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고조선- 부여-삼한-유물★
요령식 동검 - 중국 요령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청동검이다. '만주식동검' 또는 아래부분의 폭이 넓고 둥근 모양의 악기인 비파(琵琶)를 닮아서 '비파형동검'이라고도 부른다. 검몸과 자루를 따로 주조하여 조합하는 형식[別鑄式]으로, 검몸과 자루를 하나로 만드는[一鑄式] 중국식동검과는 차이가 있다. 1974년 충청남도 부여 송국리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한국식 동검은 한반도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청동검이다. 날이 좁고 직선적인 형태로 세형동검(細形銅劍), 또는 좁은놋단검이라고도 한다. 검몸과 자루를 따로 만들어[別鑄式] 결합하여 사용한다. 충청남도 아산 남성리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매끈한 앞면을 거울로 사용하였다. 뒷면에는 두 개의 꼭지[?]가 있고 내부를 집선(集線)으로 채운 대칭형의 별무늬[星形文]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거친무늬 거울은 돌널무덤에서 출토되는데 주로 별무늬나 번개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다.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부여 삼한실 - 고조선이 멸망한 전후 중국 동북 지역에는 부여와 고구려, 한반도 동북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 중남부 지역에는 마한ㆍ진한ㆍ변한의 삼한이 있었다. 사회 발달 수준은 국력과 위치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주변 세력과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문화 역량을 강화하여 일찍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예속된 상태였으며, 마한과 진한, 변한은 점차 백제, 신라, 가야로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철기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쓰였다. 철기의 사용으로 농경의 효율을 높일 수 있었고, 국가의 지배질서도 빠르게 확립되었다.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이 도입되어 회색 토기가 만들어졌고 목기와 칠기 등 다양한 생활용품도 사용되었다. 무덤으로는 돌무지무덤, 널무덤, 덧널무덤 등이 만들어졌다. 활발한 대외교류가 진행되면서 중국ㆍ북방ㆍ왜와 문물을 교환하였다.
옻칠된 칼집 속에 한국식동검이 들어 있는 것으로, 한국식동검의 칼집 구조를 잘 보여 준다. 이는 초기철기시대의 문화와 원삼국시대 문화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다. 경상남도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통나무널 아래의 대바구니에 있던 것으로 각종 칠기 및 중국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목이 긴 항아리에 쇠뿔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와 주머니 모양의 단지이다.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와질토기로 밀폐된 굴가마에서 구워 회색을 띤다. 형태는 민무늬토기에서 변화된 것으로 주로 널무덤[木棺墓]에서 출토되며 원삼국시대 전기에 유행하였다. 경상남도 김해 다호리 널무덤[木棺墓]에서 출토되었다.
수정을 여러 면으로 다듬은 구슬[多面玉]과 곱은옥[曲玉]을 꿰어 만든 것이다. 선사시대의 목걸이는 주로 뼈나 옥으로 만들었으나 원삼국시대부터는 유리와 수정, 마노, 호박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곱은옥, 대롱옥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경상남도 김해 양동리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중국에서 상주(商周)시대 이래 사용된 예기(禮器)의 하나로서, 소유자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樂浪)의 중심지인 평양과 진·변한 지역에 해당되는 울산 하대, 김해 양동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 세발솥은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중국 전한(前漢)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울산 하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새 또는 오리를 본떠 만든 와질토기로, 의식용이나 부장용으로 사용되었다. 속이 빈 몸통은 술 등 액체를 담을 수 있고 등과 꼬리부분에 있는 구멍으로 액체를 담거나 따를 수 있다.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는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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