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여행(9) - 지역별 왕릉군(7) |
7. 서울지구 관리소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정릉(貞陵)
☞ 태조는...
☞ 왕자의 난은... |
▲ 홍살문/참도/정자각 위치 |
▲ 정자각과 정릉의 능역 |
▲ 단청이 오래되어 색이 바램 |
☞ 정릉의 특징은... |
▲ 신덕왕후의 정릉(단릉) |
▲ 장명등(천장 전 석물) |
▲ 상석과 고석(천장 전 석물) |
☞ 태종에 의해서 천장되고... |
▲ 청계천에 복원된 광통교의 석축으로 옛 정릉의 병풍석이...(면석을 거꾸로 사용한 모습) |
☞ 200년간 잊혀졌던 정릉은... |
▲ 북한에 있는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면석(좌)과 청계천의 정릉 면석(우)이 거의 똑같습니다. |
☞ 정릉의 석물을 돌려주세요...
☞ 북한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병풍석이...
※ 공민왕릉의 병풍석 사진은 어느 대학 교수님이 북한에 가서 찍었다는 사진을 아는 분에게 얻었습니다. |
▲ 북한에 있는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우석(좌)과 청계천의 정릉 우석(우)도 똑같습니다. |
☞ 대중 교통편은... ※ 아리랑 시장(표지판 700미터)을 지나서 언덕을 10 여분 정도 올라가면 정릉 매표소가 나옵니다. |
☞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이 출간(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겸 문화재 위원인 저자 김정동) [국민일보 2004-10-26 18:14]
서울의 배꼽에 해당하는 정동의 유래에 얽힌 전설 하나. “조선 개국 이전에 지금의 영국대사관 터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 우물가에서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강씨와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이룬 후 그들은 결혼했고 강비가 죽은 후에는 이 ‘우물의 마을’에 무덤을 썼으니 이름을 정동(井洞)이라 불렀지요.”
왕비 강씨가 죽자 태조는 “도읍 안에 무덤을 둔 일이 없다”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망루에서 바라다보이는 황화방(지금의 정동) 북쪽 언덕에 능을 만들고 ‘정숙한 여인의 무덤’이라는 뜻의 정릉(貞陵)이라 칭했다. 더구나 태조는 정릉의 아침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하니 강씨 부인에 대한 태조의 사랑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태조 사후에 능역의 광대함이 의정부에서 제기되었고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태종 이방원은 정릉을 도성 밖 동북 모퉁이인 양주로 옮겨버렸습니다. 이후 무덤은 잊혀져 버렸지요. 석물 일부는 청계천 대광교의 기초가 되었고 나머지는 미국대사관과 관저에 좀 있고 영국대사관 내에도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 교수는 정동이 우리 역사의 애환이 서린 현장인만큼 보존을 의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정릉 위치도 |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산87-16
위의 빨간 깃발이 있는 부분이 정릉 입구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600여 미터 정도 비탈진 길을 올라가면 장릉 입구가 보입니다.
아래의 빨간 깃발이 있는 곳은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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