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당(簡易堂) 묘갈(墓碣)
공은 휘가 립(?), 자가 입지(立之), 성이 최씨(崔氏)이며, 아버지 자양(自陽)은 국자 진사(國子進士)였다. 공은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말도 잘 못하여 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으나, 겨우 성동(成童)에 태학(太學)에 오르고 문장이 날로 세상에 유명해졌으며, 20세에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였으니, 바로 명종 14년이었다. 전후 일곱 고을을 다스렸고 선조 26년(1593)에는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
그후 형조 참판이 되어서는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날로 명 나라 천자에게 구원을 청해서 크게 군사를 내어 왜병을 정벌케 하니, 상은 항시 공에게 분담한 직책에 구애되지 말게 하고 승문원(承文院)의 일까지 겸하여 사명(詞命)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 자주(咨奏)한 글이 대소 합하여 44건이요, 전후 중국을 세 번이나 들어가서 상서한 것이 33건이었는데, 그중 4건만이 《회전(會典)》을 반행(頒行)하는 일이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가 나라가 존재하느냐 망하느냐에 관한 급박한 것이었으므로, 그 글이 구정(九鼎)ㆍ대려(大呂)보다 중하다.
그후 공은 나아가 간성 태수(杆城太守)로 있으면서 《주역구결(周易口訣)》 4권을 지어 상께 올리고, 홍범학기(洪範學記) 5백여 언을 저술하였다. 공은 평생 반고(班固)와 한유(韓愈)의 글을 좋아하여 그 문장이 깊고 간결하며 고아하여서 법받을 만하니, 동방 문학에서 1천 년에 단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공이 73세에 돌아가니 고양(高陽)의 부서(鳧嶼)에 안장하였다. 처음 공의 별호는 동고(東皐)였는데, 뒤에 간이(簡易)라고 바꾸었다 한다. 아들 동망(東望) 또한 문학으로 진출하여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죽었는데 후사가 없다. 서자(庶子)가 있으니 동문(東聞)ㆍ동관(東觀) 두 사람이다. 인조 때 사신(詞臣) 이정귀(李廷龜)가 상(上)에게 아뢰기를,
“최립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는데, 그 글이 민몰되어 전하지 못하니 책으로 간행하소서.”
하여, 공이 돌아간 지 40년 만에 처음으로 그 글이 간행되니, 《간이당유문(簡易堂遺文)》 29권이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고려 중세 이후로 / 自高麗中世以後
문학이 심히 성하여 / 文學甚盛
이 상국과 이목은이 가장 드러났는데 / 李相國牧隱最著聞
이 상국이 특히 웅위하였고 / 李相國特雄偉
본조 명가의 저작도 / 本朝諸名家作者
또한 융성하였지만 / 亦不爲不盛
간이의 작품이 / 而簡易諸作
특별히 웅건하고 간오하여 홀로 뛰어났으니 / 特?健簡奧獨傑然
일천 년에 단 한 사람 될 만하도다 / 可爲千載一人云
[주D-001]명종 14년 : 과방고(科榜考)와 인물고(人物考)에 따르면, 최립(崔?)이 문과(文科)에 급제한 것은 명종 16년(1561) 신유 식년(辛酉式年)이고 14년(1559)이 아니니, 오자가 있는 듯하다.
[주D-002]회전(會典) : 명(明) 나라에서 편찬한 종합적인 법전(法典)이다. 주로 행정 규정이며, 계통적으로는 《당육전(唐六典)》 등의 법전 형식을 따랐다.
[주D-003]구정(九鼎)ㆍ대려(大呂) : 구정은 우왕(禹王) 때 주조한 솥이고, 대려는 큰 종으로 주묘(周廟)의 보기(寶器)인데, 전하여 가장 중한 지위의 비유로 쓰인다.
[주D-004]이 상국(李相國)과 이목은(李牧隱) : 이 상국은 이규보(李奎報)를 가리키고, 목은(牧隱)은 이색(李穡)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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