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점술(占術 divination)
1) 개념
고대인들은 어떠한 특이한 일이 발생하면, 그것은 곧 미래에 발생할 어떠한 일의 전조라 믿고, 사전의 일을 통하여 미래의 일을 추측하거나 판단하였다. 이것이 곧 점술이며, 사전에 나타난 일들이 곧 예조(豫兆)이다. 여기에서의 예조는 인과 관계로 치면 인(因:원인)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점술이란 인과관계의 인으로부터 과(果:결과)를 미리 알아내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인에 해당하는 예조를 기초로 한 결과의 추측, 즉 점술의 기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축적된 지식의 소산이다.
2) 점술의 역사
점술의 역사는 인류생활과 더불어 찾아볼 수 있고, 인류의 문명은 점복의 발달과 더불어 병행되어왔다. 원래 절술은 개인적·심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집단생활이 시작되고 통솔자가 나타나면서 접술의 결과를 통일하여야 할 필요가 생겼다. 여기서 집단 전체의 이해에 관한 것은 그 대표자가 일괄하여 점을 침으로써 어떠한 통일된 결과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이에 마침내 점술자는 그 집단의 대표적인 주술자로서 그 집단을 통솔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점복은 주술적 행위이므로 양(洋)의 동서, 문화정도의 고저에 관계없이 존재하였다. 유럽에서는 바빌로니아에서 발생하였다고 하는 점술과 동물의 간장 등에 의하여 점치는 내장점(內臟占)이 일찍이 발달하였다. 또, 점장(占杖)에 의하여 지하수나 광맥을 찾아내는 점법, 무심히 책을 펼쳐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지침으로 점치는 개전점(開典占)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서로써 개전점을 쳤는데 이를 성서점이라고도 하였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인도의 점성술, 중국의 복서(卜筮)등이 발달하였다. 중국의 대표적인 점복은 복서로서, 복은 수골(獸骨)이나 귀갑(龜甲)을 사용하여 행하는 점을 말하며, 서는 서죽(筮竹)과 산목(算木)을 사용하는 점을 말한다. 수골은 견갑골(肩甲骨), 구는 복부의 갑(甲)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불에 구워 트는 모양으로 미래의 길흉을 점쳤다. 서는 음양의 산목과 서죽을 산술적 조작에 기초하여 그 결합에 따라 판단하는 점이다. 이때 그 판단의 전거인 <역경 (易經)>은 오경의 하나로서 고래로 매우 중요시되어왔따. <역경>의 원리를 응용하고, 서죽과 산목을 이용한 <주역(周易)>은 민간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오행설이나 간지설(干支說)을 받아들여 몇 개의 유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서죽이나 산목을 사용하지 않고 전(錢) 등을 이용하는 역점(易占)이 일반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점법 이외에도 각종 점성술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의 점법도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미 상고시대에서부터 복(卜), 즉 수골이나 귀갑을 사용하는 점이 있었다. 그 한예로 부여의 민속을 보면,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톱을 보고 전쟁의 승패를 미리 점쳤다. 즉, 도살한 소의 발톱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점쳤다.
이와 같이 무인에 의하여 미래를 점친 예는 고래 어느 시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3) 점술의 방식과 종류
점술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과학적인 증거는 제시된 바 없다. 점술의 방식은 귀납적·해석적·직관적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귀납적 방식과 해석적 방식에 의한 점술은 외부 사실로부터 추론하는 방법이다. 해석적 점술에서 사건의 조작은 필수적이며 극적인 요소이다. 전형적인 예를 든다면, 점쟁이가 어떤 사물을 한 다발정도 땅에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그 사물이 놓여있는 최종적인 배치를 해석함으로써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여러 문화권에서 사용되어왔다. 예를 들면 제비 던지기는 고대사회에서 흔히 행해졌으며, 오늘날에는 주사위 던지기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제비와 숫자를 사용하여<주역(周易)>을 해석했다.
창자점(창자를 검사해서 치는점), 어깨뼈 점(어깨뼈의 상태를 보고 치는 점), 재 속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치는 점에서는 점쟁이가 어떤 특정한 사물의 외부 모양이나 상태를 해석하여 미래를 예언한다. 복점이나 징조점은 새의 행동과 울음소리, 불길한 동물을 만나는 경우 등을 해석하여 미래를 예언한다. 천체의 관찰에 의거하는 점성술은 아주 먼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점치는 방법으로 귀납적 점술에 속한다. 귀납적 점술에는 그밖에도 꿈, 날씨, 카드(예를 들면 타로 카드) 배열 등의 해석이 있다. 직관적 점술은 감각기관이나 운동신경의 자율 운동, 또는 마음의 인상에 의존한다. 직관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점술가의 본보기는 몽환상태(자기 스스로 일으키는 경우도 있고, 또는 약으로 일으키는 경우도 있음)에 빠져 초인간적인 존재와 만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무당의 경우이다. 감각기관의 자율운동을 이용하는 것 중에서 수정점(水晶占)은 미래 사건의 환영(幻影)을 일으키는 데 사용된다. 점판은 운동신경의 자율운동을 사용하는 점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이다.
2. 점성술 (占星術 astrology)
1) 개념과 역사
점술(占術)의 한 형태로 개인·집단·국가의 운명을 예고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행성과 별이 지상의 사건에 끼치는 영향을 해석하는 것인데, 일월성신(日月星辰)등 천체에 나타나는 천문현상을 가지고 인간생활의 길흉을 점치는 일로 별의 빛깔이나 위치로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점성술은 고대 바빌로니아와 중국에서 널리 퍼졌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향을 받아 점성술이 생겨났다. 천문현상으로 운명을 미리 알아내고자 하는 이 점성술, 즉 예언은 위정가 가장 신경쓰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예날에는 점성술을 제왕의 학(學)이라고 보았다. 즉, 동양적인 전체주의 밑에서 점성술은 군주에게 봉사하는 학문으로 발생하였고, 군조만이 그 지짓을 사용하는 자유를 독점하고 있었는데,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성술은 일반 국민에게도 퍼졌다.
점성술은 때때로 과학으로 간주되었으며,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여러 문명에 광범위하거나 지엽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거짓 학문으로 규정되어오기도 했고, 현대과학의 이론과 발견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오기도 했다.
점성술은 BC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으나 훨씬 후대인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문명권에 해당하는 서양세계에서 꽃을 피웠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형태로 인도에 전파되었다. 이슬람 문화는 그리스 유산의 일부로 점성수를 흡수했으며, 서유럽이 이슬람 과학에 강한 영향을 받던 중세시대에는 유럽의 점성술도 동양의 영향을 받았다.
16세기 코페르니쿠의 혁명은 지구 중심의 세계관을 유지해오던 점성술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점성술은 오락과 미신으로 오늘날까지 지속되면서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어왔으며, 20세기에는 일간신문의 고정란에 실리는 기사와 특별 역서(曆書)들, 점성술의 여러 측면에 관한 안내서가 그 재미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2) 점성술의 종류
점성술은 방법과 용도에 따라서 국가의 일을 점치는 것과, 서민과 가까운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일로 구분된다. 앞의 것을 천변점성술(天變占星術), 뒤의 것을 숙명점성술(宿命占星術)이라고 한다. 천변점성술은 천변에 의하여 땅위의 현상을 점치는 것인데, 천변은 넓은 지역 어느 곳에서나 생기는 일이므로 천하국가적이라는 뜻에서 위정의 학이라 하였다. 옛날 제왕들은 국태민안에 주력을 두었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두려워 하였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천문현상이 나타나면 제왕은 점성술사를 불렀다. 그 때문에 점성술사는 제왕의 정치고문으로서 신하로서의 발언권도 강하였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역대군주는 천문현상에 항상 유의하였다. 이 천문현상은 당시에 나타난 지상현상과 아울러 자세히 기록하여 같은 현상 때의 점성술에 적용할 준비를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풍부한 관측기록을 남기게 되었따. 우리나라에서의 이러한 관측기록은 <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에 많이 실려 있따. 점성술은 천문학과는 다르지만 근세 이전의 천문학의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3) 천문학과의 관계
과학지식 특히 천문학이 발달되면서 점성술은 세력이 약화되어갔다. 점성술 때문에 많은 관측기록이 남게 되기는 하였지만, 점성술이 천문학의 발달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연금술(鍊金術)이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과는 다르다. 점성술과 천문학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으면서 성격이 전혀 다르다. 점성술은 천문현상의 관측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은 제1의 과학이고, 점성술은 그 응용으로서 제2의 과학이라고 하였다. 점성술로 생활비를 벌어쓰면서 천문학을 연구한 케플러는 말하기를 “점성술은 천문학의 어리석은 딸이지만, 그 딸이 화류계에 나서서 벌어온 돈으로 어버이 되는 천문학을 먹여살린다.”라고 하였다. 점성술이 천문학발전을 뒷받침한 예이다. 천문법칙이 자세히 알려져 갈수록 점성술사의 권위는 떨어져갔다.
정치고문으로서, 왕의 비서로서, 재상들도 두려워하던 점성술사는 천문학의 발달에 따라서 기운을 잃고 제왕의 옆을 떠나 길가의 점쟁이로 떨어졌다.
3. 토정비결 (土亭秘訣)
이지함이 지었다고 알려진 도참서(圖讖書), 태세(太歲)·월건(月建)·일진(日辰)을 숫자적으로 따져 새해의 신수(身數)를 보는 데 사용하였으며, <주역>의 음양설에 근거해 있는 반면 오행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경도잡기(京都雜記)> 등에는 오행점(五行占)으로 새해 신수를 본다고 적혀 있으므로 정조때까지도 이 책으로 신수를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정조 이후에야 하나의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주역>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여러 가지 점에서 주역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첫째, <주역>에 있어서는 중괘(重卦)가 64괘인 데 비하여 여기에서는 48괘만이 사용되고 있고 16괘는 쓰이지 않고 있다. 둘째, 괘상을 얻는 방법이 판이하여 사주(四柱)의 연월일시 가운데 생시(生時)가 제외된다. 셋째, 괘사(卦辭)의 내용도 매우 달라서 <주역>이 인간의 수덕(修德)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하여 이책에서는 길흉화복의 문제가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괘상·괘사 및 월별 길흉을 말한 총6,480구를 지니고 있는 이책은 부귀·화복·구설·여색·가정 등 일개인의 길흉을 중심으로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 비록 <주역>의 원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144개의 괘로 구분된 유형은 <주역>의 원리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책은 조선말 민생의 곤궁이 절정에 달하여 일신·일가의 화복만이 일차적 관심사로 등장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해준다고 여겨진다. 이전부터 행하여오던 오행점이나 문복신수(問卜身數)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고 좀더 세분된 예언을 갈구하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조선 말기의 민심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가톨릭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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