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35] 경주 낭산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54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35] 경주 낭산

경주(慶州)에는 명산이 많다. 해돋이 장관을 볼 수 있는 토함산(吐含山) 이있는가 하면, 산 전체가 노천 불교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남산(南山 혹은 金鰲山)이 있다.

그러나 알고보면 낭산(狼山)도 그들 산에 못지않은 명산이다. 낭산이 일 찍이 신라 왕도(王都) 경주 주위로 설정된 삼산(三山.경주의 낭산, 영천의 금강산, 청도의 오례산) 오악(五岳.동악 토함산, 서악 선도산, 남악 남산, 북악 금강산, 중악 낭산) 중에서도 가장 중심되는 산으로 인식돼 온 까 닭도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해발 101m에 불과한 낭산이 경주를 진호하는 진산(鎭山)으로 받들어진데서 우리는 그 산이 지닌 역사지리적인 중량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그 산의 내력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땅 관념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풍수와 하나로 어우러져 왔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속속들이 담겨 있다.

비록 풍수라는 용어 자체는 중국으로부터 도입됐을지언정, 풍수적인 사 유(思惟)를 우리 한민족이 지녔던 전통적인 자연관이자 토지관이라 정의( 定義)한다면, 그런 우리 고유의 토지 관념과 풍수사(史)의 흐름을 한 장소 에서 읽어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낭산인 것이다.

낭산은 경주 시내를 벗어나 불국사로 가는 7번 국도변의 너른 들판 위에 자리잡고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낭(狼)이라는 한자어가 쓰인 까닭을 두고, 혹자는 그 지세가 마치 들판을 질주하는 이리와 흡사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오해할는지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남산 동북쪽 기슭에 있는 보리사(菩提寺) 뒷 산봉우리에 올라 낭산을 내려다 보면 그 산의 형상이 이리를 빼닮은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중대한 오해다.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華川郡)을 같은 신라때에 낭천군(狼川郡)이라 부 른 것을 보면 '낭'의 자의(字意)가 결코 '이리'를 뜻하는 것으로 통일돼 사용된 것 같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그런 풍수적인 형국론은 한참 후대에나 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때문이다.

낭산이라는 산이름은 오히려 소박한 천문오행지리(天文五行地理)와 관련 돼 있는 듯하다. 즉 동쪽 하늘의 낭성(狼星)을 그 당시 반월성 동쪽에 위 치한 땅 위의 산에 비정(比定)하다 보니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 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낭산은 곧 동산(東山)의 의미를 띠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이름이야 어찌됐든 낭산은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12년(413)에 소위 서라벌의 성산(聖山)으로서의 공고한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 사기'에 기록돼 있는 바, "낭산에 누각처럼 생긴 구름이 떠올라 아름다운 향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왕(실성왕)이 이르기 를, 이는 반드시 선령(仙靈)이 하늘에서 내려와 놂이니 그 땅이 복지 (福 地)가 틀림없으므로 그로부터 그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 다.

그 유명한 낭산 신유림(神遊林 혹은 奈林)의 형성배경과 그 보전에 얽힌 전설같은 실제 얘기이다. 하기야 그 이전부터 이미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를 간직한 나정(蘿井)숲,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와 관 련된 시림(始林 혹은 鳩林, 鷄林), 신라 최초의 가람인 흥륜사가 있었던 천경림(天鏡林) 등, 그 당시 경주 일원의 숲이란 숲은 거의 모두 신림(神 林)으로 여겨져 왔으니 낭산 숲이 새로운 신유림으로 추가되었다한들 그것 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그러나 647년에 그 산 남쪽 정상부에 선덕여왕릉이 들어서고, 또한 그로 부터 30여년후인 문무왕 19년(679)에 왕릉 들목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 寺)가 세워지면서 낭산은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된다. 그 산이 더 이상 애 니미즘적 경외 대상물이 아닌 불교적 도리천(도利天)세계로 관념화된 것이 다. '삼국유사'의 관련 내용을 보자면, 그것은 순전히 현세의 낭산을 내세 의 수미산(須彌山)으로 상정한 선덕여왕의 불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듯하 다.

여왕은 자신이 죽은 후에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 줄 것을 유언하면서, 그 도리천으로 낭산 남쪽을 지목하였는데, 후일 능묘 아래쪽에 사천왕사가 세 워지고 보니, 능묘 터가 곧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과 진배없게 되었다는 것이다.불경(佛經)에 이르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 고 했으니, 사천왕사가 본디 선덕여왕릉과무관하게 오로지 삼국통일 후 에 불력으로 외침세력을 막아내기 위해 창건된 호국사찰이었든 아니든, 신 라 사람들은 낭산 남쪽 자락 위아래로 나란히 들어선 그 둘의 관계를 당연 히 그런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으리라.

더구나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을 다스린다는 제석천(帝釋天)은 선견성( 善見城)의 주인으로서 대위덕(大威德)을 갖고 있다 하였으니, 선덕이라는 시호(諡號) 또한 그런 관념상의 불계(佛界)와 연관돼 있는 게 틀림없지 않 은가.

현대의 어떤 역사학자는 낭산 주변 평야지대에 위치한 여타의 능들과 달 리 선덕여왕릉이 산위에 터잡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 터를 정할 때 풍수를 고려하였으며, 또한 그곳은 어느 모로 보나 명당이 틀림없다고 주 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선덕여왕릉보다 150여년 후인 798년에 곡사(鵠寺 혹은 崇福寺)라는 절자 리에 원성왕릉을 마련할때 최치원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숭복사비문(碑文) 에도, "불법(佛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장례에는 한창 때가 있으니,땅 을 바꾸어 자리함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다만 청오자(靑烏子: 중국 한(漢)나라 때의 풍수사)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 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도록 하겠는가"라고 하여, 그때까지도 신라에 풍수 술에 정통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거니와, 선덕여왕릉터 를 실제 답사해봐도 풍수의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규국(規局: 좌우로 산 줄기가 에워쌈)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능묘는 풍수와 관계없이 오 로지 불교적 세계관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봐야 옳은 것이다.

사천왕사터만 해도 그렇다. 아마도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신유림이라는 성소성(聖所性)을 높이 평가하여 그곳을 호국사찰터로 점정한 것 같지만, 뒤쪽을 제외한 세 방면이 모두 훤한 들판으로 트여 있어 풍수적으로는 결 코 좋은 터라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참으로 묘하게도 오늘날의 필자 역시 낭산의 바로 그런 성소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후대에 와서, 경주 도성 일대를 하나의 거대한 가람 명당이라 치면 지금 의 외동읍 입실(入室)마을이 일주문이고, 사천왕사터는 곧 사천왕문에 해 당하는 주요 지점이라는 이색적인 풍수설이 덧붙여지고, 또한 토함산과 명 활산을 조종(祖宗)으로 하는 낭산이 경주 고을의 진산으로 설정됐던 것도 모두 그 산이 지닌 그런 역사적인 성소성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익 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막말로 낭산에 풍수적인 명당이 없다한들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신라 태고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낭산이 눈이 시리도록 푸르름을 유지 하고 있는 것만 해도 우리들에게는 큰 행복인 것을. 아! 정녕 그것은 풍수 의 도(道)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분명 이 나라 몇 대(大) 명당이니, 명혈 (名穴)이니 하면서 그 어줍은 안목으로 땅을 함부로 차별화하는 행태를 넘 어선, 땅 자체의 생명력을 직관(直觀)할 때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풍수 본연의 세계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낭산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각별한 지리적 인 교훈을 전해 주고 있는 명산이다. 물론 낭산이 신유림, 도리천, 진산, 그린벨트 중의 그 어떤 관념으로 보호되든 간에 산만 건강하다면야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낭산은 군데군데 생채기 투성이다.

일제시대때 부설된 동해남부선 철로가 옛 사천왕사터를 두 동강이 내고 있음은 물론, 그 유명했던 절터 주변의 신유림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게 다가 해가 다르게 산자락을 따라 늘어나고 있는 분묘들은 또 어찌된 일인 가. 우리는 아직도 낭산이 전하고 있는 선조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다. "역사 없는 지리는 활동 능력이 없는 해골과 같고, 지 리 없는 역사는 거처(居處) 없는 부랑자와 같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낭 산에 함축돼 있는 역사지리적인 교훈과 환경이용 지혜를 현대적인 감각으 로 재(再)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국토의 바람직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낭산의 아픔은 지금의 이 나라 땅이 앓고 있는 총체적인 아픔에 비하면 그야말로 생채기에 불과하다. 천수백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날 우 리들의 토지관에 경종을 울려 주고 있는 산, 그 산이 바로 옛 신라인들이 마음으로 흠모했던 낭산인 것이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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