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31-32] 해인사 터 (상-하)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54

2004-02-09 입력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31] 해인사 터 (상)

이 땅에서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가 갖는 명소(名所)적 위상은 실로 대단하다. 가람 길목을 따라 펼쳐지는 홍류동(紅流洞) 십리계곡의 풍 광도 무척 아름답거니와 예로부터 해인사는 불(佛).법(法).승(僧)의 3보사 찰 가운데 법보종찰(法寶宗刹)로서, 또한 해동제일 도량으로서 이 나라 안 의 그 어떤 가람보다도 위명(威名)을 떨쳐왔다. 그렇다면 해인사가 그런 명성을 얻게 된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풍수지리 때문이다.

그것은 해인사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명당에 터잡았기 때문에 그 발복으로 그만큼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해인사는 결코 판에 박은 듯한 명당 지세에 터잡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절터에는 필자가 가히 이 땅의 풍수답사 일번지로 꼽을 정도의 심오한 풍 수성이 함축돼 있다. 대저 풍수답사 일번지라면 적어도 그 터를 통하여 이 나라 풍수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할 수 있되, 거기에다 미래의 풍수좌표를 예측, 설정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장소라야 제격이다. 이를테면 그 일번지 를 통하여 전통 풍수의 허와 실을 제대로 진단하고,

또한 작금의 과학 대(對) 미신 풍수논쟁을 비교 검증할 수 있으며, 앞으 로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풍수행태(行態)까지도 미리 엿볼 수 있어 야 한다는 것이다. 해인사터가 바로 그런 장소다. 그 터는 한마디로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살아숨쉬고 있는 풍수 박물관이다. 그 터에는 초보적 인 풍수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범인(凡人)은 쉽게 깨달을 수 없는 명당 넘 어의 풍수세계까지 담겨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닌 줄 알지만, 요컨대 풍수술법에만 얽매여 터를 판별 해 나가는 것을 점오(漸悟)라 할 때, 그런 단계를 뛰어넘어 단번에 풍수 돈오(頓悟)의 세계를 깨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해인사터인 것이다.

해인사터는 가람이 들어앉은 위치에서부터 벌써 합리성이 느껴진다. 가 야산의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두리봉, 깃대봉, 단지봉, 남산제일봉과 같은 1천m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C자형의 주릉을 이루면서 그 안쪽으로 여 러 갈래의 좁고 긴 골짜기들을 형성해 놓았는데, 대가람이 들어설만한 터 로는 사실 그곳 외에는 눈을 닦고 살펴봐도 없다.

모름지기 시내가깊고 골짝이 좁은 산간지대에서는 계곡 바닥으로부터 일 정한 높이로 올라선 지점만이 터다운 터라 할 수 있는 즉, 그것은 그런 곳 만이 가까이 솟은 산의 능압(凌壓)을 피하는 동시에 시계(視界)를 확보할 수 있고, 또한 갑작스레 불어난 계곡물이 가져올 수재(水災)도 면하고, 시 끄러운 물소리, 즉 풍수비수(悲愁)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해 인사터는 산간지대의 그같은 모든 입지요건을 훌륭히 충족시키고 있다.사 찰 경내에서 앞쪽(남서쪽)을 한번 바라보라. 주산(主山) 주맥(主脈)의 자 연 지세향(地勢向)을 십분 반영하려 들다보니 안산(案山)을 이루는 비봉산 이 바로 코앞에 위치하게 되었지만 안대(案對)를 그 산 사면의 6-7부 높이 에 맞추어서 크게 갑갑하지가 않다.

오히려 비봉산과 그 뒤쪽 너머 골짜기로 아득히 중첩되어 펼쳐지는 둥근 봉우리들이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문제는 정남쪽으로 겹쳐 보이는 오봉산과 남산제일봉, 그리고 매화산이다. 그 산들은 높아도 역시 너무 높다. 저절로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다. 그러나 어찌하랴. 해인사의 옛 현인들은 바로 그런 산의 모습을 통하여 "도(道)는 어제보다 깊으나 오 늘보는 앞산은 더욱 첩첩할 따름이다"라고 되뇌이곤 했다 하니 그것은 분 명 명당 넘어의 풍수세계가 다름아니다. 아! 정녕 그같이 모든 사람들의 심상(心相)이 지상(地相)을 초월할 수만 있다면 해인사터의 종산(宗山)은 가야산 상왕봉이고, 그곳으로부터 돌불꽃을 이루며 남쪽으로 이어져 내려 온 석화성(石火星) 끝의 환적대(幻寂臺)는 주산(主山)이며, 또 거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던 지맥이 두 팔을 벌리니 그 가운데,향로봉에서 길상탑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좌청룡이 되고, 학사대에서 일주문쪽으로 굽 어내려오는 재맥은 우백호가 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풍수세계에 비하면 필자의 땅을 보는 능력은 아직 까지도 치졸하기 그지없으니 심히 안타깝고도 부끄러울 따름이다.

각설하고 이제 그만 사람들이 해인사터를 얘기할 때 가장 많이 입에 올 리는 형국론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해인사터는 마치 커다란 배(舟)가 바 다로 나가고 있는 듯한, 이른바 행주형(行舟形)의 길지로 널리 알려져 있 다. 하기야 해인사 배치 도면만 봐도 일주문에서 봉황문, 그리고 해탈문까 지가 뾰족한 이물(뱃머리)을 이루고, 장경각 판고(板庫)쪽이 고물(船尾)을 이루어 가람 전체의 모양새가 배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더 구나 가야산 극락골 중턱에 있는 마애불이 이 해인사라는 배를 잘 가게 하 는 도사공(都沙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의미부여되고 있으니, 그것 은 '진리의 바다에 비친 삼라만상의 참모습'이라는 뜻의 해인(海印)과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

어디 그뿐인가. 원래는 장경각 뒤쪽에 자연석의 돛대바위가 이십여척 높 이로 우뚝 솟아 있었으나 해인사에 자꾸 풍파가 이는 것을 그탓으로 돌려 어느 땐가 그것을 전부 잘라 대적광전의 석축을 쌓은데 사용해 버린 적이 있는데, 지금은 또 그 자리에 수미정상탑(須彌頂上塔)이라는 인공돛대를 재조성해 놓았으니 그야말로 해인사터는 행주형의 지세로서는 갖출 것은 모두 다 갖춘 셈이다. 해인사의 스님들이, 바야흐로 출발하려는 배에 사람 과 재화가 풍성히 모이는 격이라는 행주형 터의 소응(所應)을 염원하면서 그런 풍수 비보물(裨補物)을 설치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스님들 의 바로 그 행주형 절터 관념이 나락에 빠질 뻔했던 해인사를 구제한 사실 은 풍수의 진정한 덕목이 지인합일(地人合一)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 혀주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1970년대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은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을 영구히 보존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 대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새 장경판고를 지하1층, 지상1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짓는다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더구나 그 건 물을 지금의 장경각이 있는 자리 바로 위쪽에다 지으려드니 어찌 해인사 스님들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보고만 있었겠는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행주형의 터에 지하시설물을 만든다는 것은 곧 배 밑바닥이 뚫려 배가 침몰된다는 것을 의미하니 결사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뻔한 일이다.

스님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몸으로 건설 중장비를 막는 사태까지 일어 난 연후에야 비로소 새 건물을 지을 터가 확정되었는데, 그때 지어진 신 대장경판고가 곧 해인사 동남쪽 능선 너머에 있는, 현재 선원(禪院)으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혹자는 스님들의 그런 행태를 이 과학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심히 부끄 러울 일로 여길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최 신 기술을 다 동원해서 지었다는 새 건물벽에 벌써부터 이슬이 맺히는 등 온갖 하자가 발생하고 있으니 만약 행주형 터를 지키려는 스님들의 고집이 없었던들 장경각 판고와 팔만대장경은 지금처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 는 영예를 누려보지도 못했을 지 모를 일이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경각 판고는 사실 그 터 자체 하나만 해도 엄청 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행주형이라는 풍수형식이 장경각 터의 풍수내용을 살렸는가, 아니면 장경각 터의 풍수비밀이 행주형이라는 풍수전통을 살렸는가를 궁금해 하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짓이다.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切卽一)"라는 화엄 (華嚴)정신을 깨닫지 않고서는 해인사 가람에 내재돼 있는 풍수성을 결코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까닭이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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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일의 신풍수기행 . 32] 해인사터 (하)

해인사터를 풍수경관(景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비단 행주형(行舟形) 이라는 지리 물형론(物形論 혹은 形局論)에 한하지 않는다. 물론 가람의 전체적인 윤곽에 초점을 맞추어 그 터를 행주형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전(殿)과 각(閣), 그리고 문(門)과 같은 가람 구성요소들의 상대적인 위치 나 혹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 영역들을 구별해봄으로써 얼마든지 또다 른 풍수세계의 멋을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해인사터에는 일주문(一柱門 )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고, 수미정상탑(須彌頂上塔)이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다. 해인사 가람에 상징적으로 의미 부여돼 있는 불교적 수미산 세계를 영역별로 이해해 보기 위해서는 낮은 데서 높은 쪽으로, 그리고 가 람 배치를 혈(穴)이나 사(砂)와 같은 각종 풍수 개념으로 이해해 보려면 높은 데서 낮은 쪽으로 진행하면서 그 공간적인 구조물들을 주의깊게 살펴 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여느 산지가람과 마찬가지로 해인사는 수미산 산문(山門)격인 일주문이 그 첫 번째 관문을 이루고 있다. 좌우로 한 개씩의 기둥만 세워져 있는 데 서 일주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하지만, 범어사나 통도사와 같이 간혹 4개의 기둥으로 된 일주문도 있고 보면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은 속세의 인 간세계와 탈속의 불교적 성역을 경계(境界)짓고 있는 그 문의 상징적 의미 일 듯 싶다. 수미산의 동서남북을 관장한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모셔 져 있는 봉황문(혹은 사천왕문)에 이르면 이미 그 때부터는 하늘세계(天上 界)의 하단에 발을 들여놓는 셈이 된다. 그 곳으로부터 세 번째 문인 해탈 문(혹은 不二門)을 지나 구광루(九光樓)를 벗어나면 화엄의 주존인 비로자 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여느 가람 같으면 대웅전에 해당하는 이 대적광전이 수미산 세계의 최상단에 위치하 는 것으로 이해되겠지만 해인사의 경우는 그 예외다. 장경각 판고(板庫)가 그 건물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판고 뒷담 너머 더 높은 데에 수미정상탑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 지나 형식적인 상징물일 뿐, 해인사 경내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은 바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판고다. 마치 부처님이 불법(佛法)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 그같은 가람 배치에서 우리는 법보종찰로서의 해인사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공간 품격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수미정상탑으로부터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는 풍수원리에 따라 조영(造營) 돼 있는 가람구조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수미정상탑 우측 산 록에서 가람 전체를 한번 내려다보라. 주산인 환적대와 안산인 비봉산, 그 리고 좌청룡의 향로봉 줄기와 우백호의 학사대쪽 지맥이 자연지세의 풍수 국(局)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그 안쪽으로 사찰 전역이 또 하나의 인공적 인 풍수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맥이 두두룩하게 솟 아 있는 수미정상탑 자리는 곧 주산의 정기가 혈처(穴處)로 들어오는 입수 (入首)지점이며, 그곳과 대적광전 사이에 위치한 장경각 판고 자리는 사람 으로 치면 머리 부분과 같은 두뇌(頭腦)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해인사터의 땅 기운이 응집돼 있는 혈처는 물론 대적광전 자리다. 그리고 그곳에서 앞 쪽을 바라볼 때, 왼편의 관음전쪽 건물과 남동쪽 담장이 각각 내청룡과 외 청룡에 해당하고, 오른편의 궁현당쪽 건물과 북서쪽 담장은 각각 내백호와 외백호에 해당한다. 또한 대적광전과 그 안산을 이루는 구광루 사이의 3층 석탑이 있는 뜰이 내명당이라면, 안산인 구광루와 조산(朝山)인 봉황문 사 이의 뜰이 곧 외명당이 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신사론(四神砂論)에 입각하여 해인사터를 주변의 자연지세와 동형반복(同型反復)적으로 이해하 려 드는 것은 사실상 그 터의 풍수비밀을 밝히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가람 배치와 그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그런 방법이 더 유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필자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해인사 터의 본색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찌보면 관념적 유희와도 같은 그런 형상론(形相論)으로부터는 최소한 벗어나야 한다. 그 터의 비밀을 푸 는 열쇠가 그같은 가람구조에 있기도만무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장경각 판 고와 같은 건물은 그 터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 설계까지도 모두 다 기(氣)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조영돼 있기 때문이다.

가람터를 위해 해인사의 스님들이 옛날부터 기의 관점에서 행해 온 한 가지 행태가 있다. 매년 단오때 가람 정남쪽으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남산 제일봉 꼭대기에 소금단지를 묻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유인 즉 절 집을 내려다보고있는 그 산세가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화성산형(火星山形) 이기 때문에 화기(火氣)가 뻗쳐들어 해인사가 창건이후 무려 일곱 번이나 큰 화재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년중 염도가 가장 강한 시기인 단 오때 바닷물을 상징하는 소금을 이용하여 그 화기를 한번 눌러보겠다는 의 도인데, 그것을 풍수용어로 압승(壓勝) 혹은 염승(厭勝)이라고 한다. 해인 사의 모든 스님들이 잡인의 출입을 금한 채 새벽부터 정성을 다해 참여하 는 그 의례적인 행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실로 엄숙하다 못해 경건한 마음 마저 들게 한다. 알고보면 그같은 공동체적인 환경행위는 사람들에게 봄철 의 건조한 날씨에 발생할 수 있는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준다는 점 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물론 남산 제일봉의 화기가 직접적으로 해인사에 화재를 불러일으킨 것 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야산 골짜기가 매우 깊으며, 또한 해 인사가 해발 700m 높이의 산사면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 가 있다. 그곳은 산정부와 계곡 바닥간의 큰 기압차로 인해 밤낮으로 번갈 아 불어 오르내리는 산풍과 곡풍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는 지점이다. 아닌게 아니라 오후 2시쯤에 사진촬영을 위해 학사대쪽에 서있는데, 골짝 저 밑으로부터 불어오는 강풍이 나지막한 우백호 지맥위를 지나면서 뽀얀 먼지를 싣고 장경각 판고쪽을 향해 나아가다가 잦아진다. 카메라를 쥔 손 이 얼 지경인데도 필자는 그곳에서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그 광경에만 몰 두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필자는 과거에 대적광전에 화재가 일 어났던 이유도, 또 장경각 판고안이 팔만대장경 목판이 반천년이 넘는 세 월동안 변하지 않고 잘 보존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도 모두 그 바람 때문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바람일지라도 한쪽에 대해서는 나쁘게 작 용하고, 또 다른 한쪽에 대해서는 좋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니, 그 또한 장 풍(藏風) 위주의 상식적인 명당관념을 뛰어넘는 명당 너머 풍수세계가 아 니고 무엇이랴.

수다라장(脩多羅藏)과 법보전, 그리고 동.서 사간고(寺刊庫)로 이루어져 있는 장경각 판고는 통풍이 잘 되도록 앞.뒷면 살창 크기를 다르게 설계했 을 뿐만 아니라 천장도 반자가 없이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으로 그대로 두었다. 게다가 소금물에 담갔던 자작나무에 경문을 새긴 후 그 위에 옻칠 을 하여 벌레의 범접을 막고, 또한 경판고 바닥 1m 깊이에 숯과 소금, 횟 가루와 모래 등을 섞어 묻어 자연적으로 습기를 흡수하고 내뱉도록 함으로 써 그만큼 경판이 갈라지고 부패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예 로부터 "풍수적으로 완전무결한 터는 없다"는 말이 전해오기는 하지만, 이 장경각 판고 터만큼 일찍이 우리 조상들의 빼어난 기(氣)풍수론적 감지력 과 그 지극한 보살핌이 있었던 터도 아마 드물 것이다. 추운 날씨인데도 몇몇 스님들이 경판고를 순찰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바 람도, 판고도, 스님들도 모두 다 팔만대장경을 중심으로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듯하다. 하기야 가야산의 팔다리를 자르면서 새 도로를 내려하고, 또 그 가슴을 파헤치며 골프장을 만들려 할 때, 법회를 열면서까지 늘 한 몸 체로 여겨온 영산 가야산을 지켜낸 해인사의 스님들이 아니었던가. 불현듯 바로 그런 모든 모습들이 화엄(華嚴)에서 말하는 '하나(一)'의 세계가 아 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한 번은 해 인사를 다녀옴직하다. 풍수답사라도 좋고, 건축기행이라도 좋고, 종교답사 라도 좋다. 다만 그 어떤 세계이든 해인사 터에 함축돼 있는 그만한 가르 침만 깨치고 돌아오면 될 일이다.

a href='mailto:zone5@yeongnam.com'/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ap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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