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風水의 紀元
1. 解釋的 紀元
風水地理說은 우리 民族의 基層的 思想體系를 이루어 온 수많은 思想들 중의 하나로, 그 내용의 聖俗이나 眞假를 막론하고 新羅를 以後의 歷史上 우리 民族에 깊은 영향을 미친 權能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 많은 歷史的인 배경에 비추어 보면 위의 말들은 風水地理說이 우리역사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地理學, 歷史學, 哲學, 建築學, 文化人類學, 民俗學, 環境學 혹은 韓國的 等의 諸分野에서 각각 요령있는 내용 정리와 해석을 깊이 있게 시도한 論文이 적지 않으나, 그것이 대부분이 風水地理說의 構成 평가에 있어서의 一面性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風水書들이 地理設의 要諦를 한 마디 표현해 보려는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風水의 基本 構成要素는 山, 水, 方位의 세 가지이며, 그 本質은 天地의 生氣를 地脈을 매개로 享
2. 歷史的 紀元
人文的 景權이나 環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현재의 地表面이란 過去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地理學에서는 歷史的인 지각현상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人文이 地表를 占有하여 生活을 영위해 온 이래 地理學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어도 地理學的思考를 하지 않고 살아온 종족은 없을 것이다. 時間과 空間의 문제는 人類出現 혹은 人間의 出生과 함께 피할 수 없이 직면하는 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居住地域의 風土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地理的 思考를 성숙․발전시켜 어떤 형태를 갖춘 論理로 구성하여 갔을 것이다. 따라서 그 論理는 風土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地域的 差異를 보이게 된다. 이렇듯 風水說 역시 그와 같은 地理的 思考의 성숙․발전된 특이한 論理體系 中 하나이다. 中國에서 發生하여 그곳에서 理論의 確立을 본 뒤 우리 나라에 도입된 風水說은 다른 地域의 地理的 思考와는 매우 다른 本質的 要素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특히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住居選定이나 聚落立地의 方法뿐만이 아니라 죽은 者의 永眠의 場所를 찾는 일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거의 獨創的인 文化現象이라고 할 것이다. 죽은 자의 매장에 관한 기록을 보면 間永期에 행해진 것을 시작으로 전 世界的으로 매장이 시작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매장에 관한 풍습은 移葬을 주된 方 法으로 하였다. 三國時代를 거쳐 新羅末期까지의 古墳 出土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이 에는 엄격한 形式이 있었고, 死者에 대한 뚜렷한 의도와 어떤 종류의 希求가 깔려 있는 듯하다. 특히 高句麗 古墳 벽화가 4世紀 후반 이래로 발달, 처음에는 生活圖, 風俗圖 위주이다가 6世紀로 들어가면 四神圖가 차차 유행하게 되는데, 이는 風水의 도입이라 볼 수는 없어도 風水的 思考의 基本觀念은 마련되고 있다는 증거로 생각한다.
Ⅱ. 風水說의 흐름
풍수설의 본고장은 중국으로서 전국시대 말기(기원전 4, 5세기)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혼란기였던 만큼 개인의 운명이나 국가의 흥망 성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가치 체계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구는 한나라 청오자(靑烏子)가 쓴 청오경(靑烏經)이 나와서 어느정도 이루어진 셈이다.
저자의 이름대로 청오경 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그 뒤에 나온 모든 풍수책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을 더욱 체계화한 이는 동진의 '곽박'이다.
그가 지은 장서(葬書) 는 당시의 음양오행설과 도참설 그리고 도교 사상 등을 참고, 종합한 것으로서 풍수설의 이론적 체계는 이때 이루어진 셈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더욱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던 풍수설은 당대(618~907년)에 극성기를 맞았다. 도교를 숭상하던 당 왕실은 이와 관련이 깊은 풍수설을 신봉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많은 풍수가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까지의 많은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풍수설이 당나라로부터 들어왔다고 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서 스스로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풍수적인 생각은 본디부터 우리에게도 있었으며 다만 신라와 당과의 활발한 문화 교류에 따라 더욱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살아갈 터를 잡거나 나라가 '국도를 정할 때' 산과 물과 방위 따위를 중요시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단군이 신시(神市)를 선정하고 왕검이 부도(符都)를 건설한 신화를 비롯하여 백제 온조왕이 서울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 유리왕이 도읍을 위나성으로 옮긴 사실 등을 그 증거로 든다. 풍수설은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우리나라 풍수의 할아버지로는 신라 말(9세기말)의 도선(道詵;827~898년)을 꼽는다. 그는 846년 선종의 한줄기인 동리산(桐裏山)파를 처음 연혜철(惠徹;784~861년)에게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法文)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은 뒤 수도를 거듭한 끝에 승려로서보다는 풍수설의 대가로서 널리 알려졌다.
당시는 신라 말기로서 일반에는 노장사상(老壯思想)이 유행하였고 화엄종에 싫증을 느낀 승려들은 선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때이다.
선종(禪宗)은 불경을 위주로 하는 화엄종과 달리 누구든지 깊이 생각하여 도를 깨치면 불성을 지니게 된다는 가르침이어서 민중으로부터도 큰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선종과 풍수는 수행 방법이 비슷하고 직관을 우선하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풍수설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그가 남긴 비기(秘記)는 풍수 사상 최고의 고전이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집터나 절간 또는 왕궁터를 선정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하였다.
한편 875년에 그가 "2년뒤 반드시 고귀한 인물이 출생할 것"이라고 한 예언대로 태조가 태어났다하여 고려 왕들은 그를 존경,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태조는 그가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 1,2,5,8조의 내용을 풍수적 설명으로 삼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
1127년 묘청(妙淸) 등이 서경 천도를 외치며 난을 일으킨 것도 그 뿌리는 이러한 데에 있었다. 고려조에서는 서경뿐 아니라 남경(서울)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개국 160년이 지나면 도읍을 남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도선의 「비기」에 따라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 하였으며 우왕과 공민왕 때는 잠시나마 국도를 옮긴 적도 있다.
고려조에서는 초기부터 묏자리 풍수도 널리 퍼져 있었다. 「고려사」열전(列傳)에는 태조의 아들인 동시에 현종(顯宗)의 아버지였던 안종(安宗) 욱(郁)이 자기가 죽은 뒤에 쓸 묏자리를 미리 정해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현종이 뒤에 임금 자리에 오른 것도 무덤을 잘 쓴 결과라는 것을 말한다.
고려 왕조에서는 풍수 전문가라고 할 '지리 박사', '지리생(地理生)' 따위의 관직을 두었으나 이 시대의 중요 풍수가의 대부분은 승려 출신들이었다.
풍수설은 조선조에 들어와 더욱 굳게 신봉되었으며 이의 폐단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작정하였다가 계룡산으로 바꾸고, 이미 시작하였던 궁궐 공사까지 중도 파기(破棄), 결국 무학대사의 의견을 좇아 한양으로 옮기게된 우여곡절 따위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꺾으려고 남대문의 현판을 세워 걸었으며 대궐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앞에 해태상을 놓았고 허술한 동쪽을 도우려고 동대문의 현판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의 넉 자로 하고 앞에는 옹성을 쌓기도 하였다.
조선조에서는 특히 무덤 풍수가 왕가나 상류 계층은 물론 일반에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그것은 한 가족이나 가문을 단위로 하는 유교적 생활 관습이 무덤 풍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후손 그리고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 이른바 명국(名局)을 찾아내려고 가산을 탕진하고 세도를 이용하여 남의 산을 빼앗거나, 심지어 이미 죽은 이의 묘를 파내어 자기 조상의 유해를 이장하는 따위의 작폐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한 뿌리에서 비롯한 두 문중이 대를 물려가며 다툼을 계속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경북 경주군 강동면의 여강(驪江) 이씨네와 월성(月城) 손씨네 사이의 불화라고 하겠다. 조선조에서는 풍수지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양과(陰陽科)를 직제에 두고 이의 시험 과목으로「청오경」「금낭경」「호순신(胡舜申)」「명산론(名山論)」따위를 부과하였다.
Ⅲ. 風水의 用語
1. 山
地形學에서 山地란 급경사 부분의 면적이 頂上部와 谷底의 편탄한 부분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넓은 起伏의 크기를 가진 지역을 말한다. 하지만 풍수에 있어서의 山은 絶對的인 조건으로 山과 연결되지 않은 地形은 砂, 得 따위의 자연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明堂이나 穴을 맺지 아니한다. 그러나, 風水에서의 山은 地形學에서의 山의 개념과 本質서는 平地의 경우 一尺만 높아도 山이요, 一尺만 낮아도 水로 보게 되기도 한다. 平地에 穴이 있는 경우도 땅속으로 山의 氣脈이 通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龍
山을 말한다. 즉 山의 頂上으로부터 四方으로 뻗어나간 줄기를 말하는데, 徐善繼, 善逑 형제가 지은 人子須知에는 <山의 變態가 千形萬象으로 높고 낮고, 크고 작고, 일어나고 엎드리고, 급하고 완만하고, 순한고 거스르며, 혹은 굽고 곧아서 支X의 體段이 一定치 않아 지척간이라고 옮김에 따라 판이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태는 龍이 꿈틀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해서 山을 龍이라 이름짓고 術法上의 用語로 사용한다.
3. 脉
脉이란 龍속에 감추어진 山의 精氣를 뜻한다. 사람에게 脉이 있어, 氣와 血이 脈을 좇아 진행하는 것과 같이, 龍은 手足 等을 형성한 骨肉이요 脉은 血管과 같은 것이다. 龍과 脈은 따라서 서로를 비교하여 보면 外面上 으로는 한 가지인 것이니 龍을 살펴 脉의 善惡을 알 수 있어도 脈을 보아 龍의 吉凶을 알기는 어렵다.
4. 穴
穴이란 龍脈 中 陰陽이 合局되고 山水의 精氣가 凝結된 곳을 말한다. 또한, 穴은 山의 穴도 사람의 몸 속에 있는 穴과 같은 것으로 사람의 경우는 經穴이라 한다. 經穴은 氣의 門으로 經穴에 존재하고 孔穴이라는 뜻인데 氣穴의 영위 현상이 반응하는 經路의 노선 중에도 특정한 위치에 生理的 또는 病理的인 반응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5. 砂
穴場을 중심으로 한 주위 二十四方을 둘러싼 大小의 峯巒을 포함해서 岩 石, 樹木, 江, 바다. 湖水, 건물, 평야, 砂地, 구릉, 도로 等 穴 주위의 形勢를 砂라 한다. 이것은 옛사람이 相地術을 說明, 혹은 傳授할 때 모래와 흙으로 形勢의 모형을 만들어 가르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로 砂는 局血의 주위를 둘러싸고 生氣를 끌어 모아 醇化作用을 일으키게 하는 山이나 丘陵의 총칭으로 주로 쓰인다.
6. 明堂
靑龍과 白虎 等 砂에 둘러싸인 땅을 明堂이라 한다. 이때 穴 바로 앞의 平坦한 땅, 즉 山所의 경우 墓板, 住居地의 경우 主建造物의 앞뜰을 內明堂이라 하고, 이보다 더 앞쪽으로 內明堂에 비하여 비교적 넓은 平地를 外明堂으로 부른다. 원래 明堂이란 皇帝가 臣下의 拜賀를 받는 땅을 일컫는 用語로 穴에 參拜하는 곳이란 의미로 明堂이라 칭한 듯하다.
7. 得, 破
穴, 四神, 또는 內明堂의 양측으로부터 흘러내리는 水流의 發源處를 得이라 한다. 得이 靑龍과 白虎가 拱抱하는 즉 明堂의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곳은 破 또는 水口라 한다 得과 破에도 역시 內․外龍虎의 존재에 따라 內․外得과 內․外水口가 있게 된다. 혹은 穴에서 그 흐름이 보이는 水流를 得, 보이지 않는 것을 破라 하는 경우도 있다.
8. 坐向
穴의 中心, 즉 住居의 경우 主建物이 선 자리, 陰宅의 경우 棺이 묻힌 壙中을 坐로 하여, 坐에서 正面을 바라보는 方位를 向이라 한다. 따라서 坐向은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代表的인 例가 子坐牛向으로 二十四方位로 正北이 子, 正南이 牛가 되니, 이는 入首가 정남향으로 경사진 경우가 된다.
9. 五星, 九曜
風水에서는 山의 모양을 나타낼 때 星 또는 曜라는 用語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하늘에 있는 星曜가 地上에서 形相을 나나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星體는 五星과 九曜가 기본이 되고 이것이 또 變格되어 다양한 形相을 나타내게 된다. 五星이란 金星, 木星, 水星, 火星, 土星의 다섯가지 星辰으로 곧 五行을 말한다. 이 五星의 變格으로 이루어진 貪狠星, 巨文星, 祿存星, 文曲星, 廉貞星, 武曲星, 破軍星, 左輔星, 右弼星 等이 九星, 혹은 九曜가 된다.
10. 官, 鬼, 禽, 曜
① 官과 鬼
官이란 穴前, 즉 案山 너머에 있는 山을 말하고 鬼란 穴後, 즉 主山의 背後에 있는 山을 말한다. 鬼는 죽은 듯 해야하고 官은 살아야 하는데, 官이 죽으면 氣가 흐려지고 鬼가 살면 氣가 흩어진다.
② 禽과 曜
禽은 水口處에 있는 조그만 山이나 바위를 말하고 曜는 靑龍, 白虎, 양변의 背後面에 있는 小山 岩石을 일컫는 말이다. 禽은 貴를 曜는 顯을 장악한다.
Ⅳ. 風水의 論理體系
1. 槪要
風水의 論理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風水의 수많은 說들과 原理를 익히고 그것들의 총체적인 類似性과 連繫性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風水에 는 陰陽五行說,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形局論 等이 있다. 이것들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위의 7가지들이 하나로 모여서 風水의 論理體系를 뒷받침하여 현재의 風水를 있게 하는 것이다.
2. 風水說의 論理
⑴ 陰陽五行法
風水의 發生 初期에는 陰陽五行說과 결부된 흔적을 확실히 찾을수 없으 나 이것이 하나의 地理思想으로 확립된 이후에는 陰陽五行說이 가장 큰 思想的 基礎를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風水術法에 쓰이는 用語들이 잘 말해준다. 陰陽은 결국 時空上의 상반되는 구체적 양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陰은 추위, 구름, 비, 여성, 內面性, 그늘진 곳을 암시한다면 陽은 빛, 열, 봄, 여름, 남성들의 성격을 가리키고 있다. 易經에 의하면 兩者 중 한 原理가 지배하면 나머지 하나는 피지배격이 된다. 萬物은 天地 또는 陰陽의 調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그것을 分類하는 원리로서도 陰陽은 사용된다. 陰陽은 서로 한 요소를 보강하기도 하고 약화시키기도 하며 그들의 週期的 變化와 相互 보완작용에 의하여 세상은 변하기도 하고 세계의 질서가 성립되기도 한다고 본다.
⑵ 看龍法
風水에 內包되어 있는 모든 原理가 1次的으로 可視的 實體로서 表出되는 事象이 山, 즉 風水用語로 龍이며 그 龍脈의 흐름이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穴場까지 살피는 일을 看龍法이라 한다.
⑶ 藏風法
明堂에 자리잡은 穴場을 잡는 것이 目的인 風水에 있어서, 明堂 주위의 地形, 地勢를 어떻게 認識라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風水의 理解에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된다. 明堂 주변의 地勢에 관한 風水理論을 통칭하여 藏風法이라고 하며, 결국 藏風法을 통하여 定穴도 이루어지는 것인만큼 실제로 都邑이나 住宅 혹은 陰宅을 相地함에 있어서는 藏風法이 바로 요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⑷ 得水法
風水에서 물(水)의 역할이나 중요성은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타당한 것이 陰陽論的 해석 방법이다. 즉 得水는 陰陽의 和合에 필수 불가결한 存在로 그 중요성이 인식된다. 이와는 달리 水의 해석에 있어서 陰陽에서 보는 本質的 원칙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山水를 體와 用, 혹은 形體와 血脉으로 對比시킨 부분도 있다. 즉 人體의 건강 여부가 血脉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血脉의 중요성을 강조 시키므로 風水에서 水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⑸ 定穴法
穴이란 風水에서 要諦가 되는 장소이다. 穴은 陰宅의 경우 屍身이 직접 땅에 접하여 그 生氣를 얻을 수 있는 곳이며, 陽基의 경우 居住者가 실제 삶의 대부분을 얹혀 살게 되는 곳이다. 用語 설명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穴이란 사람 몸의 經穴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風水에서는 定穴을 찾아내는데 많은 중요도를 두고 있다.
⑹ 坐向論
坐向이란 등진 方位에서 正面으로 바라보이는 方向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는 말이다. 風水構成의 基本要素를 山, 水, 方位, 사람의 네 가지로 축약 시킬 때 坐向論은 당연히 方位에 관계된 術法이 된다. 원래 坐向은 穴에서의 위치로 본 方位 즉 穴의 뒤쪽 등진 방위를 坐로 그리고 穴의 正面을 向으로 하여, 예컨대 北쪽에 來龍을 등지고 南쪽에 案山을 바라 보는 穴處에서의 坐向은 子[北]坐 牛[南]向이라 부르는 것이지만, 穴處에서의 坐向뿐만 아니라 山과 水의 흐름 方向 等 方位문제 전반에 관하여 고찰코자 한다. 특히 風水說에서의 坐向은 어느 한가지에 귀속 시킬 수 없는 대단히 복합적인 형태를 취한다. 風水說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陰陽說이다. 陰陽說의 철학적인 것은 春秋戰國時代로부터 내려온 이른바 陰陽家 術數家의 硏究結果요, 또 그 目的으로서 말하자면 일종의 自然科學이라 하겠다. 결국 天文地理를 硏究하는 데는 羅經이 필수품이 며 그의 근본되는 것이 坐向論인 만큼 坐向論은 風水의 本質論에 가장 접근된 분야로 보아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⑺ 形局論
形局論은 地勢를 전반적으로 개관할 수 있는 術法이기 때문에 術師部類 가 가장 많이 들먹이는 내용이고 風水를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地勢의 槪觀이란 것이 耳懸鈴鼻懸鈴 式으로 보는 입장에 따라 달리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니,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明確한 術法은 아니다. 形局論은 宇宙萬物萬象이 有理有氣하며 有形有像하기 때문에 外形物體에는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고 보는 觀念을 原理로 삼는다.
Ⅴ. 건물 증축.개축시 고려사항
우리선조들은 주택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터줏대감 이 있어 잡귀의 침범이나 재앙을 막아 준다고 믿어왔다. 또 집안에 살고 있는 구렁이, 두꺼비, 족제비 등은 재산을 늘려주는 영물로 여겨 해치거나 내쫓지 않았다. 건물이나 주택은 땅위에 지어지면서 하나의 유기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래서 풍수에서 증축이나 개축을 할 땐 환경적 변화를 우려하여 신중을 기하도록 했다.
단순히 살던 집이 낡았거나 좁아 생활하기에 불편하다고 주택의 구조를 전체적으로 뜯어 고치면 그동안 그 집에서 이룩해온 가운이 기울게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전의 주택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용된 거주자 구조적으로 변한 새로운 주택환경에 적응치 못하여 신체 리듬이 깨지면서 우환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는 영업을 하는 산업용 건물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들면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시설과 비위생적인 여건의 음식점이, 최신식 시설로 치장한 음식점보다 잘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물론 장사를 한곳에서 오랫동안 하였기에 단골손님이 있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보아도 될성 싶지 않은 장소에서 의외로 손님이 많은 것을 보면 아이러니컬하기도 하다. 이처럼 다 쓰러져가는 단층 한옥 건물에서 장사를 잘 하다가 갑자기 최신식 건물을 지어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려고 이전하였다가 손님이 갑자기 끊겨 파리만 날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음식맛이 변한 것도 아닌데 손님이 줄어드는 것은 이전의 음식점에서 풍기던 자연스런 기운이 신축된 건물의 낯선 분위기로 대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같이 건물의 증개축으로 인하여 거주자가 알게 모르게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물론 증개축을 통하여 통풍과 채광을 원활하게 만들어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살던 집이나 상가가 그동안 평안했다면 불편한 부분만을 최소 한도로 보수하거나 개축하여 마음에 드는 집으로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증축을 하지 않고 단순히 내부의 일부분만 고치고자 할 때에는 그 부분의 구조만 간단하게 바꾸면 되지만 일단 작업을 시작하고 보면 대대적인 공사가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건물을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고 기존 시설을 그대로 쓰고자 할 때에는 기존의 재료와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좋으며 기존의 건물과 새 건물이 이어지는 부분은 다용도실이나 창고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국 어떤 부분을 늘리거나 구조를 변경하고자 할 때는 무조건 고치기보다는 전체적인 균형 감각을 고려해 일부를 고치거나 증축해야 한다. 증개축으로 인한 복(福)된 터를 화근의 자리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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