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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우 드림
慕夏堂 金忠善(사야가) 陰宅의 風水地理 硏究
沈 鳳 燮
嶺南大學校 環境保健大學院
環境設計學科 風水地理專攻
指導敎授 朴贊龍 · 金其仙
要 約
조선시대에 풍수지리사상은 전통사상이자 민간신앙으로 자리하며, 이와 관련한 수많은 史實·事件·說話 등이 전해오고 있다. 이 가운데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의 慕夏堂 金忠善장군의 陰宅과 관련한 기록은 주목된다. 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일본인(沙也可sayaga)의 신분으로 현재까지‘偉大한 平和論者’와 ‘天下의 賣國奴’로 평가되며, 한·일 양국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김충선의 행적을 연구한다. 또한 ‘明堂’으로 회자되고 있는 公의 陰宅을 점혈한 사람은 누구이며, 과연 명당인지를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해보고자 한다. 과연 발복하여 후손이 부귀영화를 누렸는지를 조사·분석해 보고자 한다.
김충선(1571~ 1642)은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 勃發 당시 가등청정의 선봉장으로 종군한 일본군인 사야가(김충선)이다. 당시 <軍令>이나 4월15일의 <曉諭文>에서 ‘조선을 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4월20일 경상좌영의 병마사 박진에게 강화를 요청하며 귀화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어 귀화 이후 공의 업적과 생애를 살펴본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귀화할 때부터 1642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50년간의 생애는 격동의 조선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위기상황이었다. 公은 귀화이후 생애의 절반을 조선군으로 戰場에서 맹위를 떨치면서 6차례나 出陣하였다.
1차 출진은 1592년(선조 25년) 귀화한 직후부터 종군한다. 이 당시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성명을 하사받고 가선대부에 봉해진다. 2차 출진은 1597년(선조 30년) 丁酉再亂이 발발하자, 또다시 전장에서 보내니 1차이래 8餘年의 참전이었다. 3차 출진은 1603년(선조 36년) 압록강변경지대에 만주족이 자주 침노하자, 從軍을 自願하면서 10년간이나 방어하였다. 광해군은 그 공을 치하하며 1613년(광해군 5년) 정2품 正憲大夫에 봉한다. 4차 출진은 1624년(인조 2년)에 李括의 反亂이 일어나자, 그 잔당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받들어 서아지 일당을 토벌하였다. 이때 지급한 賜牌地를 수어청의 둔전으로 반납하기도 한다. 5차 출진은 1627년(인조 5년) 丁卯胡亂이 발발하자 복명하며 후금을 격퇴한다. 6차 출진은 1636년(인조 14년)에 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자원해서 광주전투에 참전하고, 국왕을 호위하고자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이러한 6차례의 출진 가운데 특히 임진왜란·이괄의 난·병자호란 당시의 혁혁한 공으로 이른바 三亂功臣이라 불리우고 있다.
한편 공은 임진왜란후 우록동에 은둔하면서 향촌교화와 자손의 훈육 등 당시 조선인 지배층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였다. 귀화 동기에서도“중화의 문물과 그 문물을 따르고 있는 조선의 문화를 흠모”한다고 한 것에서도 문화적인 소양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公이 남긴 家訓과 鄕約을 보면 降倭의 신분임을 자손들에게 누누이 설명하면서 겸손하고 勤勉·誠實한 생활, 王朝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가족간의 화합, 이웃간의 和合과 協同 특히 농사나 재난시 相好協力을 강조하고 있어 공의 사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처럼 김충선은 조선의 군인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남겼고, 한편으로는 유학자로서 향촌에 은거하며 자손의 훈육과 향촌교화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괄목할만한 功績에도 불구하고, 항왜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오래도록 공로가 外面되다가 드디어 정조18년(1794년)에 공의 은거지인 우록동의 녹동서원에 봉안하기에 이른다.
김충선의 음택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삼정산 기슭에 자리하는데, 自卜地로 전해온다. 당시는 戰時에 장군들이 風水人들을 대동하기도 하고, 이들의 조언을 받아 陣을 치기도 하던 시기이다. 또한 우록동을 중심으로 모명 두사충, 백록당 우성범 등 풍수인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공이 長子 경원에게 身後之地를 정하고 “6대 후에는 반드시 발복이 있다”고 예언했는데, 그 후 2세손에서 10세손까지 立身揚名하여 官爵에 오른 이가 50명에 이르니 풍수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공의 음택이 있는 삼정산은 백두대간의 매봉산에서 낙동정맥으로 내려와 사룡산에서 다시 분맥하여, 구룡산·발백산·선의산·남성현재·상원산·삼성산·통점령·헐티재·비슬산으로 이어지는 비슬지맥에 위치한다. 이 가운데 용맥이 상원산에서 삼성산으로 흘러 삼정산의 봉우리 3개를 거치면서 강한 巖石突出入首를 통하여 혈로 들어가는 것이 뚜렷하다. 삼정산은 一字文星이고, 사신사가 端正·秀麗하게 均衡을 잘 이루고 있어 正中에 貴한 혈이 형성된 것이다. 전순 앞에는 혈을 보호하는 넓은 지각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현릉사가 혈을 감싸고 左靑龍과 右白虎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張口窩穴에 위치한다. 황학산과 치령산 줄기인 서계천과 동계천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다시 석계천에서 우미산에서 흐르는 물과 합류하여 음택지 앞에서 西出東流하다가 ,삼산리에서 팔조령에 흐르는 계곡과 만나 신천에서 南出北流한다. 비슬지맥의 高峰을 되돌아보는 回龍顧祖形이며, 左旋하여 내려앉은 맥이 壬子配合으로 入首되어 壬坐丙向을 하였다.
음택의 좌향을 삼합법으로 분석해보면 공을 안장한 해는 1643년이며 坐向은 壬坐丙向, 득파는 丁未乙辰이다. 山水向向發微로 본다면 이 좌향에 右水 乙辰破는 流破冠帶로서 불길한 좌향이나, 壬子入首로 본다면 生龍이며, 丁未得水는 衰水로서 大吉하다고 하겠다.
현공풍수적 입장에서 <三元九運年限表>에 의하면 1643년 1월(인조21년)에 安葬하였으니, 1643년은 7기운 (1624-1643)에 속하며 壬坐丙向 下卦는 7기운에 해당한다. 이는 雙星會向이므로 背山臨水 形局에서는 財丁이 모두 번창하므로 공의 음택 발복이 빠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상의 연구결과 김충선은 귀화후 50여년간의 생애를 전장의 장군으로, 향촌에 은거하는 유학자로 애국 애민하는 삶을 살아갔다. 삼정산 음택은 공의 자복지로 생룡의 용맥에 위치하며 일자문성을 이룬다. 서출동류로 弓水를 띠고 있는 회룡고조 형국이며 임좌병향이다. 장구와혈로 명당국을 이루고 있어 후손들에게 크게 발복한 것을 알 수 있다.
‘三代가 積善하고 積德해야 명당을 얻을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장수가 어떻게 이같은 명당에 들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공은 전쟁을 가급적 피하였으며 인명을 가볍게 다루지 않았으며 전쟁 속에서도 다수 국민을 위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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