be recognized with human senses; therefore, the effects of recognition as well as all intellectual perceptions of language must be blocked. Thus, the perception becomes unified with the world of Wanwu qi tong (萬物齊同: the thought of all things being the same), a world in the preliminary stage before being segmented with senses and reasons. Seen from this perspective, the epistemology of Guodian Laozi can be defined as a type of mysticism or a mystical intuitive cognition. This concept changes into one that uses senses in order to understand Dao during the stage of Mawangdui Laozi and current text.
This transformation is deeply related to the changes in ontology, which alters from the perception that Dao transcends all universal matters to the perception that Dao is immanent in all things. Therefore, the epistemology in the Mawangdui Laozi and current text acknowledges both sensual experiences and mystical intuitive cognition. It is assumed that the reasons behind changes in the recognition of Dao within Laozi has been influenced both directly and indirectly by works such as Xunzi (荀子) which suggests that Dao can be understood through mind meditation, and the Fan wu liu xing (凡物流形) which asserts that Dao can be understood through senses. Such changes and development concerning the recognition of Dao has lead to the conceptual changes, which has transformed from the perception of Dao being a difficult concept to practice and only open to those with special capabilities, to one that asserts Dao being a concept that everyone can practice by putting their mind to it.
Key Words: Laozi, Guodian Laozi, Mawangdui Laozi, Current Text, Dao, Recognition, Xunzi, Fan wu liu xing
* Research Professor of the Foundation Academic Platonica,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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