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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운곡 선생(耘谷先生) 묘명(墓銘) -미수기언(眉?記言) 허목(許穆)-

장안봉(微山) 2013. 5. 28. 22:54

운곡 선생(耘谷先生) 묘명(墓銘)

 

 

선생은 원주인(原州人)으로, 성은 원씨(元氏), 휘는 천석(天錫), 자는 자정(子正)이다. 고려의 국자 진사(國子進士)로 고려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은거하여 지절(志節)을 지키며 호를 운곡 선생이라고 하더니,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雉嶽山)에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태종이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는데, 태종은 그의 의리를 고상하게 여겨서 동쪽으로 유람할 때 그의 집에 행차하였더니 선생은 숨어 버리고 뵙지를 않았다. 태종은 시냇가 바위 위로 내려가서 그 집을 지키는 노파에게 후한 상을 하사하고 그 아들인 형()에게 기천 감무(基川監務)를 제수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이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르는데, 그 대는 치악산의 각림사(覺林寺) 옆에 있다. 지금 원주(原州) 치소(治所)에서 동으로 10리 떨어진 석경(石鏡) 마을에 운곡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그 앞에 또 하나의 분묘는 부인인 유인(孺人)의 묘소라고 한다.

처음, 선생에게는 장서(藏書) 6책이 있었으니, 이는 망국(亡國 고려)의 고사를 말한 것이었다. 자손들에게 망녕되이 펼쳐 보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나 그 책이 여러 대를 전하여 자손 중에 한 사람이 가만히 펼쳐 보고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우리 집안이 멸족된다.

하고 들어다가 불살랐으므로 그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남긴 시집이 있으니 이른바 《시사(詩史)》란 것이다. 나는 들으니 ‘군자는 숨어 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며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 백이(伯夷)의 말에,

 

“옛날 선비는 치세(治世)를 만나면 그 직임을 피하지 않았고, 난세를 만나면 구차하게 있으려고 아니하였다. 지금은 천하가 어두우니 그를 피하여 나의 행실이나 깨끗이 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으므로, 그 열전(列傳)에 칭송하기를,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디 조락(凋落)한다는 것을 알고, 온 천하가 혼탁한 뒤에야 청렴한 선비가 더욱 드러난다.

하였고, 맹자도,

 

“백이(伯夷)는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아니하며, 치세에는 나아가고 난세에는 물러나니 백이는 성인의 청()한 자이다.

고 하였으니, 선생은 아마도 백이와 같은 유라고 하겠다. 고을 사람이 선생을 위하여 사우(祠宇)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니, 그 사우는 원주(原州) 북쪽 30리 칠봉(七峯) 마을에 있다.

선생의 세계를 상고하면, 시조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이다. 극부가 종유(宗儒)를 낳고, 종유가 창정(倉正) 보령(寶齡)을 낳고, 보령이 창정 시준(時俊)을 낳고, 시준이 정용별장(精勇別將) ()을 낳고, 열이 종부시 영(宗簿寺令) 윤적(允迪)을 낳았으며, 윤적은 천상(天常)ㆍ천석(天錫)ㆍ천우(天佑)를 낳았다. 천상은 진사(進士)를 지냈다. 혹은 ‘본조(本朝)에 벼슬하여 드러났다.’ 하나 참고할 데가 없다. 천우는 현령(縣令)을 지냈다. 부인인 유인(孺人) 원씨(元氏)는 종부시 영 광명(廣明)의 딸인데, 같은 원씨는 아니다. 원주에 두 원씨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장남인 지()는 직장동정(直長同正), 차남인 형()은 기천 감무(基川監務)를 지냈다. 선생의 후손이 매우 번성한데 그중 기천 감무의 후예가 가장 많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속세를 떠나서 암혈에 사는 선비 / 巖穴之士

나아가고 머무름 때가 있나니 / 趣舍有時

세상에는 나서지 않을지라도 / 縱不列於世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 能不降其志

그 몸을 욕되게 아니해서 / 不辱其身

후세에 교훈이 되게 한다면 / 敎立於後世

우직이제와 같을 것이리 / 則禹稷夷齊一也

, 선생은 / 先生

백대의 스승이 될 만하도다 / 可爲百代之師者也

 

 

[D-001]망국(亡國)의 고사 :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의하면, 이 책은 고려 말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인데, 사실 그대로 곧게 쓰고 기휘한 것이 없어서 내용이 지금의 《고려사》와는 대부분 같지 않다고 한다.

[D-002]시사(詩史) : 운곡(耘谷) 시 가운데는 후세에서 잘 알 수 없는 당시의 사적이 직필(直筆)로 적혀 있는데, 가장 뚜렷한 것은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아들이란 것이다. 그 시의 제목은 ‘복문주상전하천우강화원자즉위유감(伏聞主上殿下遷于江華元子卽位有感)’이라는 것이며, 그 밖에도 최영(崔瑩)이 형 받은 일, 이색(李穡)이 귀양 간 일들이 적혀 있어서 시사라고 한다. 《燃藜室記述 卷1 太祖朝故事本末 高麗守節諸臣附》 《운곡행록(耘谷行錄)》 권3 및 《상촌고(象村稿)》 권52 청창연담 하(晴窓軟談下) 등에 실려 있다.

[D-003]우직이제(禹稷夷齊) : 하우씨(夏禹氏)ㆍ후직(后稷)ㆍ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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