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임꺽정

장안봉(微山) 2013. 5. 14. 12:11

 

 

 

 

                                               임거정                        林巨正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 (星湖 李瀷) '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임거정(林巨正. ? ~ 1562)을 꼽았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이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 ..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를 일삼는위정자에 대한 농민(農民)의 저항(抵抗)이자 신분해방(身分解放)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져있다. 

 

 

 

 

                                           임거정                  林巨正

 

 

 

 

조선 중기 양주(陽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한다. 백정(白丁)은 조선시대에 도살업, 고리제조업(柳器製造業), 육류(肉類) 판매업 등을 주로 하여 생활하던 천민층을 말한다. 고려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한 농민층을 의미하던 고려(高麗)의 백정(白丁)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 양민(良民), 촌민(村民), 백성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대신에 백정(白丁)이라는 이름은 주로 도살업(屠殺業), 유기제조업 등에 종사하던 천민(賤民)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이후 명종(明宗) 시절의 정치적 혼란과 계속된 흉년(凶年)으로 관리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民心)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官衙)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貧民)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義賊) 행각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官軍)의 토벌(討伐)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궁궐 밖 의적(義賊)을 만드는 세상

 

 

 

 

 

'임꺽정의 난'은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고,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영의정 상진(尙震), 좌의정 안현(安玹), 우의정 이준경(李浚慶), 중추부 영사 윤원형(尹元衡) 등 당대 최고의 실권자가 모여 황해도(黃海道)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운 것이 1559년(명종 14) 3월 27일이었다.

 

 

이후 관군(官軍)에 의하여 소탕된 것이 1562년9명종 17) 1월 초이었으니 무려 3년이 넘게 관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해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3년 이상 지속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임꺽정의 난에 대하여 ' 명종실록(明宗實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苛斂誅求)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宰相)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宰相)들의 탐오(貪汚)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盜賊之熾發    由於守令之焙克

                                         守令之焙克    由於宰相之不廉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은 '명종실록'이지만, 사관(史官)은 그 본질을 읽고 있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무렵, 조선 사회는 동맥경화의 상태로 접어들고있었다. 이른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이엇고, 이 때의 왕이 명종(明宗)이다.   

 

 

 

                                           윤원형 그리고 황해도 봉산지역

 

 

 

 

실제 명종(明宗) 시절의 진정한 대도(大盜)는 임꺽정이 아니라, 실권자이었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혈육 윤원형(尹元衡)이었다. 윤원형(尹元衡)은 명종(明宗)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기간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임꺽정은 우연하게 출연한 도적이 아닌 것이다.

 

임꺽정이 활동하던 황해도(黃海道) 지역의 지방관리들은 명종(明宗)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친정붙이들이었다. 임꺽정의 난이 기록상 보이기 시작하는 1559년 황해도 지역은 극심한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한 지경이었다. 가난과 전염병으로 쪼들린 농민들은 살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 도적(盜賊)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임꺽정은 왜 도적이 되었을까 ?

 

 

 

 

기록상으로 보면 임꺽정이 도적활동을 시작한 곳은 황해도 봉산(鳳山)이다. 백정(白丁)이었던 임꺽정은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갈대로 삿갓이나 밥그릇 등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황해도 봉산 일대는 갯벌지대라 갈대만 무성하고 농토가 척박한 곳이다. 그래서 갈대밭은 임꺽정과 비슷한 백정들에게는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런데 명종 8년 '실록'에 놀라운 기록이 등장한다. 권세가들이 갈대밭을 빼앗아 사유지(사유지)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갈대를 팔고 있다는 것이다. 분노한 봉산 백성들이 조정에 상소(上疏)를 올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삶터를 빼앗긴 임꺽정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당시 갈대밭은 국가 소유의 공유지이었다. 어떻게 사유지(私有地)로 바뀐 것일까 ? 그 배경에는 변화된 조선의 토지정책이 있었다. 조선의 농업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15세기, 시비법(施肥法)과 제초법(除草法) 등 새로운 농법이 개발되고, 수리시설(水利施設)이 발달하여 간척지(干拓地)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간척(干拓)에 성공하면 사유지(私有地)로 인정하였다. 간척지에 대한 토지 소유가 인정되자 권세가(權世家)들이 앞다투어 간척지 개발에 나섰다. 16세기 임꺽정이 살던 시기는 권세가들의 간척지 개발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이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의 기록에의하면 공권력을 동원하여 황해도 간척(干拓)을 주도한 하람은 명종(明宗)의 외삼촌 ' 윤원형 (尹元衡) '이었다. 연안부사는 윤원형과의 연줄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징발해, 평산(平山)과 해주(海州)를 잇는 제방(堤防)을  쌓아 사유지(私有地)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권세가들은 마구잡이로 토지를 확장하여 지주제(地主制)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결국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먹고 살기위해 지주(地主)들의 밑으로 들어갔다. 소작농(小作農)으로 전락한 것이다. 

 

 

 

 

                                          양반지주                兩班地主

 

 

 

 

임꺽정의 삶터이었던 황해도 봉산의 갈대밭도 권세가들이 그렇게 사유지로 만들었다. 조선 초기에는 농민들이 경작하는 모든 토지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공전제(公田制)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점차 인구(人口)가 늘어나자 나라에서 농토확장을 위해 개간(開墾)을 장려한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개간지(開墾地)는 개인소유(個人所有)를 인정하게 되는데, 권력을 쥐고 있던 양반(兩班)들이 이 정책을이용하여 앞다투어 토지확장에 나섰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 양반지주 (兩班地主)'라는 말이 이 시대에 생긴 것이다. 땅이란 땅은 대부분 권세가와 일반 양반들의 차지가 되면서 생긴 말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양반들이 땅을 소작(小作)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되는데, 양반지주들은 수확물의 절반을 소작료(小作料)로 요구하였다. 나라에서 관리할 때보다 5배나 올린 것이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임꺽정의 난                  林巨正의 亂

 

 

 

 

 

 

난(亂)의 주동자였던 임꺽정은 백정(白丁)출신이었지만,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다양하였다. 상인, 대장장이, 노비(奴婢), 아전(衙前), 역리(驛吏)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임꺽정은 자신만의 지도력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九月山) ,서흥(瑞興) 등 산간지대이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면서 형안도와 강원도 그리고 안성(安城) 등 경기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관군(官軍)들이 일찍이 임꺽정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황해도 일대의 아전(衙前)과 백성들이 임꺽정과 비밀리에 결탁되어 관(官)에서 잡으려고 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관(官)에서는 선전관(宣戰官)이라는 무장(武將)을 내세워 추적하게 했지만, 임꺽정과 그의 무리들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들어가고 나간것을 헷갈리게 만들어 추적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결국 추적에 나선 선전관(宣戰官)은 구월산(九月山)에서 임꺽정 무리들의 발자국을 발견하였지만, 들어간 것을 나간 것으로 잘못 알고는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임꺽정 무리들의 약탈(掠奪) 대상은 이른바 부자(富者)들이었다. 관청이나 양반, 토호(土豪)의 집을습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재물을 도로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는 등 공권력(公權力)을 향해 항거하기도 했다. 이는 임꺽정 무리들이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叛亂)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민중들이 관군(官軍)의 동향을 미리 알려주고 그들의 활약에 환호를 지른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란군(叛亂軍)으로 규정

 

 

 

당시 왕이었던 명종(明宗)은 이들을 ' 반적(叛賊)'이라 부르며 반란군(叛亂軍)으로 규정하였다. 단순한도적떼가 아닌 체제(體制)를 뒤엎을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왕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을 체포하기란 쉽지 않았다. 신출귀몰한 임꺽정이 잡히지 않자 그에 대한 현상금은 높아만 갔다.

 

 

'명종실록'에 실려 있는 임꺽정 기사는 상당부분 '가짜 임꺽정'을 진짜로 둔갑시켜 출세를 해보려는 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1561년 1월 3일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李師曾),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金世澣) 등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하였으나, 그들이 잡은 인물은 임꺽정의 형(兄)인 '가도치'이었다. 이들은 임꺽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세에 눈이 멀어 '가도치'를 때려 죽이면서까지 진실을 덮으려 했지만, 결국 발각되어 중형을 받았다.

 

 

이사증(李師曾)의 뒤를 이은 인물이 의주목사 이수철(李壽鐵)이다. 이수철은 임꺽정과 한온(韓縕)을 붙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으나 그가 잡은 인물은 윤희정(尹熙正)과 윤세공(尹世恭)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임꺽정 무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나, 온갖 고문(拷問)을 동원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었고, 늙은 노파를 잡아다가 임꺽정의 아내라고 하며 인두질을 해댔다. 사실이 드러난 후 이수철(李壽鐵)은 파직 당하였으나, 이들 외에도 임꺽정을 잡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 관리들이 넘쳐났다.       

 

 

 

                                        부하의 배반 .. 임꺽정 체포되다

 

 

 

명종(明宗)은 선전관(宣戰官)과 금부낭처(금부낭청)에게 임꺽정을 압아오라고 특명을 내릴 정도로 두려워 하였다. 조선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의 난'이 진압된 것은 1562년 1월, 토포사(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官軍)에 의해서였다.

 

남치근(南致勤)이 구월산(九月山) 아래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모아 임꺽정 무리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하며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어서 임꺽정 무리 가운데 일찍이 체포되었던 림(徐林)이 길잡이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체포작전이 시작되었다.

 

서림(徐林)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임꺽정은 산을 넘어 도망치고 급기야 한 촌가(村家)로 숨어들었다. 촌가(村家)를 관군(官軍)이 포위하자 임꺽정은 집 주인 노파에게 집 밖으로 뛰쳐나가라고 위협하였다. 노파가 ' 도적이야 '하고 외치며 문 밖으로 나가자 군인 차림으로 변장을 한 임꺽정이 노파를 뒤쫓으며 ' 도적은 벌써 달아났다 '고 외쳤다.

 

임꺽정을 알아보지 못한 관군(官軍)들은 일제히 가리킨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북새통에 임꺽정은 관군(官軍)이 탄 말을 빠앗아 타고 달아났지만, 심한 상처를 입어 멀리 가지는 못하였다. 멀리서 임꺽정을 알아 본 서림(徐林)이 ' 임꺽정이다 '라고 외쳤고, 이후 관군들은 수많은 화살을 그를 향해 날렸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서림(徐林)이 배반한 것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네가 어떻게 투항할 수 있느냐 ...  1562년 1월 8일, 임꺽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명종(明宗)은 '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 '고 말하여 공(功)을 세운 자들에게 큰 상(賞)을 내렸다.     

 

 

 

 

                                                     칠장사와 임꺽정

 

 

 

 

 

 

 

 

 

 

 

 

 

 

 

 

 

 

 

 

 

 

 

 

 

 

 

 

                                                    임꺽정 생가터

 

 

 

                                          고석정                   孤石亭

 

 

 

 

 

고석정(孤石亭)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長興里)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신라 시대 진평왕(眞平王)에 세운 것으로, 석굴암벽(石窟岩壁)에 시문(詩文)을 새겨 풍경을 예찬한 구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조선 명종(明宗) 때에는 이꺽정이 고석정 건너편에 돌벽을 쌓고 칩거하면서 조공물(朝貢物)을 탈취하여 빈민(貧民)을 구제했다고 한다. 지금의 정자는 한국전쟁으로 소실(燒失)된 것을 1971년 새로 지은 것이다 

 

 

 

 

 

 

 

강원도 철원(鐵原)은 평강에서 흘러나와 점차 격랑을 이루고  흐르는 한탄강(漢灘江)을 중심으로 신철뤈과 구철원으로 나뉜다.  북으로 금화, 화천으로까지 이어지는 널다란 도로와 아파트까지 들어선 신철원이 행정구역이 중심지라면, 우리나라 대표적인 겨울 철세의 도래지인 철원평야에 자리한 동송읍 일대는 '구철원(舊鐵原)'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바로 궁예(弓裔)가 태봉국(泰封國)을 건국한 도읍지이기도 하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 임꺽정이 석성(石城)을 쌓고 활동한 무대가 고석정(孤石亭)이다. 고석정은 비록 각종 위락시설과 숙박업소, 레프팅 장소가 되어 한낱 행락객들이 오가는 유원지로 전락한 지 오래지만, 깍아지른 협곡 사이를 세차게 요동치는 한탄강의 풍광이 위낙 장관이어서 철원팔경에서도 으뜸으로 통한다.

 

 

 

                                               고석정과 임꺽정의 전설

 

 

 

 

임꺽정의 무리들은 주로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를 근거지로 웅거하였기에 그  유적이 이곳 고석정 말고도 많다. 경기도 양주(陽州)고을의 백정(白丁) 출시이라고 알려진 그의 생가터가 양주(陽州) 별산대놀이 전수관과 동헌(東軒)이 붙어 있는 불곡산(佛谷山) 밑에 아직 남아 있고, 불곡산 중턱에는 ' 임꺽정 바위'가 있다. 여기서 다시 파주(坡州) 못미쳐 적성(赤城) 쪽으로 올라가면 감악산(紺岳山)에도 '임꺽정 바위'가 있다.

 

 

 

 

 

 

 

하지만 그가 은신하였다는 자연 동굴과 석성(石城)까지 쌓아놓고 할거한 고석정(孤石亭)이야말로 임꺽정의 본거지라 할만하다. 그런데 왜 임거정(林巨正)이 '임꺽정'으로 불렸는지, 그 이유를 고석정의 전설가 유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석정은 건너편에 석성(石城)을 쌓고 함경도(咸鏡道)에서 상납되는 조공(朝貢)을 탈취하여 서민(庶民)에게 분배해 준 의적(義賊)의 근거지로 알려지고 있다. 조정에서는 임거정(林巨正)을 생포(生捕)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지만, 그때마다 ' 꺽지 '로 변신하여 고석정 및 한탄강(韓灘江)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여 훗날 사람들은 '임거정'을 '임꺽정'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임꺽정은 ' 꺽지 '라는 물고기를 이른 말이다. 바위나 자갈 틈에서 사는 '꺽지'는 입과 주둥이가 무척 크고 검은색 줄무늬가 있는 우리나라 토종의 육식어종이다. 민물매운탕 중에서도 '꺽지탕'은 그 맛이 일품이다. 밤고기를 잡을 때, 자갈밭에 숨어 있는 꺽지를 잡으면 꺽, 꺽 하고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한다.  

 

 

 

 

 

 

 

 

 

 

 

 

 

 

 

 

                                          임꺽정 .. 소설로 부활하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메모 :

'여행이야기(경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채용신  (0) 2013.05.14
[스크랩] 김상헌 ... 절개와 지조의 상징  (0) 2013.05.14
[스크랩] 채용신  (0) 2013.05.14
계월향  (0) 2013.05.14
[스크랩] 월송정.황방촌 묘  (0) 2013.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