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가정 이곡.목은 이색

[스크랩] 이색(李穡)은 27세의 나이로 제과(制科)에수석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송와잡기》 -

장안봉(微山) 2013. 5. 28. 23:17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Ⅰ 중국의 과거에 응시한 일. 자제의 중국 유학을 중국에서 허락하지 않은 일 
 

당 나라 장경(長慶) 초년에 김운경(金雲卿)이란 자가 처음으로 신라의 빈공(賓貢) 으로서 두사례(杜師禮)의 방(榜)에 이름이 올랐으며, 당 나라 말기까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자는 58명이었고 오대(五代) 시대에 후량(後梁)ㆍ후당(後唐)에 가서 또 31명이 급제하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역시 송 나라에 빈공을 보내었는데, 김행성(金行成)ㆍ왕림(王琳)ㆍ최한(崔罕)ㆍ김성적(金成績)ㆍ강무민(康撫民)ㆍ권적(權適)ㆍ김단(金端)ㆍ조석(趙奭)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라는 것은 매양 따로 시험을 보여 그 이름을 방(榜) 끝에 붙였는데, 원(元) 나라 이후에는 중국인과 함께 시험을 보아 금방(金榜)에 이름을 같이 썼다고 한다. 최해(崔瀣)의 기록
○ 신라 때에 당 나라에 가서 급제한 사람으로 성명을 알 수 있는 자는, 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치원(崔致遠)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뿐이다. 최해(崔瀣)의 기록
○ 고려 시대에 원(元) 나라 과거에 급제한 자는 안진(安震)ㆍ최해(崔瀣)ㆍ안축(安軸)ㆍ이곡(李穀)ㆍ이인복(李仁復)ㆍ안보(安輔)ㆍ윤안지(尹安之)ㆍ이색(李穡)이었다. 《문헌비고》
○ 공민왕(恭愍王) 19년 경술 홍무(洪武) 3년 에 명(明) 나라 태조가 시의사인(侍儀舍人) 복겸(卜謙)을 보내어 과거 격식(格式)을 반포하는 조칙(詔勅)을 가져왔으므로 중서성(中書省)에서 이자(移咨)하였더니,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뽑힌 사람에게 공거(公據 증명(證明))를 내주어 남경(南京)에 가서 회시(會試)를 보게 하였다. 이에 향시에 합격한 자인 박실(朴實)ㆍ김도(金濤)ㆍ유백유(柳伯濡) 등을 보내어 남경에 가서 회시에 응시케 하였더니 신해년에 김도가 제삼갑(第三甲)에 합격하였다. 《고사촬요》
○ 21년 임자에 홍사범(洪師範)을 명 나라에 보내어 자제들을 명 나라에 유학시킬 것을 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계축년 향시(鄕試)에 합격한 김잠(金潛)ㆍ송문준(宋文中)ㆍ조신(曺信) 등을 보내어 남경에 가서 회시에 응시케 하였는데, 바닷길에서 태풍을 만나 김잠과 조신이 빠져 죽었다. 재차 송문중을 보내어 응시케 하였으나 시험 기간 내에 도착하지 못하여 되돌아 왔다. 《고사촬요》

 


○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36세 때에 원(元) 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 이갑(二甲)에 합격하였는데, 이전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갑에 합격한 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인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27세의 나이로 제과(制科)에 응시하였는데, 고시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고 그를 수석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당시 의논이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여 낮추어 제이갑으로 합격시켰다. 《송와잡기》

 


○ 세종 15년 계축에 사신 박안신(朴安臣)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올 때, 조칙(詔勅)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주문(奏文)을 받아 보니 자제들을 보내어 북경의 국학(國學)이나 혹은 요동(遼東)의 향학(鄕學)에서 공부시키고자 하니, 착함에 힘쓰고 도(道)를 구하는 마음을 잘 알겠으나 다만 산천이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가 달라서 자제들이 와도 혹시 오래 객지에 있지 못할 듯하며, 혹은 부모와 자식이 생각하는 정(情)을 양쪽 다 참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이제 왕(王)에게 《오경사서대전(五經四書大全)》 한 부(部)를 주어 자제를 가르치는 데 쓰게 한다.” 하였다. 《고사촬요》
○ 세조 을유년에 사신 김예몽(金禮蒙)이 돌아올 때, 칙유(勅諭)를 가지고 왔는데, 그 칙유에 “이제 왕의 주문(奏文)을 받아보고, 나라가 해외에 있어서 문학이 정(精)하지 못하고, 이문(吏文)과 한음(漢音 중국 음운(音韻))에 밝지 못하므로 역대의 전례에 따라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고 싶다고 한 것은 잘 알았다. 전대(前代)의 제도에 혹 8 재자(才子)를 보내어 가서 가르치게 하거나, 혹은 자제를 파견하여 입학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왕림(王琳) 등이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간 것이라든가 한방(韓昉)의 무리가 일이 있어 잠깐 머무른 것 같은 예는 대개 전에는 그곳의 문학이 성하지 못하였고, 또 중국의 과장(誇張)하기를 좋아하는 임금들이 그것을 가지고 미관(美觀)을 삼으려는 것뿐이었다. 우리 조정에서는 조종조 이래로 이런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고, 더욱이 지금 왕의 나라는 시(詩)ㆍ서(書)ㆍ예의(禮儀)의 교(敎)를 익혀 온 전통이 있어서, 표(表)ㆍ전(箋)ㆍ장주(章奏)와 이첩[行移]하는 이문(吏文)이 모두 예식(禮式)에 맞는다. 그래서 비록 한음(漢音)에 다 통하지 못하더라도 통사(通事)가 번역하여 알지 못할 것이 없으니, 하필 자제들이 와서 배운 후에야 틀림이 없게 되랴. 짐(朕)은 조종의 제도를 따르고 헛된 미관을 본뜨고 싶지 않으니, 왕도 역시 각별히 옛 법을 지켜서 나라 안의 자제를 통솔하여 교육시켜 경적(經籍)에 뜻을 돈독히 하면 저절로 여사(餘師)가 있어 인재를 성취하기에 어려울 염려도 없고, 사대(事大)하는 데 장애가 있을 걱정도 없으리라.” 하였다. 《패관잡기》
○ 우리나라 선비가 중국에 가서 응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고려 말년에 홍윤(洪倫)이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김의(金義)가 중국 사신을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진실로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만약 이런 사정을 들어 청한다면 중국에서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이 좁고 옹졸하여 기특한 기질이 없어서 멀리 유학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지금에 이르도록 이 악명(惡名)을 입어서 빈공과(賓貢科)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탄스럽다. 허균(許筠)이 일찍이 낭중(郞中) 가유약(賈維?)에게 물었더니 그의 말이, “안남(安南)과 유구(琉球)에서는 모두 응시하고 있는데, 안남인 진유(陳儒)는 정덕(正德) 연간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도 어사(右都御史)이며, 완악(玩?)은 가정(嘉靖) 연간에 급제하여 공부 우시랑(工部右侍郞)이 되었고, 손응오(孫應鰲)는 도망하여 광서성(廣西省)에 살았는데, 역시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시랑이 되었으며, 지금도 역시 빈공과를 본 사람으로 주현관(州縣官)이 된 자가 5명이나 된다.” 하였다. 《지봉유설》


[주D-001]빈공(賓貢) : 외국에서 선비를 중국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경적(經籍)에 …… 있어 : 맹자가 자기에게 배우러 온 사람에게 “나한테 배울 것 없이 돌아가서 구하면 스승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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