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여행(7) - 석물(2) : 방치된 천장전 석물들(1)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천장 전의 석물은 초기 왕릉 여행에서 간단히 다루었으나 재 답사와 복원에 대한 제언 및 진행 상황들을 다루다 보니 너무 길어 졌습니다.
대부분 조선조의 왕릉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천장(遷葬) 전(前) 석물들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입니다. 왕릉 전문가라는 분들은 설사 안다고 해도 그 석물들이 지금은 어떤 상태로 관리/보관되고 있는지는 아마도, 잘 모를 겁니다.
우리들이 천장 전의 석물을 가볍게 생각할 지 모르나 천장 전의 석물들도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석물의 조각술이 뛰어나서 잘 보존되어야 합니다. 함께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두 곳의 천장전 석물들이 어떻게 방치되어 있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
1. 구 영릉(세종) 석물이란... |
구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으로 태종의 능인 헌릉의 서쪽 산등성이에 조성되었으며,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이후 구 영릉의 위치가 풍수지리상 길지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천장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왕릉인 구 영릉을 구성하는 구 영릉 석물들은 여주로 천장될 때, 거리가 멀어서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땅에 묻혔다가 1973∼1974년 발굴 당시 일부는 망실되고, 일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 구 영릉 신도비 |
▲ 난간석의 석주 |
▲ 죽석, 상석, 고석 1개 등 |
조성 당시의 석물의 품목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지만, 구 영릉석물들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 석물 배치방식과 제작수법 등을 알 수 있고, 당시의 양전척, 주척 등을 환산할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세종시대의 국력과 문화발달 정도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 구 영릉 석물 (舊 英陵 石物) 13점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4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 구 영릉 석물의 현실은... |
발굴된 석물들은 현재,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외부에 전시(제가 보기에는 방치입니다.)되어 있습니다. 이 곳에 있는 구 영릉 석물들은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일부 왕릉의 석물들은 조잡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나, 이 곳에 있는 구 영릉 석물은 방치되다시피하고 많이 훼손 되었지만 석물들이 아주 멋 집니다. 당시 시대상 연구에 중요한 유물입니다. |
▲ 목 잘린 석마 |
▲ 석양 |
▲ 훼손된 난간석의 석주 |
세종대왕기념관내에는 국보와 보물이 여러 점 있으며, 관외에도 보물 838호인 수표(水標)가 있습니다. 구 영릉의 석물들은 관심이 없으면 찾기가 쉽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석물들은 기념관 옆 건물의 언덕 밑 좁은 곳에 있었으며, 석물들은 건물의 벽을 보고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구 영릉 석물이 아닌줄 알았습니다. 구 영릉 석물임을 확인하고 처음에는 놀랐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신도비는 도로 옆 한 켠에 잘 전시되어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
▲ 문인석 한 쌍 |
▲ 무인석 한 쌍 |
▲ 문무인석과 건물 사이는 1미터 |
저는 문무인석이 비록, 돌로 만들어졌으나 선조들의 영혼이 깃 들어 있는 반 생명체라고 봅니다. 현재의 구 석물들이 벽을 보고 돌아 선 것이 현재의 어지러운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
◈ '방치된 구 영릉 석물' 소개 그 이후... |
왕릉여행의 석물 소개시 '방치된 천장전 석물들'에서 구영릉 석물과 유강원지 석물의 보존 실태에 대해서 사진과 함께 보여 드렸었습니다. 그 이후가 저도 궁금해서 지난 주에 청량리에 있는 세종대왕 기념관을 다녀 왔으며, 그 결과를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문화재 행정모니터로 활동하면서 유강원지의 석물들에 대해서는 2004년 5월 모니터 보고서를 올렸으며, 구 영릉 석물에 대해서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 번 더 확인하고 보존 실태 보고서를 작성할 요량으로 세종대왕기념관을 들어섰습니다. |
▲ 아니! 석물들이 어디로 갔을까? |
▲ 신도비에 보호각을 세웠더군요. |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석물이 방치되어 있던 곳을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 석물들이 어디로 갔지!!! 세종대왕 기념관 앞으로 가 보니 기념관 잔디밭 한 켠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전시해 놓으니 이제는 세종대왕 기념관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서 책임자에게 고맙다는 말씀이라도 드리려고 찾으니, 계시지 않았으며, 기념관 입구에서 기념품 파는 아가씨에게 이야기 하니, 기념관 내부도 새로 꾸몄다고 하여 들어가 보았습니다. 전에는 전시실 같지도 않더니만 지금은 깨끗하게 꾸며 놓았으며, 특히 전시실 동선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도록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종대왕 기념관을 돌아나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던지, 절로 콧노래가 나오더군요. |
▲ 구석에 방치되었던 구 영릉 석물들이 세종대왕 기념관 앞의 밝은 곳으로 이전 전시된 모습입니다. |
이틀 뒤, 세종대왕 기념관 책임자이신 차재경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사실은 제가 벼르고 갔었는데, 이미 잘 해 놓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일부 보완할 사항들을 몇 가지 건의를 드렸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고 안내판과 보존을 위한 회랑(지붕이 있는 긴 복도)을 설치할 계획을 갖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
▲ 찡그렸던 석물들이 환하게 웃는군요. 석마 등에 타면 좀 어떠랴! 앞으로 너희들이 커서 잘 보존하거라. |
그런데, 한 가지 구 영릉 석물의 석호 2마리가 발굴(1973년) 이전에 도굴되었다가 회수되어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것을 이 곳으로 가져 올 수 없냐고 여쭈어보니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쉽게 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석호 2마리가 더 있는데, 1970년대, 여주 영릉의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세종전의 개막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온다고 여주 영릉의 관계자가 빼앗듯이 가져 갔다고 합니다. 지금도 영릉의 세종전 앞에 해태상 처럼 좌우에 있다고 합니다.
제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석호 4마리가 한 곳으로 모일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세종전 앞의 석호 사진은 회원님께서 제공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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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의 문화재라면 몰라도 왕릉의 석물은 무리가 한 곳에 있어야만 하며, 제가 42곳의 왕릉의 석물을 전부 보고, 사진으로도 모두 갖고 있습니다만, 구 영릉의 석물은 조선도 왕릉의 석물 중에 으뜸입니다.
더군다나 몇 백년을 땅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풍상에 노출되지 않아서 석물의 문양이 깨끗하고 선명합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방치를 해서 저 모양 저 꼴이 된 것이 안타까우나 지금이라도 보존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다행입니다. |
◈ 석호를 찾아서... |
▲ 단국대학교 박물관 앞을 지키는 석호 한 쌍... 왕릉을 지켜야 할 수호물이 박물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
구 영릉 석물 중에 석호상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여주 영릉은 2번을 갔으나 당시는 그 사실을 몰라서 세종전 앞에 있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었습니다. 지금 세종전 사진을 보니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어렵풋이 보이더군요. 그 먼 곳을 다시 갈 수는 없고, 단국대학교에 있다는 석호를 찾아 나섰습니다 |
▲ 조선조 왕릉 석호 중에 최고의 걸작입니다. |
단국대학교는 교통편이 좋지 않더군요. 지하철 타고, 내려서 마을버스 타고, 다시 내려서 한참 동안 언덕을 오르내린 끝에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도착하니 건물 입구 좌우로 배치된 석호상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두 마리의 석호상을 보는 순간 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석호의 크기도 컸지만 당시의 조각술이 뛰어나서 살아서 움직일 것 같았으며, 선이 굵으면서도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더군요. 그 놈 참, 인물도 잘 생겼습니다.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표정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습니다. 어떤 경위로 이 곳에 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구 영릉 석물들은 한 곳으로 모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되 돌렸습니다. |
▲ 얼굴 표정이 살아 있는 듯 합니다만, 어딘가 모르게 슬픈 모습도 엿보입니다. |
◈ 문화재청에 제언은... |
<구 영릉 석물 조사 보고서>
1.문화재 내용
2. 문화재 현황 -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왕릉인 구 영릉을 구성하는 구 영릉 석물들은 여주로 천장될 때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 에 땅에 묻혔다가 1973 ∼1974년 발굴 당시 일부는 망실되고 일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당시, 발굴된 석물 중에 석호상은 1974년 발굴 이후 2기가 현재의 영릉으로 이전되어 갔고, 나머지 2기는 발굴 전 도굴되었다가 회수되어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3. 관리상태
4. 건의사항
☞ 여주 영릉의 세종전 앞에 세워 놓은 석호 2점과 단국대 박물관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석호 2점은 한 곳(세종대왕 기념관)으로 합쳐져야 합니다.
- 조선조 왕릉의 석물들은 따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현재, 세종대왕 기념관에 전시된 석물 12점 이외에 석양 2점과 석마 2점의 행방은 모르나 석호 4점은 여주의 영릉과 단국대 박물관에 있습니다. 이 모든 석물이 어디에 있든지 한 곳에 같이 있어야 왕릉 석물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 특히,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물이지 박물관 앞에 세워 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은 망자를 욕되게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 구 영릉 석물은 조선조 왕릉 석물 중에 최고의 석물입니다. - 저는 석물이 비록, 돌로 만들어졌으나 망자의 영혼이 깃 들어 있는 반 생명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4점의 석호가 제 가족들을 만나 한 곳에서 지낼 수 있기를 바라며, 앞으로는 이산의 아픔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세종대왕의 뜻일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
☞ 관리를 제대로 못할 것 같으면 다시 땅에 묻으십시요.
- 구 영릉 석물들은 500여년을 땅 속에 묻혀 있어서 풍상에 깍이고 훼손되지 않았으나 세상에 나온 30 여년 동안 500년에 겪어야 할 풍상을 다 겪은 것 같습니다. - 관리도 잘 못할거면서 500년을 곤히 잠자고 있던 석물들을 꺼내서 깨지고, 터지고, 없어지고... 늦었지만 지금 이라도 잘 관리될 수 있는 기초는 만들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앞으로는 훼손없이 잘 보존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2004.12.29 - |
◈ 문화재청 답변은... |
☞ 위 제언에 대한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담당자 답변(2005.01.14)은... ㅇ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ㅇ 귀하께서 단국대박물관과 세종대왕유적관리소에 각각 2점씩 보관,전시 중인 구영릉 석호 4점이 세종대 왕기념관으로 회수되어 다른 석물들과 함께 전시되어야 한다고 건의하신 사항에 대해 세종대왕기념사업 회에 문의한 결과, 향후 이 문제에 관해 해당기관과 협의할 계획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ㅇ 앞으로도 문화재 행정발전 및 효율적인 보존과 관리를 위한 지속적인 조언 부탁드립니다. |
◈ 앞으로 어떻게 될까... |
저도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야기 하자면 길고... 한 마디로 갖고 있는 쪽이나 돌려 받아야 할 곳에서 모두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30년 가까이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한 놈이 문제를 제기해서 성가시게 하느냐는 느낌입니다. 제가 조선조 왕릉과 묘지에 관련해서 활동하는 한, 계속 지켜 볼 것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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