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고구려-백제-사료와유물★
고구려실은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포괄하는 몇 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나라를 세우고, 성을 쌓다“는 첫 주제에서는, 지배층의 권위와 신분의 상징이 되는 고구려의 위세품을 통해 고대 국가 고구려의 출현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어, ”고구려 무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는 삶의 영역 안에서 소유한 지배적 힘과 권위를 죽음의 공간 속에 표현했던 고대 고구려 사회의 특징적 대형 무덤을 통해 그 시대 중심 문화의 성격과 그에 담긴 사람들의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는 뛰어난 기마전술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영토 확장, 대륙을 향하다”라는 주제에서는 복잡한 동아시아의 대결 구도 안에서 영역 확장을 활발히 전개해 나간 고구려 철갑기병(鐵甲騎兵)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남진(南進), 아리수를 넘다”에서는 한강 유역 이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고구려의 문화적 실체를 보여주는 서울, 경기, 충청 일대 고구려 유적의 발굴조사 성과들을 만나볼 수 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사회적 안정 속에서 고구려 사회 운영에 중요한 축이 되었던 불교는 국가와 왕실의 후원 하에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수없이 많은 부처, 무수한 깨달음을 구하다’라는 주제 하에는 고구려 사회의 불교 사상과 예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인의 일상”에서는 여러 유물들과 고구려 무덤 벽화의 소재들을 통해 고구려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고구려실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 무덤벽화 모사도를 활용한 테마전이 마련되어 고구려인들의 생활과 사상을 다채롭게 만나 볼 수 있다.
집 - 네모진 건물에 우진각지붕이 올려진 형태이다. 지붕에 일정한 간격으로 골을 파서 기왓골을 표현하고 있다.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명기(明器)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유일한 쇠부뚜막이다. 안악 3호 무덤 벽화의 부엌그림에도 이와 비슷한 부뚜막이 그려져 있다. 중국 지안[集安]지역의 고구려무덤에서는 흙으로 구워 만든 부뚜막이 출토되기도 한다. 평안북도 운산 용호동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고구려 관모인 절풍(折風)에 꽂았던 관 꾸미개이다. 세 개의 세움 장식이 남아 있는데, 가장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하나를 꼬아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였다. 이런 제작 기법은 신라 황남대총 남쪽 무덤의 은관(銀冠)과 의성 탑리 무덤의 금동관에서도 확인되어 두 지역간의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굵고 둥근 고리에 작은 장식을 매단 것으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귀걸이다. 연결고리[遊環]와 드리개[垂下飾]에 금 알갱이를 붙여 넝쿨무늬와 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서울 능동에서 출토되었다.
짐승 얼굴무늬 수막새 - 크게 과장된 두 눈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짐승얼굴이다. 짐승얼굴무늬는 나쁜 것을 쫓기[?邪]위한 것으로, 주술적인 장식이나 건축, 무덤 등에서 많이 나타난다.
연꽃무늬 수막새 - 천추총 정상부에 세워졌던 건물에 사용되었던 기와로 생각된다. 막새면 가운데는 볼록하게 솟은 반구형 씨방[子房]이 배치되고, 막새면을 부채살 모양으로 구획한 후 끝이 뾰족한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등 고구려 기와의 특징이 뚜렷하다.
금동 못신 - 금동판에 뾰족한 사각형의 금동 못을 끼워 고정하였다. 바닥판 가장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두 개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뚫려 있어, 발등을 감싸는 가죽이나 천을 붙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삼실총이나 개마총의 벽화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 있는 고구려 무사가 묘사되어 있다.
호우명 청동그릇 - 신라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된 고구려 청동 그릇이다. 바닥에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 글자가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글자체로 새겨져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왕의 장례를 치른 다음해(415)로, 이 그릇은 광개토왕을 장사지낸 1년 뒤에 신라 사신(使臣)이 고구려에서 받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우(壺?)'라는 글자를 통해 이러한 형태의 그릇이 당시 고구려에서 '호우'라고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되었다.
백제는 부여계 이주민들이 한강 유역에 세운 백제국百濟國이 점차 마한 지역을 통합하면서 성장한 나라이다. 그 후 도읍을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 사비(泗?, 지금의 부여)로 옮기면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강 유역에 도읍한 한성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백제 문화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이다. 이러한 특징은 석촌동 무덤과 몽촌토성ㆍ풍납토성 등의 생활 유적에서 확인된다. 웅진기(475-538년)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문화 강국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이는 중국 남조와 관련성이 엿보이는 무령왕릉과 그 출토 유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사비기(538-660년)는 참신한 조형 감각과 세련된 공예 기술이 발달한 백제 문화의 절정기이다. 이 시기에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된 백제금동대향로가 만들어졌다. 한편, 백제 문화는 일찍부터 왜倭에 전해져 일본의 고대 아스카(飛鳥)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리자루칼 - 손잡이 끝에 은으로 장식된 둥근고리가 달린 장식 칼이다. 백제의 고리자루칼에는 둥근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이 장식된 칼도 있다. 무령왕릉에서도 용이 장식된 칼이 출토된 바 있어 고리자루칼은 왕이나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만든 위세품일 가능성이 높다. 천안 화성리 나무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초두 - 몸체와 3개의 다리,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접합한 것이다. 다리는 끝부분이 말발굽 모양이며 밖으로 휘어져 있어 안정감을 더해준다. 손잡이 끝에는 용머리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그릇은 한성도읍기에 중국 청자와 함께 들여온 것으로, 백제의 대외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이다.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되었다.
관꾸미개 - 은판의 가운데를 접어 꽃봉오리와 줄기모양이 나도록 오려서 좌우대칭이 되게 만들었다. 남자는 줄기에 곁가지가 장식된 것을, 여자는 곁가지가 없는 단순한 것을 착용하였는데 줄기의 아래 부분을 천으로 된 관의 정면 테두리에 꽂아 장식하였다. ‘백제의 나솔 이상은 은꽃으로 관을 장식한다’라는 『수서(隋書)』·『구당서(舊唐書)』 등의 기록으로 보아 이 관장식이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의 돌방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능산리 절터 금동대향로 - 악취를 제거하고 부정을 없애기 위해 향을 피우던 도구이다. 아래에는 다리 하나를 치켜들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고 그 위에 신선들이 사는 박산(博山)이 있다. 박산의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는 모습이다. 연기는 봉황의 가슴과 뚜껑에 뚫려 있는 12개의 구멍으로 피어오르도록 고안되어 있다. 국보 제287호로,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무령왕비 관의 좌우에 꽂은 꾸미개로 얇은 금판을 뚫어 무늬를 새긴 것이다. 중앙의 꽃병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연꽃잎들이 그 위로는 넝쿨이 펼쳐진 모습이다. 『구당서(舊唐書)』의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은 이 관 꽂이가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충청남도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무늬벽돌 - 백제 사비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모두 8종류의 문양전이 출토되었는데, 그 크기는 대체로 한변 29cm, 두께 4cm 내외이다. 이 전돌이 출토될 당시 바닥에 갈린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문양의 위와 아래가 엇갈린 채 놓여 있어서 후대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재배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산수문전은 모두 2종류가 출토되었는데, 산과 나무, 그리고 물과 바위가 구름과 함께 잘 묘사되고 있는 산수화를 연상케 하고 있다. 도식화된 물결 위에 뾰족한 암석을 세우고 세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 있는데, 한 문양전에는 산속에 산사로 생각되는 건물과 승려상이 묘사되고 있어서 도교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불교적인 색채가 엿보인다. 그런데 두 전돌은 화제(畵題)와 그 기법은 서로 비슷하나 그 상면에 봉황과 흘러가는 구름문양이 각각 다르게 배치되고 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전돌들은 단순한 자연풍경을 소재로 하여 도식화시키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있고, 산과 구름의 표현이 곡선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그 기법에 원근법이 나타나고 있어서 백제 회화의 한 단면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백제미술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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