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선생 묘(경기 기념물 3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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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비무장 지대에 있던 경순왕릉을 개방해서 다녀 왔으며, 최근에는 민통선 안에 위치한 허준선생 묘까지 개방을 했습니다. 허준 선생묘는 개별적으로는 불가하고 안보관광(13시 출발, 하루 1회)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홀로의 번개답사로 진행하면서 파주로 가면서 임진각 가까운 쪽에 있는 황희선생 묘와 반구정 등을 둘러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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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와 비각 주변 전경 |
자유로에서 낙하IC로 나가서 LG로를 접어 들면서 좌측에 황희선생 묘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습니다. 군부대 정문 우측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황희선생 묘역이 보입니다. 하단의 지도를 보시면 찾기 쉽습니다. 묘역은 주차장도 있고 넓은 편입니다. 좌측에 재실이 있고, 우측에는 비각이 있습니다. 신도비는 황희 정승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이수가 없는 평범한 비여서 초라해 보입니다. 비문은 풍파에 깎여서 우측에 새로운 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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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을 지나서 계단을 오르면 방촌 황선생부조묘 입구가 보이고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묘역으로 오르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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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선생 묘는 다른 묘와 다른 점이 몇 가지 보입니다. 우선 봉분 앞의 좌우로 둘레석으로 쓰이는 석축이 튀어 나와 있으며, 장명등은 대부분 상석 앞의 정중앙에 있는데, 이 곳의 장명등은 바라볼 때 우측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장대석도 3단으로 잘 썼는데, 대부분 2단(중계)에는 문인석을, 3단(하계)에는 무인석을 세우는데 이곳은 반대로 무인석을 앞에 세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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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이 아닌 묘에도 무인석을 세우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만, 이 곳에는 무인석을 세우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모양은 무인석인데 칼은 쥐고 있지 않습니다. 무인석의 모습에 칼을 쥐고 있지 않은 경우도 처음 봅니다. 아래 소개하는 황희 정승의 아들인 황수신 묘에는 무인석이 칼을 쥐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안내에는 동자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모습도 틀리고 동자석이라면 상석 가까운 좌우로 배치하여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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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석(칼을 쥐고 있지 않음) | ▲ 황희선생 묘비 |
이황(李滉) 선생이나 이이(李珥) 선생은 이름보다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이라는 호가 더 많이 불리우고 있습니다만, 황희 선생은 호 보다는 이름이, 그리고 황희 선생의 이름 뒤에는 반드시 정승이 들어가서 대부분 '황희 정승'이라고 불리웁니다. 저는 황희(黃喜) 정승의 호가 방촌(尨村)이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저만 그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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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선생 묘역에서 우측 산자락을 보면 묘지가 여러 곳 보입니다만, 중앙에 보이는 묘가 선생의 셋째 아들인 황수신의 묘입니다. 비각 아랫쪽에는 황희선생의 영정각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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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 선생의 영정각 전경 |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방촌(방村) 황희(1363∼1452)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학록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하자 한 때 시골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었고 이후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태종 대의 관직생활을 통해 얻은 국정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을 토대로, 세종 대에는 20여 년간 나라살림을 총괄하던 의정부에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문예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에 크게 공헌하였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으며 봉분의 규모 역시 크다. 봉분의 아랫부분은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과 향로석 등의 석물이 있다.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한쌍씩 있고, 묘역 아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사적비와 194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
황수신 묘(황희 선생의 3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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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수신 묘역 입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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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수신 묘역 전경(봉분의 둘레석은 최근에 보수한 것 같습니다.) |
<역사인물 탐방 23>황수신(黃守身:1407~1467)-음직으로 출세한 황희의 아들 ♥하동의역사와인물에서 발췌 2007/07/25 17:03
자를 수효(秀孝), 호를 췌부(?夫)라했던 황수신은, 열여섯 소년시절에 사마시에 나갔다가 사소한 일로 시관에게 모욕을 당하자 크게 분개, 한 수의 시를 갈겨 써 남기고 다시는 과거 따위는 거들떠 보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굳혔다. 『擇民濟世非科第 나라를 구제하는 길은 과거가 아니다. 不必平生作腐儒 내 평생 저 썩은 선비처럼 되지 않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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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수신 묘역 내 석물(문인석과 무인석) 전경 |
이리하여 곧 왕위에 오른 세종은 황희의 아들 가운데 이미 관직에 나간 두 아들 아래로 아직 출사하지 않은 황수신을 불러, 과거를 거칠 필요없이 종7품 종묘서부승직을 내리니, 종묘와 왕능앞의 정자각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비록 초임 관직으로 매우 보잘 것 없는 직위였으나 황수신은 성심으로 맡은바 직무를 성실히 수행, 그의 인품을 들어냈다. 이에 능력을 인정받은 황수신은 종부시직장·사헌부감찰·지평·호조정랑·전라도경차관·상호군·경상도관찰사·좌승지 등 화려한 관직을 두루거쳐, 1446년 세종28년 국초이래 문과출신이 아니면 감히 넘겨다 볼수 없는 도승지에 오르니, 곧 세종임금의 비서실장이 된 셈이었다. 황수신은 세종의 신임을 등에 업고 여러 직첩을 거치며 많은 치적을 남겼다. 도성안에서 민심을 현혹시키는 요무(妖巫)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수년간에 걸쳐 결단을 미루어 쌓였던 옥송(獄訟)을 과감하게 처결하여 국법질서를 바로 잡는 과단성도 들어냈다. 그러나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사정 임원준에게 사소한 특혜를 준 일이 트집잡혀 파직 된 일도 있었으나, 새 임금 문종때 풀려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고, 뒤에 병조참판 때는 수양대군이 병법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크게 공헌, 수양과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마침내 세조가 즉위하자 황수신은 공신에 오르고 승진을 거듭, 좌참찬으로 명나라사신으로 나가 활약하고, 돌아와 우찬성에 판예조사를 겸해 세조를 보필하였다. 이윽고 남원부원군에 진봉된 황수신은, 충청도 아산의 농지를 무단점거한 일로 여러차레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의 입김으로 탈없이 넘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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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수신 묘역 후경과 건너편 산자락에 황희선생의 묘역이 보입니다. |
1465년 세조11년, 명나라에 새 황제 헌종이 등극했는데, 하례사로 정승급 한사람을 보내야 했다. 이때 영의정은 신숙주, 좌의정은 구치관, 우의정은 한명회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현직 정승 중에는 뽑아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이에 세조는 외방에 출장중인 한명회를 대신하여 황수신을 우의정으로 임명, 뒷날 바로 하례사로 명나라에 보냈다. 이리하여임무를 충실하게 마치고 돌아온 황수신은, 곧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니, 음직으로 출사한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황수신은 용모가 단아하고 학문이 깊었다. 관직에서는 백성들에게 불편을 주는 제도는 반드시 추려내 바로잡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그를 아버지 후광으로 출세하였고, 세조의 등극에 공을 세워 공명을 누렸다고 삐딱하게 토를 달았다. 아마 아버지처럼 청백하지 못했고, 정통성이 결여된 세조의 과분한 총애를 받은 탓인 것 같다. 황수신은 영의정자리에 오른지 겨우 한달만인 그해 5월, 61세로 그만 병을 얻어 숨졌다. 시호가 열성공(烈成公)으로 내려진 그의 묘소는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고, 앞에 두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하나는 처음 세웠던 비였고, 다른 하나는 1943년 후손들이 마모된 비문을 다시 새겨 세운 비라하는데, 비문은 예조판서 이승소가 지은 것이라 했다. 전라북도 완주에 황수신의 부조묘가있고, 용진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서는 황수신을 배향하여 기리고 있다. 황수신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춘(春)은 호조참판, 둘째 찰(察)은 첨지, 3남 성(省)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막내 욱(旭)은 도사였다. 황수신의 맏형 치신(致身)은 호조판서였는데 그는 슬하에 아홉 아들을 두어 후손에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황윤길(黃允吉)·정욱(廷彧) 등이 나왔다. 둘째 형 보신(保身)은 소윤을 지냈을 뿐인데, 학덕이 높아 유명했던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이 그의 사위였다. 황수신의 아우 직신(直身)은 크게 들어나지 못한 것 같다. |
황희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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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1 ↑ 화살표 윗 부분에 황희선생 묘가 있으며, 그 좌측에 황수신 묘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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