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계월향

장안봉(微山) 2013. 5. 14. 12:07

      계월향                       桂月香

 

 

 

 

 

 

 

 

 

위 사진은 조선 말 마지막 어진(御眞)화가이었던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이 그린 '팔도미인도(八道美人圖)' 중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의 모습이다. 얼굴이 전체적으로 고구마형이며 살집이 없는 편이다. 광대뼈가 앞으로 튀어나왔고, 볼에서 턱으로 급격히 좁아져 턱이 뾰족하며 귓볼이 매우 작다. 채용신은 조선 팔도(八道)의 미인, 즉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팔도미인도'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평양의 대표로 계월향(桂月香)을 그린 것이다.  

 

 

 

 

 

 

 

 

계월향(桂月香. ? ~1592)은 조선중기의 평양 명기(名妓)이다.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 (金應瑞 )의 애첩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장(倭將)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의 부장(副將)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敵將)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敵將)의 머리를 베게한 뒤 자신은 자결하였다.  적장(敵將)에 관하여는 ' 소서비(小西飛) '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일본측 기록에는 소서비(小西飛) 즉, ' 나이토 조안'은 1626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김응서의 연인(戀人) 

 

 

 

 

김응서(金應瑞)는 임진왜란 당시의 명장 김경서(金景瑞)의 초명(初名)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1588년(선조 21)에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곧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다시 기용되어 평양(平讓) 방위전에서 수탄장(守灘將)으로서 대동강(大同江)을 건너려는 왜적을 막은 공로로 평안도방어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나, 1594년 경상도방어사로 전직되었다. 이때 도적이 횡행하자 도원수 권율(權慄)의 명령으로 도적을 소탕하고, 그 공으로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되었다. 군관 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정을 살피게 하고,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그 후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기 위하여 원병 요청을 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서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여, 이듬해 심하(深河)에서 크게 이겼으나, 부차(富車)에서 패배하였다. 강홍립(姜弘立)이 전군을 이끌고 금(金)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비밀리에 적정(敵情)을 기록하여 고국에 보내려 하였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처형되었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김응서 ... 평양성 탈환의 영웅

 

 

 

 

 

김응서(김응서)는 1564년에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28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에 앞서 1586년 8월 4일자 실록에 김응서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이 나온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주요 관청에 대한 과니 감독을 위해 감찰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분대(分臺) 감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날 사간원에서는 ' 감찰 김응서는 가문(家門)이 한미하여 남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으니 교체해야 한다 '고 건의하였고, 이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2년 후에도 김응서는 감찰로 복귀했다가 똑같은 이유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신(文臣) 중심의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무신(武臣) 김응서는 주변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李舜臣)도 마찬가지이지만, 김응서의 운명을 180도로 바꿔놓은것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임진왜란)이었다. 수탄장(守灘將)이라는 중견장교이었던 김응서는 선조(宣曺)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 ..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쓴다는 의미로 임금이 나라 밖으로 도주하는 것)할 때 평양성 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퇴각하는 바람에 징계를 받아 군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비변사는 ' 김응서가 묭맹하다 '며 곧바로 복직시켰다. 이후 김응서는 적의 목을 10여급 베는 등 큰 공을 세워 우방어사로 승진한다. 우방어사는 각도의 군사령관인 병마절도사 바로 아래의 직급이다. 그만큼 복직 후 김응서가 보여준 용맹은 뛰어났던 것이다.      

 

 

 

 

 

 

 

 

 

장수로서 김응서의 용맹성이 두드러진 것은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군대와 함께 평양성(平讓城) 탈환작전을 감행했을 때이다. 김응서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 그리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일' 등을 도와 함구문(含毬門) 돌파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평양수복전투는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이때의 전공(戰孔)으로 김응서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다. 이후 김응서는 명군과 함께 경상도 우방어사가 되어 밀양까지 내려가 남해안에 머물고 있던 왜군(倭軍)의 소탕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김응서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용맹성은 인정되나 변란(變亂)을 제어할 만한 지략이 모자라고 가는 곳마다 창기(娼妓)를 가까이 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응서는 평양성 전투와 관련해서도 평양기생 계월향(桂月香)과 염문설이 유명하다. 계월향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에 은밀히 침투해 공(功)을 세울 수있었다는 내용이다. 허나 큰 처벌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의 무공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계월향과 김응서

 

 

 

김응서가 평양성 탈환의 명장이 된 배경에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의 도움이 컸다. 계월향은 평양 무관이던 김응서와 연인(戀人)관계이었다. 1592년 왜군(倭軍)은 조선 침략 두 달 만인 6월 11일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계월향(桂月香)도 포로로 잡혀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친족이며 부장(副將)이었던 ' 고니시 히(小書飛) '의 진중(陣中)에 있었다. 1592년 12월 이여송(李如松)의 4만8000천 대군이 도착하면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본격적인 평양 수복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떼 계월향은 문루(門樓)에 있다가 성 밖에서 기밀을 탐지하던 김응서(金應瑞)를 발견하고, ' 난리 중에 헤어진 오라버니 '라고 속여 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날 밤 김응서는 술에 만취된 적장(敵將)을 살해하고 계월향과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말을 탈 줄 모르는 그녀는 탈출이 지체되자 연인(戀人) 김응서를 혼자 보내고 스스로 자결(自決)하였다. 장수를 잃은 왜군은 대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이듬해 1월 초 평양성은 수복되었다.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얽힌 이 로맨스를 두고 후일 만해 한용운 (卍海 韓龍雲) '은 계월향에게 바치는 흠모송(欽慕頌)을 지었다.  

 

 

 

계월향이여,  /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   나는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貞)을 사랑합니다.  /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  그대는 남은 한(恨)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  그대의 푸른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梅花) 나뭇가지에 새 봄을 걸어서  /  그대의 잠자는 곁에 그만히 놓아 드리겠습니다.  /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계월향의 초상화

 

 

 

 

계월향의 초상화는 2008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폭 상단에는 ' 의기 계월향 (義妓 桂月香) '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 빽빽이 적혀 있다. 좌안칠분면 (左顔七分面)의 전신(全身) 좌상으로, 바닥에 깔린 돗자리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크게 땋아 올려 꾸민 머리 모양은 1519년 안동부사이엇던 이현보(李賢輔)가 당시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베푼 ' 화산양로연도 (花山養老燕圖) '에서 보듯 계월향이 살았던 당대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복식(服飾)은 19세기 초엽에 유행하였던 짧은 저고리에 부푼 치마를 입고 있으며, 저고리에는 향(香)노리개가 달려 있다. 앉아 있는 모습이나 손의 모습 등은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 복천오부인(福川吳夫人) 86세 초상 '과 유사하다.

 

 

계월향의 가는 눈썹, 얇은 눈꺼플, 오똑한 코, 작은 입술로 형용되어 있는데, 윤곽과 코 선, 목덜미 등을 따라 붉은 계열의 음영(陰影)을 짙게 넣었으며, 인중(人中)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좁은 어깨에 가녀린 두 팔을 교차한 채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앳된 모습에서는 여리고 고운 소녀의 이미지가 전달되어 온다. 핍진(逼眞 .. 진실에 가까운 )한 초상화라기 보다는 이상적(理想的) 여인상으로서의 미인도(美人圖) 범주에 속한다.

 

 

이 영정은 1815년(순조 15)에 그려져 평양 장향각(藏香閣)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그림에는 이 기록과 함께 주인공인 계월향(계월향)과 관련된 일화가 그림 윗부분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와 같이 영정의 제작연도, 그려진 배경, 모셔졌던 장소, 주인공에 얽힌 일화 등 관련내용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더욱이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형식,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 등 당시의 복식(服飾)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적혀 있는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92년 왜군이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이 김경서(金景瑞 ..김응서) 장군을 끌어들여 왜군 부장을 죽였으니, 지금까지 이를 의롭게 여기고 있다. 1815년 여름에 그 모습을 그려서 장향각(藏香閣)에 걸고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냈다. 평양부 기생 계월향은 왜군(倭軍) 부장(副將)의 총애를 받았지만,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김경서 장군을 친오빠라 부르며 성(城) 안으로 불러들였다. 계월향은 왜장(倭將)이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 기다린 후, 김장군을 안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다. 왜장은 의자에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쌍칼을 쥐고 있었는데, 얼굴빛이 붉어서 마치 망나니(작인. 斫人)가 서 있는 듯 하였다. 김장군이 칼을 빼서 왜장으 머리를 베었다. 왜장은 머리가 땅에 떨어졌음에도 오히려 칼을 던질 수가 있어서 하나는 벽에, 하나는 기둥에 절반쯤 박혔다. 이에 김장군은 성을 빠져나가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김장군이 두 사람 모두 온전하지 못할 것을 알자, 칼을 들어 계월향을 죽이고 성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에 적들이 왜장이 죽은것을 알고서 크게 놀라 사기가 저하되고 기세가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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