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왕릉 여행 [09] 지역별 왕릉군(07) - 서울지구 관리소

장안봉(微山) 2012. 12. 26. 18:09

왕릉 여행(9) - 지역별 왕릉군(7)

7. 서울지구 관리소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정릉(陵)
    정릉은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으로 단릉이며,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     진 왕비의 능으로서 의의가 있습니다.

 

태조는...
    태조는 고려시대의 풍습에 따라 향리(鄕里)와 개경(開京)에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각각 두었으며,      
신덕왕후 강씨가 경처였습니다. 향처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는 태조가 등극하기 전인 1391년에 서거     하였고, 강씨는 조선 개국과 함께 1392년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1396년(태조5년)에 병환으로 승     하하자 시호를 신덕왕후로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고 이듬해인 1397년에 한성부 서부 황화방(皇華坊)인     재의 중구 정동에 예장(禮葬)하였다고 합니다.

 

왕자의 난은...
    신덕왕후의 소생으로는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과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그리고 경순     공주(慶順公主)를 두었는데,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왕위 계승 다툼인
'제1차 왕자의 난'이 1398년(태     조7년)에 일어나 방석과 방번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 홍살문/참도/정자각 위치

▲ 정자각과 정릉의 능역

▲ 단청이 오래되어 색이 바램

정릉의 특징은...
    정릉은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면서 대폭 축소되었으며,
장명등 상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옛 능에서 옮겨     온 것이고, 나머지 석물은 현종대에 새로 조영된것이므로 옛 정릉의 수난과 복원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정릉은 홍살문에서 참도를 지나면 정자각이 정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왼쪽으로 한 번 꺽여서 있습니다.     정자각의 단청은 오래되어 색이 바래서 아예 단청을 하지 않아던 것 처럼 보입니다. 또한, 대부분 왕릉의     강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것에 비해서
정릉의 강은 유난히 짧으며, 경사가 심하고 높아서 정자각 바로 앞     에서 보면 석물의 윗 부분만 보일 정도입니다.

▲ 신덕왕후의 정릉(단릉)

▲ 장명등(천장 전 석물)

▲ 상석과 고석(천장 전 석물)

태종에 의해서 천장되고...
    
정종에 이어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왕릉이 모두 도성밖에 있는데, 정릉만이 도성안     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논란이 있었으며, 도성 밖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언이 잇 따르자 1409년에 양     주 사을한록(沙乙閑麓)인
현재의 성북구 정릉으로 옮겼고, 능의 목재와 석재 일부는 태평관(太平館)과     광통교(廣通橋) 복구에 썼다고 합니다. 유독 신덕왕후의 능만 도성안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사실     은 계모 신덕왕후가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왕세자로 밀었던데 대한 복수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청계천에 복원된 광통교의 석축으로 옛 정릉의 병풍석이...(면석을 거꾸로 사용한 모습)

200년간 잊혀졌던 정릉은...
    천장 이후에
릉은 종묘에 배향되지 않고 민묘나 다름이 없이 능의 존재는 200여년간 잊혀졌었다고 합     니다. 그러던 중, 선조 때 왕후의 친정 후손이 국묘 봉사자(國廟 奉祀者)로서 군역 면제를 호소하여 비로     서 정릉의 소재 파악에 나섰고, 이에 변계량(卞季良)의 아장축문(移葬祝文)에서 그 위치를 찾아내었으며     그 후 한식절에만 봉사하다가 송시열(宋時烈) 등의 상소에 의해 1669년(현종 10년)에 회복되고 태묘배향     (太廟配享)이 이루어져 상설(象設)이 갖추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 북한에 있는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면석(좌)과 청계천의 정릉 면석(우)이 거의 똑같습니다.

정릉의 석물을 돌려주세요...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광교도 복원되었습니다만, 2003년 9월 20일자 신문 기사 내용의 일부분을 인용하     면,  “광교(廣橋) 건축자재로 사용했던 돌들을 정릉(貞陵)에 되돌려주세요.” 청계천 복원 사업이 때 아닌     '600년 묵은 돌(석재·石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재령 강(康)씨 안정공(安靖公)파 종친회가 최근     서울시에 600 년 가까이 광교의 재료로 사용됐던 석재 중 정릉에서 건너온 것은 돌려 달라고 진정을 한     것이다."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덕왕후의 후손들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만,     역사란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병풍석이...
    정릉의 병풍석과 거의 똑 같습니다. 정릉은 조선 개국 이후의 첫 왕릉으로 조성되면서 고려 공민왕릉의     예를 따른 것 같습니다. 위 아래의 좌우 사진을 비교해 보면 면석(위 사진)은 거의 흡사하고, 우석(아래     사진)은 똑 같습니다.

 

※ 공민왕릉의 병풍석 사진은 어느 대학 교수님이 북한에 가서 찍었다는 사진을 아는 분에게 얻었습니다.

▲ 북한에 있는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우석(좌)과 청계천의 정릉 우석(우)도 똑같습니다.

대중 교통편은...
    
지하철 : 4호선 성신여대 6번출구에서 아리랑고개 방향 100m지점 버스 정류장에서 환승
    버   스 : 정릉입구(구아리랑시장) 하차 : 1012,1014,1211,1212
                정릉2동 사무소 하차 : 1011,1112,1114,1213,7111,7211,170(간선),171(간선)

※ 아리랑 시장(표지판 700미터)을 지나서 언덕을 10 여분 정도 올라가면 정릉 매표소가 나옵니다.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이 출간(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겸 문화재 위원인 저자 김정동)

[국민일보 2004-10-26 18:14]

 

서울의 배꼽에 해당하는 정동의 유래에 얽힌 전설 하나. “조선 개국 이전에 지금의 영국대사관 터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 우물가에서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강씨와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이룬 후 그들은 결혼했고 강비가 죽은 후에는 이 ‘우물의 마을’에 무덤을 썼으니 이름을 정동(井洞)이라 불렀지요.”

 

왕비 강씨가 죽자 태조는 “도읍 안에 무덤을 둔 일이 없다”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망루에서 바라다보이는 황화방(지금의 정동) 북쪽 언덕에 능을 만들고 ‘정숙한 여인의 무덤’이라는 뜻의 정릉(貞陵)이라 칭했다. 더구나 태조는 정릉의 아침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하니 강씨 부인에 대한 태조의 사랑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태조 사후에 능역의 광대함이 의정부에서 제기되었고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태종 이방원은 정릉을 도성 밖 동북 모퉁이인 양주로 옮겨버렸습니다. 이후 무덤은 잊혀져 버렸지요. 석물 일부는 청계천 대광교의 기초가 되었고 나머지는 미국대사관과 관저에 좀 있고 영국대사관 내에도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 교수는 정동이 우리 역사의 애환이 서린 현장인만큼 보존을 의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릉 위치도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산87-16

 

위의 빨간 깃발이 있는 부분이 정릉 입구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600여 미터 정도 비탈진 길을 올라가면 장릉 입구가 보입니다.

 

아래의 빨간 깃발이 있는 곳은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입니다.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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