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택주(貞愼宅主) 권씨(權氏) 묘지명(墓誌銘) 병서(竝序)
부인의 성은 권씨(權氏)이니, 원 나라로부터 한림응봉문자 고려국 문하시중(翰林應奉文字高麗國門下侍中)에 제수된 한산백(韓山伯) 목은(牧隱) 이공(李公) 휘 색(穡)의 아내요, 원 나라로부터 명위장군 제군만호부만호 지밀직사사 화원군(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知密直司事花原君)에 제수된 휘 중달(仲達)의 딸이요, 원 나라로부터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추성동덕 협찬공신도 첨의우정승 예천부원군(朝列大夫太子左贊善推誠同德協贊功臣都僉議右政丞醴川府院君)에 제수된 문탄공(文坦公) 휘 한공(漢功)의 손녀요,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치사한 휘 진(鎭)의 증손녀이다. 화원군이 봉익대부 검교선부전서행상호군(奉翊大夫檢校選部典書行上護軍) 윤길손(尹吉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지순(至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신미년(충혜왕 1, 1331) 10월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온순하여 부모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시집갈 때가 되자 마땅한 혼처를 택하여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신사(충혜왕 복위 2, 1341)에 목은(牧隱) 이공(李公)에게 시집보냈으니, 공은 곧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시호)의 외아들이다. 당시 문효공은 문장(文章)으로 재상의 지위에 있었는데, 공은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이미 성취되매 그 명성이 자자하여 당시 좋은 사윗감을 고르는 자는 다투어 공을 들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혼인하던 날 저녁까지 다투었는데, 마침내 화원군(花原君)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夫人)은 친가에 있을 때는 효녀(孝女)가 되고, 공에게 시집와서는 영부(令婦)가 되어, 양가(兩家)에서는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공은 학문에 전심하고 집안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부인 역시 권면하여 일찍이 일로써 공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아니하므로 공의 학문이 크게 진취되었다. 원 나라에 들어가 갑과(甲科)에 뽑히므로 그 화려한 명성이 온 천하에 파다하였는데, 그 자취를 거두어 귀국하여서는 일국 유림의 으뜸이 되었다. 비록 공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나 부인의 도움 역시 많았다.
공민왕이 크게 존경하여 오랫동안 재상의 지위에 두고 여러 번 공거(貢擧)를 맡겼으며, 만년에 또 덕망으로 총재(?宰)에 앉힘으로써 부인이 함께 그 영화를 누리며 택주(宅主)에 봉해졌다. 그러나 부인은 청백하고 검소함으로 자수(自守)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이 하였다.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고 부지런함으로 내정을 다스렸다. 친척을 접대함에는 두텁고 고르게 하며, 자손을 가르침에는 자애롭고 법도가 있게 하며, 행동은 예법을 따르므로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 그리고 공이 병에 걸려 고통을 겪을 때와 참소를 입어 귀양갈 때에 부인 역시 초조한 마음으로 적극 힘써 구하여 마침내 환란을 면하게 되었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임신년(태조 1, 1392)에 공과 함께 한산(韓山) 시골집에 돌아가 갑술년(태조 3, 1394) 8월 초1일에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향년 64세였다. 상이 부음(訃音)을 듣고 애도하며 부의를 내렸다. 10월에 한산 가지원(加智原) 선영의 발치에 장례하였다.
부인은 3남을 낳았으니, 맏아들 종덕(種德)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이고, 둘째 아들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인데 모두 먼저 죽었으며, 셋째 아들 종선(種善)은 전교령(典敎令)이다. 손자와 손녀 15명은 목은공(牧隱公) 묘비명(墓碑銘)에 자세히 나열하였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부인을 장례한 지 3년이 지난 병자년 여름에 목은공이 또 서거하여 합장한 다음에, 그 손자 고공좌랑(考功佐郞) 맹균(孟畇)이 경사(京師)에 와 근(近)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우리의 시조 태사공(太師公)이 고려(高麗)의 태조(太祖)를 도운 공로로 사성(賜姓)을 받고 이봉(移封)된 이후 대대로 그 미덕을 이루었는데, 우리 문정공(文貞公 권보(權溥))과 문탄공(文坦公)이 동등한 덕망으로 함께 총상(?相)의 지위에 있으므로 양가(兩家)의 자손이 가장 크게 번창하였다. 나는 부인의 족속(族屬)으로 촌수는 비록 머나 일가이며, 또 공의 문인이다. 청해 온 명(銘)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옛날의 태사공(太師公)은 신라(新羅)의 김씨(金氏)인데, 고려 태조를 도우므로 왕은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겼도다. 복주(福州)에 이봉(移封)하고 권씨로 사성(賜姓)하니, 그 은택이 면면하여 지금까지 뻗쳤도다. 문탄공과 우리 문정공이 동등한 명성과 덕망으로 연이어 국정(國政)을 잡았도다. 양가의 자손이 더욱 번창하였는데, 부인을 낳은 분은 바로 화원군(花原君)이로다. 덕을 쌓은 가문에서 현숙하게 길러 군자(君子)의 배필을 삼으니, 그 가정이 화목하도다. 남편을 권면하여 학문을 대성(大成)시키고, 곧 재상의 지위에 앉혀 그 훌륭한 명성을 드날렸도다. 은례(恩禮)가 오래도록 두텁고 복록(福祿)이 모인바라, 규문(閨門)이 청아(淸雅)하고 화목하며 검소한 덕행이 높았도다. 아들과 손자 또한 훌륭한 벼슬을 지냈는데, 유감이 있다면 두 번이나 아들의 상사를 당함이로다. 춘추 60세에 홀연 유택(幽宅)으로 돌아가니, 돌에 이 말을 새겨 길이 부칙(婦則)을 보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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