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왕릉 여행 [07] 석물(1)

장안봉(微山) 2012. 12. 26. 18:02

왕릉 여행(7) - 석물(1)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이번에는 왕릉의 석물(石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형적인 조선 왕릉의 석물은 1대 태조에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아래에 소개하는 석물들이 대부분 설치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후에 추존되었거나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능에 한 해서는 석물이 적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신라나 백제 왕릉(고분)을 가 보면 외부에서는 커다란 봉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왕릉들은 봉분은 작지만 홍살문에서부터 석물들까지 볼 것들이 많으며,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어서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석물이란 용어보다는 상설(常設)제도나 의물(儀物) 제도(성종 이후)가 바른 용어라고 합니다.(전문가 의견)

1. 곡장(曲墻)

◈ 봉분 정면을 제외한 3면(동서북) 전체를 담장으로 둘러 쌓은 것곡장이라고 합니다. 곡장은 왕실의 묘     인 능(陵)과 원(園)에만 설치할 수 있습니다. 묘에 담을 두른 것은 곡담, 흙으로 쌓은 것은 산담이라고 이     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곡장은 기본적으로 3면오로 되어 있으나 양쪽 모서리에 어느 정도 면을 넣어서 5면으로 보이는 곳이 대     부분 입니다.

▲ 태릉 곡장(3면)

▲ 여주 영릉 곡장

▲ 건원릉의 능침

2. 능침(陵寢)

능침병풍석 위에 잔디가 있는 봉분을 말합니다.

 

☞ 위 오른쪽 사진은 건원릉의 능침 사진이며, 건원릉의 능침에는 태조의 유언으로 고향(함흥)의 억새풀을     가져다 심었다고 하며, 600 여년 동안 이어온 억새풀은 지금도 무성합니다. 능침을 능상(陵上)이라고도     합니다.

 

☞ 2004년 가을에 가보니 능침에 억새가 무성하더군요. 능침에 억새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볼만     합니다. 건원릉편에서 억새 사진을 여러 장 올려 놓겠습니다.

3. 병풍석(屛風石)

봉분 밑을 12각(12지신상이 새겨짐)의 병풍석으로 둘러싸 봉분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 병풍석이 있는 쌍릉의 경우에는 병풍석과 병풍석 사이의 하단 중앙에 연결된 둥그런 것이 영혼들끼리 왕     래할 수 있도록 만든 통로를 혼도(?)라고 합니다.

 

☞ 병풍석은 인석(引石), 만석(滿石), 우석(隅石), 면석(面石), 지대석(地臺石), 박석(薄石)으로 구분되며,아     래의 사진에서 능침에서 사각의 튀어 나온것이 인석, 봉분의 맨 윗부분 두른 것을 만석, 중앙에 있는 것     이 면석이며, 면석과 면석을 이어주는 각이진 부분을 우석, 만석처럼 아랫 부분을 두른 것을 지대석, 그     리고 맨 아래 바닥을 넓게 두른 것을 박석이라고 합니다. 저도 일일이 다 기억 못합니다.

▲ 병풍석

▲ 병풍석이 없는 왕릉(서오릉 홍릉)

▲ 혼통로(혼도?)

▼인석/만석/면석/우석/지대석/박석

▼ 인석에 새겨진 문양

▼ 면석의 12지신상

4. 난간석(欄干石)

봉분이나 병풍석 주위를 다시 두룬 것난간석이라고 합니다.

 

☞ 난간석의 높은 기둥은 석주(石柱), 석주를 가로질러 진입을 가로막은 것은 죽석(竹石), 죽석의 중간을 받     치고 있는 작은 기둥은 동자석주(童子石柱)라고 합니다.

 

☞ 세조의 유언으로 세조 이후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는 대신에 병풍석에 새겼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난간석의 12 동자석주에 옮겨서 새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조 이후에도 권력의 힘이 강했던 왕들은 바     로 윗대의 왕릉에 병풍석을 만들기도 했더군요.

▲ 난간석

▲ 석주와 죽석

▲ 동자석주

5.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 봉분을 등지고 호랑이와 양이 좌우로 4마리씩 배치되어 능을 지키는 수호물 역할을 하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신문 기사에서는 호석(虎石)은     땅 위의 잡것을, 양석(羊石)은 땅 속의 잡것을 누른다고도 쓰여 있더군요.

 

☞ 위치는 앞에서부터 석양, 석호, 석양, 석호 순으로 한 쪽에 4마리씩 능침 좌우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석호와 석양 등의 동물들을 석수(石獸)라고 일컬으며, 석호, 석양을 호석, 양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 석호

▲ 석양

▲ 석호 석양의 배열(경종의 의릉)

6. 혼유석(魂遊石)

◈ 일반 묘에서는 상석(床石)이라고 하며, 왕릉에서는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내므로 왕릉의 상석은 혼령들     이 나와서 쉬는 곳이라고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합니다.

 

족석(足石)은 상석의 사면을 괴고 있는 북 모양의 돌로서 고석(鼓石)이라고도 하며, 한 개의 족석 4면에     는 귀면(鬼面)을 새겨 넣어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고석의 4면에는 여의두형(如意頭形)의 고리를 물고 있는 사자두형(獅子頭形)의 귀면(鬼面)이 새겨져 있     는데, 이 귀면을 나어두(羅魚頭)라고 하며, 유독, 창릉의 족석은 문고리 모양(아래 우측 사진)을 하여 악     기의 북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나어두? 저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 혼유석(표준)

▲ 족석과 귀면

▲ 창릉의 족석

또한, 정릉(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은 태종에 의해서 덕수궁 옆의 중구 정동에서 지금의 정릉으로 강제로 천장되면서 당시 석물들을 광교의 석재로 이용하였으며,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설로만 알려졌었던 정릉의 병풍석 면석이 발견되어 현재, 복원된 쳥계천의 광통교에 가보시면 정릉의 석물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정릉에는 당시 석물로는 족석 2개 장명등만이 조선 개국 이후의 첫 번째로 조성된 왕릉으로서 그 옛날의 화려했던 면모를 다소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한의 42개 왕릉 중에 정릉만이 유일하게 상석을 받치고 있는족석이 2개뿐(좌측 사진)입니다. 조금 불안해 보입니다.

7. 망주석(望柱石)

혼령이 무덤을 찾을때 멀리서도     찾기 쉬우라고 곡장 안쪽 좌우     로 한 개씩 세워 놓았습니다.

 

☞ 공순영릉의 공릉은 망주석도 없     이 단촐합니다. 망주석이 없는     왕릉은 이 곳 뿐인가 합니다.

▲ 공순영릉의 공릉 전경

▲ 망주석

▲ 망주석에 새겨진 동물(세호)

☞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細虎)도 처음에는 잘 몰랐었습니다. 이 세호
    에 대해서 논란도 많더군요. 세호는 작은 동물 모양으로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호랑이 새끼니 아니니, 또는 무슨 동물이니...

 

    또한, 세호의 머리가 어느 쪽은 위로 올라가고(상행) 어느 쪽은 아래     로 내려가고(하행), 세호에 작은 구멍은 왜 뚫렸는니 말들이 많습니     다만, 아직 자세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 제가 보기에는 세호의 조각도 조선 초기, 중기, 후기로 가면서 조금     씩 변해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초기에는 형태가 두리뭉실 하면서 세     호 중앙 밑은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구멍이 넓게 뚫려 있으며, 중기     로 접어 들면서 형태와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고, 중앙의 구멍은 뚫린     듯 안뚫린 듯 흔적만 보입니다.

 

    그리고 후기로 가면서 세호의 모양과 형태가 명확해지며, 중앙에 구     멍은 없어집니다. 대부분이 서쪽 망주석의 세호가 하행하고, 동쪽 망     주석의 세호가 상행합니다만, 전부 그렇지도 않으며, 능역의 풍수나     기의 흐름에 따라서 반대일 수도, 전부 상행, 하행일 수도 있습니다.

8. 장명등(長明燈)

◈ 장명등은 혼유석 한 단 아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징적인 등불 역할을 합니다. 상석 바로 몇 미터     앞에 있으나 예외로 10 미터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곳도 있습니다.

 

☞ 장명등의 높이는 대부분 사람 키 정도되나 여주 녕릉의 장명등은 높이와 둘레가 다른 능에 비해서 2배     이상은 큰 것 같습니다.(장명등 안을 들여다 보는 청운당과 비교해 보시면 크기를 가늠하실 수 있음)

 

☞ 조선 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비의 능인 정릉의 장명등은 고려 왕릉의 규범을 따라서 사각 장명등이며,     조선 전기에는 팔각 장명등이었다가 제19대 숙종의 명릉에서부터는 다시 사각 장명등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각 장명등 보다 팔각 장명등이 더 크고 멋있더군요.

 

☞ 왕릉 중에 장명등이 없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동구릉에 있는 혜릉입니다. 혼유석 바로 앞에 장명     등 밑둥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고 언제인지는 모르나 훼손되어 없어진 것으     로 추측됩니다.

▲ 장명등(일반적인 것)

▲ 여주 녕릉의 장명등

▲ 정릉의 장명등

9.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문인석관(冠)을 쓰고 홀(笏)을 쥐고 항상 무인석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 우로 한 쌍이 있습니다.

 

무인석갑옷에 검을 들고 문인석 다음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 우로 한 쌍이 있습니다.

 

석마문인석과 무인석 뒤에 한 마리씩 있으며, 마석이라고도 합니다.

 

☞ 석마 다리 부분 네모에 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 이유는? 묘의 주인을 태우고 하늘로 가다가 배가 고     프면 말이 먹을 수 있는 먹이라더군요. 믿거나 말거나...

☞ 문,무인석을 문관석인(文官石     人), 무관석인(武官石人)이라고     도 하며, 문, 무인석을 통틀어서     석인이라고도 합니다.

 

☞ 문, 무인석의 코가 깨져있는 왕     릉이 여러 곳 있었으며, 보기에     안 좋더군요.

▲ 석마/다리 부분에 새겨진 문양▼

▲ 문인석

▲ 무인석

☞ 검도 관련 블로그에 고죽(孤竹)이란 필명으로 조선조 왕릉에 대해     서 글을 쓰신 분이 계십니다.

 

    조선조 42개 왕릉을 답사하시고, 특히 무인석에 대한 일람표까지     만들어 무인석에 새겨진 검을 일일이 사진으로 비교 소개한 곳이 있     었는데, 그 사이트에 다시 가보니 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단한 분이시던데... 혹시, 고죽선생님께서 이 글을 보시면 연락     한 번 주세요.

10. 장대석(長臺石)

◈ 왕릉의 능원을 3단계로 나누어 초계(初階), 중계(中階), 하계(下階) 구분합니다. 각 단계의 구분을 위     해서 돌을 가로로 길게 놓았으며, 이것을 장대석라고 합니다.

 

☞ 능 바로 아래의 첫 번째 장대석을 초계, 두 번째 장대석을 중계, 마지막 장대석을 하계라고 합니다.

 

☞ 각 계마다 놓이는 석물을 구분하여 초계에는 망주석과 혼유석을, 중계에는 문인석과 장명등을, 하계에는     무인석을 배치 하였습니다. 아래 좌측 사진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겁니다. 대부분 장대석이 3단계로 갖추     어져 있으나 장대석이 1단이나 2단인 곳도 일부 있습니다.

▲ 장대석(가로 3줄, 희미하게 보임)

▲ 건원릉에 있는 정중석

▲ 여주 영릉의 용미

11. 정중석(正中石)

◈ 장명등 앞에 네모난 석판이 땅에 박혀 있는 것을 정중석이라고 합니다. 위로 돌출없이 지면 높이와 거의     같습니다. 고려 왕릉의 석등 앞에 있는 배례석이 조선 초기에 따라 온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고 합니다.

 

☞ 정중석은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과 헌인릉의 헌릉에 정중석이 있으나 없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12. 용미(龍尾)

곡장 뒤의 언덕을 용의 꼬리같이 만들어 놓았다고 해서 용미라고 합니다.

 

☞ 우리들이 보아왔던 일반인들의 묘도 봉분 뒤를 길게 만들어 놓은 것을 용미라고 합니다. 용미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빗물이 봉분 좌우로 흐르도록 무덤의 뒤를 꼬리처럼 쌓아 올린 것을 말합니다.

황제릉의 석물들은...

☞ 이미 말씀드렸던 홍유릉은 중국 황제의 능제를 본 따서 조선조 왕릉에 비하여 석물의 크기나 종류, 인물,     동물의 형태가 많이 다릅니다. 홍유릉의 유릉에 있는 석물 사진들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 유릉의 석물들은 그나마 균형미가 있고, 문무인석의 얼굴 모습이 우리 눈에 익은 모습인데, 홍릉의 문무     인석은 균형미도 없고, 우리들이 보기에는 석물들이 조금 이질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유릉의 석물은     일본인에 의해서 설계, 조각되었다는 것이 밝혀 졌는데, 자세한 내용은 유릉편에서 소개하겠습니다.

▲ 홍유릉의 홍릉 석물

▲ 홍유릉의 유릉 전경

▲ 홍유릉의 유릉 석물

예외적인 것은...

☞ 헌인릉의 헌릉만은 석물의 수가 일반 왕릉에 비해 2배입니다. 문, 무인과 석마는 물론, 봉분 주위에 있는     석양, 석호의 수도 다른 왕릉의 두 배인 16마리로 봉분 주위가 빽빽할 정도입니다.

 

☞ 재위시에 힘이 있었던 왕들의 왕릉은 일반 왕릉의 석물에 비해 2배 가량 큽니다.(태강릉, 영녕릉 등)

 

☞ 김포의 장릉은 추존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난간석만 제외하고는 석물들이 모두 조성되었으며, 일반 왕릉     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고, 오히려 석물의 크기가 더 크더군요

 

☞ 석물은 조선 전기 왕릉의 석물들이 크고 화려하며, 조선 중, 후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작아지고 석물들의     형태나 모양이 조잡해지는 것을 느끼겠더군요.

▲ 헌인릉의 헌릉(석물 두 쌍씩)

▲ 태강릉의 태릉

▲ 김포의 장릉(추존 원종)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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