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 金尙憲
김상헌(金尙憲)은 한국사에서 절개(節介)와 지조(志操)의 한 상징이다. 그 상징의 핵심은 ' 숭명배청 (崇明排淸)'일 것이다. 그의 생몰년(生歿年)은 그가 조선시대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통과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82년에 걸친 긴 생애(生涯) 동안 김상헌(金尙憲)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모두 겪었다.
그 시대에 그의 판단과 처신(處身)이 옳았는가 하는 측면은, 거의 모든 사안이 그렇듯이 여러 의견이 잇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명료한 이념(理念)을 출저히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 이념(理念)과 실천(實踐)은 그 후 ' 북학(北學) ' 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정계(政界)와 사상계(思想界)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세도가문(勢道家門)인 ' 안동 김씨 '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출생과 성장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조선 중,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안동, 자(字)는 숙도(叔度), 호(號)는 청음(淸蔭),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선조(宣祖) 3년인 1570년 6월 3일에 서울의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다. 그의 연보(年譜)에는 어머니가 임신(姙娠)한 지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김극효(金克孝)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지는 못하였고, 양구(楊口), 동복현감(同福縣監), 금산군수(錦山郡守), 돈녕부 도정, 동지돈녕부사 등 주로 외직(外職)이나 중앙의 한직(閑職)에서 근무한 인물이다. 그러나 외가(外家)의 성세는 대단하였다. 우선 외할아버지 정유길(鄭惟吉)은 좌의정을 역임한 당시의 대표적 대신(大臣)이었고, 정유길의 조부(祖父)는 중종(中宗) 중반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 증조(曾祖)는 성종(成宗) 때 이조, 공조,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좌리공신(佐理孔臣)에 착봉된 정난종(鄭蘭宗)이었다.
조선 중기부터 종통(宗統 .. 종가 맏아들의 혈통)이 중시되면서 양자(養子)의 입적(入籍)이 활발해지는데, 김상헌(金尙憲)은 자신이 입적(入籍)되고, 후손(後孫)도 입적시키는 이례적인 경험을 모두 겪었다. 그는 2세 때 큰아버지 김대효(金大孝)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 별세하자 그에게 입적되었다. 9세 때부터 친부(親父)에게서 글을 배웠고, 12세 때는 천연두(天然痘)에 걸려 매우 위독했다가 이듬해에 간신히 나았다. 그 뒤 김상헌은 15세 때 ' 성주 이씨(星州 李氏) '와 혼인하였고, 5년 뒤인 20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직계선조(直系先祖)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宰相)과 수십 명의 판서(判書), 참판(參判)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王妃) 3명과 숙종의 후궁 '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김상헌이 겪은 첫 번째 전란(戰亂)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아직 그가 출사(出仕)하기 전인 22세 때 발발하였다.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江原道)로 피난했다가, 겨울에 강화(江華)를 거쳐 충청남도 서산(瑞山)으로 갔다. 이때 아들 종경(宗慶)이 3세로 요절(夭絶)하는 슬픔을 겪었다.
임진왜란과 김상헌
임진왜란의 와중인 선조(宣祖) 29년인 1596년 가을에 김상헌(金尙憲)은 과거(科擧)에 급제(及第 .. 19명 중 13등)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출사(出仕)하였다. 길고 화려하였지만, 당시의 주요한 인물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험난한 관직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선조(宣祖)가 승하하는 1608년까지 10여 년 동안 김상헌(金尙憲)은 이런저런 중하급(中下級) 관직을 거쳤다. 중앙에서는 저작, 박사, 예조자랑, 이조좌랑, 부수찬, 지제교, 정언, 예조정랑 같은 청요직(淸要職)에 근무하였고, 외직(外職)으로는 제주 안무어사(按撫御史), 함경도 고산도(高山道) 찰방(察訪),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의 관직을 거쳤다.
이 기간에 특기할 사항은 두 가지인데, 우선 선조(宣祖) 35년인 1602년에 함경도 고산도(高山道) 찰방(察訪)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찰방(察訪)이란 각 도(道)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문관으로종6품 외관직(外官職)이다. 그렇게 먼 외직(外職)에 발령된 것은 당시 실세(實勢)이었던 유영경(柳永慶)과의 알력(軋轢) 때문이었는데, 앞서 그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는 데 김상헌(金尙憲)이 반대(反對)한 것에 대한 보복 인사(人事)이었다. 다른 하나는 둘째 형 김상관(金尙寬)의 아들 김광찬(金光燦)을 후사(後嗣)로 입적시킨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비로 이 김광찬(金光燦)의 후손에서 조선 후기의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계보(系譜)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김상헌(金尙憲)은 친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아픔은 후대(後代)의 커다란 영광으로 반전(反轉)되었던 것이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두 파(派)가 있다. 흔히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대명사(代名詞)로 꼽히고 있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고려(高麗) 창업공신의 한 사람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 신아농 (新安東) '을 말한다. 이들은 조선 중기까지 그리 뚜렷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승(政丞) 15명, 판서(判書) 35명, 대제학(大提學) 6명, 왕비(王妃) 3명을 집중적으로 배출하였다.
안동김씨와 세도정치
안동김씨가 중앙무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광해군(光海君) 때 김상헌의 아버지 김극효(金克孝)가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면서부터이다. 정유길(鄭惟吉)의 딸이 광해군(光海君)의 장인(丈人)인 류자신(柳自信)에게 시집을 가서 김극효(金克孝)는 그와 동서(同壻)간이 되었다.
김극효(金克孝)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이 김상용(金尙容), 넷째 아들이 김상헌(金尙憲)이다. 김사용(金尙容)은 오륜가(五倫歌) 등을 남긴 문인이자 서도(書道)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살(自殺)하였고, 벼슬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김상헌(金尙憲) 역시 좌의정을 역임하여 형제 정승(兄弟 政丞)의 기록을 남겼고, 병자호란 때 척화파(斥和派)로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잡혀 갔었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를 흔히 ' 장동(莊洞 .. 서울 효자동 근처) 김씨 '라고 부르는데, 이는 김상헌(金尙憲)이 장동(莊洞)에 살았고, 그의 직계 후손에서 줄줄이 정승(政丞)과 판서(判書) 그리고 3명의 왕비(王妃)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침체의 세월
김상헌(金尙憲)에게 광해군(光海君)의 치세(治世)는 대체로 침체(沈滯)와 불행의 세월이었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의정부 사인, 교리, 사간, 응교, 직제학, 동부승지 같은 비중있는 관직을 지냈지만, 빛보다는 그늘이 더 짙었던 시간들이었다.
광해군과 김상헌
광해군(光海君) 재위 3년인 1611년 김상헌(金尙憲)에게 첫 시련이 닥쳐왔다. 파직(罷職)될 뻔한 일이 벌어졌다. 그 원인은 우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올린 ' 회퇴변척소 (晦退辨斥疏) '라고 불리는 상소(上疏) 때문이었다. 그 논지의 당부(當否 .. 올고 그름)은 상관없이, 그 글은 조선시대에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문건의 하나일 것이다. 제목 그대로 그 글은 ' 회재 이언적 (晦齋 李彦笛) '과 ' 퇴계(退溪) 이황(李滉) '을 변론해 배척하고, 자신의 스승인 조식(曺植)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동부승지이었던 김상헌(金尙憲)은 동료들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의 사람됨은 젊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편벽(偏僻)되고 막힌 것을 병통(病痛)으로 여겼습니다. 지금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이런 말을 하였으니, 어찌 노망(老妄)이 들어 어두운 탓이 아니겠습니까. 정인홍(鄭仁弘)은 자신이 스승으로 섬긴 사람과 존숭(尊崇)하는 사람을 추존(追尊)해 후세에 드러나게 하려고 하면서, 스승을 존숭하는 도리는 지나치게 아름다움만 칭송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도리어 후세의 비판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광해군(光海君)이 정인홍(鄭仁弘)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김상헌은 정인홍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광해군은 김상헌의 상소(上疏)을 알고 크게 노(怒)해 책망을 하려고 했는데, , 김상헌이 ' 유씨(柳氏)와 인척이 되는 까닭에 궁중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즉시 병(病)을 이유로 사직하는 소(疏)를 올리니, 왕이 그를 체직(遞職)시켰다 '고 하다. 유씨(柳氏)는 바로 광해군의 비(妃) ' 유씨 '를 말한다. 김상헌의 어머니는 유씨(柳氏)로, 당시 왕비(王妃)와 자매(자매)이었다. 그러니까 광해군(光海君)은 김상헌의 이모부(姨母夫)이었던 것이다.
김상헌과 광해군은 생질(甥姪 .. 누이의 아들)과 이모부(姨母夫)의 관계로 김상헌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은 김상헌이 광해군 3년 동안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김상헌은 광해군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다. 폐모론(廢母論) 전후 관직을 떠난 김상헌(金尙憲)은 광해군이 그를 다시 불렀으나 상제(喪制)를 이유로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김상헌은 시골에 있다가 인조(仁祖) 2년이 돼서야 대사간(大司諫)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김상헌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었다. 광해군(光海君) 10년인 1618년생부(生父) 김극효(金克孝)가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에는 생모(生母) 정씨가, 그 이듬해에는 모친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본관인 안동(安東)과 거주지인 경기도 양주(楊州)의 석실(石室)을 오가며 삼년상(三年喪)을 치었다. 1623년 3월에 광해군(光海君)과 북인(北人)이 반정(反正)으로 추출되고, 인조(仁祖)와 서인(西人)이 집권하면서, 김상헌(金尙憲)은 서인(西人)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호란(胡亂)이 상징하듯이, 인조(仁祖)의 치세(治世)에 국가와 국왕, 신민(臣民)은 모두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많은 나이인 50세를 넘긴 김상헌은 타협(妥協)하지 않는 정신과 행동으로 그 난관에 맞섰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 났을 때 김상헌(金尙憲)은 경기도 양주(楊州) 석실(石室)에서 복상(服喪)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53세이었다. 이듬해 4월에 탈상(脫喪)한 그는 인조(仁祖) 3년인 1625년까지 이조참의, 형조참의,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 대사헌, 부제학 같은 주요한 관직에 제수되었다.
정묘호란과 김상헌
그 때 중국 대륙에서는 명(明)나라의 몰락과 청(淸)나라의 흥기(興起)라는 중국사의 마지막 왕조(王朝) 교체(交替)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1626년 8월에 김상헌(金尙憲)은 ' 성절겸사은진주사 (聖節兼謝恩陳奏使) '로 파견되었다. 주요한 임무는 당시 가도(暇島)에 주둔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명나라의 무장(武將) 모문룡(毛文龍)과 관련된 사정을 명나라 조정에 해명하는 것이었다.
모문룡 毛文龍
중국 대륙에서 1618년부터 후금(後金)이 본격적으로 명(明)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자 조선에서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전쟁터가 된 요동(遼東)에 거주하는 명나라 주민들과 패잔병이 난민(難民)이 되어 조선으로 대거 몰려온 것이다. 압록강을 넘어 조선 영토로 들어오는 난민(難民)의 수(數)는 갈수록 늘어 1621년 명나라 조정이 파악하고 있는 숫자만도 2만 명이었고, 이듬해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낯선 이국(異國) 땅에 들어와 숙식을 해결해야 했던 명(明)나라 난민들은 조선(朝鮮)에 갖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조선의 민가(民家)를 약탈하고, 관청에 몰려와 식량을 내놓으라고 집단 시위를 했다. 자연히 조선의 민관(民官)과 충돌이 생기고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명(明)의 난민(難民)들을 미래의 화근(禍根)으로 인식했다. 비변사(備邊司)가 대책을 내놓지 못하자 광해군이 직접 나섰다. 우선 국경지대의 평안도 수령(守令)들에게 난민이 조선 영내로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의치 못할 경우 배편을 이용하여 산동(山東)의 등주나 내주로 소환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이미 들어와 있는 난민(難民)들의 신상을 파악하여 거주(居住) 지역별로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관리하라고 지시했다. 경기도 지역까지 깊숙히 들어온 난민(難民)은 남해, 진도 등 원격지로 이주시키게 하였다. 이는 앞으로 제기될지 모르는 후금(後金)이나 명(명)의 송환 요구를 사전에 막으려는 조치이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 영내로 들어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머물던 명나라 장졸(將卒)들의 동태를 살피고 이들이 조선 주민과 접촉하는 것을 막게 했다. 이들을 통해 조선 내부 정보가 명(明)이나 후금(後金)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이었다.
후금(後金)은 1621년 3월 심양(瀋陽)과 요양을 점령하였다. 명(明)의 요동도사(遼東都事) 모문룡(毛文龍)은 요양이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변(鴨綠江邊)의 진강(津江)을 점령했다. 모문룡(毛文龍)은 요동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후금(後金)이 대병력을 투입하자 한달을 버티지 못하였다. 광해군(光海君) 13년인 1621년 7월, 모문룡(毛文龍)은 진강(津江)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토에 들어온 것은 후금(後金)을 크게 자극하였다. 명나라 난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그들은 모문룡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광해군(光海君)은 모문룡(毛文龍)으로 인해 조선이 병화(兵禍)를 입을 수 있음을 크게 우려하였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자 후금(後金)과의 접촉도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모문룡이 조선에 들어오자 요민(遼民)들과 명나라 패잔병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1621년 12월, 후금의 아민(阿敏)은모문룡을 치러 5천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후금군은 의주, 가산, 용천 등지를 습격하였고, 모문룡은 용천(龍川) 관아에 있다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간신히 탈출했다.
광해군(光海君) 14년인 1622년 11월, 모문룡(毛文龍)은 광해군(光海君)의 권유(勸誘)대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섬인 가도(暇島)로 들어갔다. 가도(暇島)는 고려(高麗)가 몽고 침략을 받았을 때 서북면병마영이 설치된 곳이었다. 조선은 이곳을 목마장(牧馬場)으로 운영해왔다. 명나라 패잔병들과 난민(亂民) 등 1만여 명이 가도에 몰려들었다. 모문룡은 여기에 진(鎭)을 치고 동강진(東江鎭)이라 하였으며, 명과 조선으로부터 식량, 병기 등을 공급받고 계속하여 후금(後金)을 교란하였다. 모문룡의 후방 교란으로 후금의 요서(遼西) 진출은 큰 제약을 받았다. 모문룡의 가도 주둔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6년 8월 김상헌(金尙憲)은 ' 성절겸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 '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주요한 임무는 당시 가도(暇島)에 주둔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명나라 무장 모문룡(毛文龍)과 과련된사정을 명나라 조정에 해명하는 것이었다. 첫번 째 호란(胡亂)인 정묘호란(丁卯胡亂)은 김상헌이 북경(北京)에 도착한 직후에 발발하였다. 인조(仁祖) 5년인 1627년 3월에 북경(北京)에서 그 소식을 들은 김상헌은 명(明)에 원병을 주청했지만, 정묘호란은 개전(개전) 두 달만에 종결되었다.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後金)은 광해군(光海君)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지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仁祖)가 ' 향명배금(向明排金) ' 정책을 표방하고, 요동(遼東)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나라 군대를 평안도 철산(鐵山)의 가도(暇島)에 주둔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므로, 명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後金)은 배후(背後)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後患)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후금(後金)은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무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서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後金)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들이 광해군(光海君)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後金)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1627년 1월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後金軍)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건넜다. 그들은 ' 전왕(前王) 광해군(光海君)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 '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安州),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지니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仁祖)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도(江華島)로 피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란하였다.
황주(黃州)에 이른 후금군(後金軍)은 2월 9일 부장 유해(劉該)를 강화도에 보내 1)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사용하지 말 것. 2) 왕자를 인질(人質)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1). 화약(和約)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2). 후금군은 철병(撤兵)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3). 양국은 형제국(兄弟國)으로 정할 것 4).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작재(敵對)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로써 약 2개월에 걸친 정묘호란은 끝이 났다. 그러나 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약 9년 후에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이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기 전까지 김상헌(金尙憲)은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대사헌 등 중직에 두루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석실(石室)로 돌아갔다.
1627년 후금(後金 .. 뒤의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1차 침략, 즉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後金)에 대해 형제(兄弟)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後金)의 요구를 들어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병자호란의 원인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화약(和約)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强請)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後金軍)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民家)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맥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後金)을 공격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後金)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북경(北京)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맺은 ' 형제의 맹약 (兄弟의 盟約) '을 ' 군신의 의 (君臣의 義) '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 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약(和約)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하여 선전(宣戰)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仁祖妃)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君臣의 義)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仁祖)도 이에 동조하여 사신(使臣)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後金) 사신(使臣)을 감시하게 하였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民家)의 마필(馬匹)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이 후금(後金)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에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後金)은 나라 이름을 ' 청(淸) '으로 고치고 연호(年號)를 숭덕(崇德)이라 했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使臣)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斥和意志)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斥和論)을 주창한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이에 청(淸)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병자호란과 김상헌
청나라 태종(太宗)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명의 대군을 심양(瀋陽)에 모아, 그들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공략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急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敵)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3일 오후 늦게 재차 장계(壯啓)가 이르러 청군(淸軍)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도성 안은 흉흉해 성(城)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開城留守)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미미 개성(開城)을 진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하여금 강화(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남한산성 南漢山城
한편 인조(仁祖)는 원임대신(原任大臣)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 아들 봉임대군(鳳林大君),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하여 강화도(江華島)로 피하도록 했다. 인조(仁祖)도 그날 밤 남대문(南大門)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江華島)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나라 군대가 벌써 영서역(迎曙驛 .. 지금의 불광동)을 통과하였으며, 마부태가 기병(騎兵)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
인조(仁祖)는 다시 성(城) 안으로 들어와 남대문 누각(樓閣)에 앉아 사후 대책을 물으니, 전(前) 철산부사 지여해(池如海)가 정병(精兵) 500명을 주면 사현(沙峴)에 나아가 청군의 선봉부대를 물리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은 무리(無理)라고 반대하였으며, 결국 이조판서(吏曺判書)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 청군(淸軍)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出兵)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遲延)시키는 사이에 인조(仁祖)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인조(仁祖)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榴) 등은 남한산성이 지리적(地理的)으로 불리(不利)함을 들어 야음(夜陰)을 타서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날 15일 새벽에 인조(仁祖)는 남한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山)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王)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江華島)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山城)으로 돌아왔다. 이때 성(城) 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천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 부원수와 각 도(道)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明)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援兵)을 청했다. 이 때 성 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선봉은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청태종(淸太宗)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城)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城)을 빠져나가 순찰 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같은 달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軍)이 출전해 또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끄로 서성(西城)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의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 할 큰 싸움 없이 40여 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慘狀)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道)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왓던고 관군(官軍)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강화론의 대두
위에 본 바와 같이 남한산성으로 구원오는 군사가 모두 붕괴되고 성(城) 안은 안과 밖이 끊어져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차차 강화론(講和論)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주화파(主和派)는 주전파(主戰派)와의 여러 차례 논쟁을 거듭했으나, 주전파(主戰派)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조판서(禮曺判書) 김상헌(金尙憲), 이조참판 정온(鄭縕)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강화(講和)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병자호란과 김상헌
청나라 인질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김상헌은 양주 석실(石室)에 있었다. 66세의 노대신(老大臣)은 남한산성으로 몽진(夢塵)한 조정을 뒤따라 들어갔고, 그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척화(斥和)와 항전(抗戰)을 주장했다.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먼저 싸워 본 뒤에 화친(和親)해야 합니다. 만약 비굴한 말로 강화(講和)하여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講和)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김상헌은 세자(世子)를 인질(人質)로 보내는 데 반대하였고, 최명길(崔鳴吉)이 지은 항복국서를 찢어버렸다. 그는 '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 '라는 인조(仁祖)의 말에 ' 천도(天道)를 믿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인조(仁祖)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음집. 청음집)
1637년 1월에 김상헌은 스스로 죽음을 결행하기도 했다. 엿새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풀어주어 살아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어 거의 죽을 뻔한 것이다. 그달다 그믐, 인조(仁祖)는 성(城)을 나왔고, 항복(降伏)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왕조 역사에서 처음 겪는 가장 큰 굴욕이었다. 척화(斥和)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67세의 노대신(老大臣)의 마음은 그지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세상을 따날 때까지 김상헌은 여러 고초(苦楚)를 겪었다. 물론 반청(反淸)의 댓가이었다. 1637년 2월 7일에 그는 안동(安東)으로 낙향(落鄕)했다. 형 김상용(金尙容)이 강화도에서 순절(殉絶)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뒤였다. 3년 뒤인 1640년 11월에 김상헌은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는 김상헌이라는 인물이 관작도 받지않고 청(淸)의 년호(年號)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조정에서는 그를 심양(瀋陽)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12월에 그가 도성(都城)을 지날 때 인조(仁祖)는 어찰(御札 ..임금의 편지)을 내려 위로하였다.
경(卿)은 선조(先祖)의 옛 신하로서 나를 따라 함께 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의리(義理)로는 군신(君臣) 사이이지만 정리(情理)로는 부자(父子)와 같다. 뜻밖에 화란이 터져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것은 참으로 내가 현명하지 못한 소치이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서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껄끄러운 사정이 있어 그렇게 못했다. 경(卿)은 모쪼록 잘 대답해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바란다.
김상헌은 ' 소신이 형편없이 못난 탓에 끝내 성상(聖上)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모자랍니다 '고 화답하였다. 그를 만나고 온 신하들은 행동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김상헌은 1641년 심양(瀋陽)의 북관(北館)에 구류(拘留)되었다.그해 11월 부인이씨가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도 병이 심해져 12월에 의주(義州)로 보내졌다가 1643년 1월에 다시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 당시 대표적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도 심양(시먕)에 잡혀와 있었다. 16세의 나이 차이로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大臣)이 포로(捕擄)의 신세로 주고받은 시(詩)는 극명한 인식(認識)의 차이(差異)를 보여주고 있다. 최명길(崔鳴吉)은 '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 .. 湯水俱是水 구葛莫非衣 '라고 읊었고, 김상헌(金尙憲)은 그 운(韻)에 맞추어 이렇게 화답하였다.
成敗關天運 성패는 천운에 관계되어 있으니 / 須看義與歸 의(義)에 맞는가를 보아야 하리 / 雖然反夙暮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고 해도 / 鉅可倒裳衣 치마와 웃옷을 거꾸로 입어서야 되겠는가 / 權或賢猶誤 권도(權道)는 현인도 그르칠 수 있지만 / 經應衆莫違 정도(正道)는 많은 사람들이 어기지 못하리 / 寄言明理士 이치에 밝은 선비에 말하느니 / 造次愼衡機 급한 때에도 ㅈ울질을 신중히 하시기를.
귀국과 사망
김상헌(金尙憲)을 비롯한 조선 지식인 대부분의 정신적 지주이었던 명(明)나라는 인조(仁祖) 22년인 1644년에 멸망하였다. 그 때 김상헌의 나이 74세이었다. 이듬해 2월에 김상헌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귀국하였다. 그는 바로 석실(石室)로 돌아갔다. 소현세자는 두 달 뒤 급서(急逝)하였다. 이때부터 김상헌은 사망할 때까지 주로 석실(石室)에 머물렀다. 인조(仁祖) 24년인 1646년에는 좌의정에 제수되었지만 무려 32번이나 사직(辭職)해 한직(閑職)인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1649년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다시 한 번 좌의정으로 불렀으나 역시 고사하였다. 그 대신 10월에 임금을 알현하면서 인사(人事)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절개를 상징하는 노대신(老大臣)의 일새은 3년 뒤인 1652년 6월 25일, 82세를 일기로 마감되었다. 그는 석실(石室)의 선영에 모셔졌고,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문정(文正)이라는 시호(諡號)를받았다. 양주(陽州)에 세워진 석실서원(石室書院)을 비롯한 여러 서원(書院)과 남한산성(南漢山城) 현절사(顯節祠)에 모셔졌으며, 효종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37세의 차이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송시열(宋時烈)은 스승을 이렇게 기렸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으면 인류가 전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이 선생 같은 분을 내어 한 번 다스려질 조짐을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이미 선생 같은 분을 내었는데 사람이 도리어 선생 같은 분을 숨겨 두려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후손의 융성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세도가문(勢道家門)인 ' 안동 김씨 (安東 金氏) '는 실질적으로 김상헌(金尙憲)에게서 비롯되었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 삼수육창 (三壽六昌) '이다. '삼수(三壽)'는 김상헌의 양자(養子)인 김광찬(金光璨)의 세 아들 김수증(金壽增 .. 공조참판), 김수흥(金壽興 ..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 영의정)이고, ' 육창(六昌) '은 김수항의 여섯 아들 김창집(金昌集 .. 영의정), 김창협(金昌協 .. 대사간, 대사성),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즙(金昌楫), 김창립(金昌立)이다.
역사의 라이벌 ... 김상헌과 최명길
시간이 흐르면서 청(淸)과의 교섭은 조선의 ' 항복조건 (降伏條件) '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당시 맺은 ' 형제관계 (兄弟關係) '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淸 太宗)은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 신속(臣屬)'을 요구했다. 오랑케를 황제(皇帝)로 섬겨야 하는 ' 현실 '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하였다. 하지만 신속(臣屬)으로 끝이 아니었다. 청태종은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和議)를 배척한 척화파(斥和派)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참담한 사신(使臣)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淸軍)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使臣)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들은 청나라 진영에서 청태종(淸太宗)의 ' 노여움 '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상찬(賞讚)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山城)의 척화파(斥和派)들로부터는 ' 오랑케에게 고개를 숙인 자 ' 또는 ' 대의명분을 저버린 자 '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1월 13일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조선 사신(使臣)들은 청나라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최명길(崔鳴吉)은 ' 황제는 참으로 관대하고 도량이 넓은 분입니다. 진실로 남한산성을 공격하여 도륙(屠戮)하고자 한다면 청군(淸軍) 또한 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 우리 임금과 신료들은 저항하다가 힘이 미치지 못하면 자결할 것이니 그대들이 입성(入城)하는 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시체(屍體) 더미뿐일 것입니다. 그대들이 죄를 뉘우치는 조선을 용서한다면 영원히 은인(恩人)이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 '라고 청군 지휘부를 달래려고 시도했다.
홍서봉(洪瑞鳳)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들의 감성(感性)에 호소했다. 홍서봉은 직접 마른 풀을 집어 태우면서 청군(淸軍) 지휘관들에게 ' 이 풀이 비록 바짝 말랐지만 하늘이 비와 이슬로써 적셔준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오늘 조선이 그대들로부터 허물을 용서받는다면 황제는하늘이되고, 그대들은 비와 이슬이 되는 것이오 '라고 말했다. 눈물겨운 노력이자 몸짓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호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1월 17일에 보내온 화답에서 무조건 항복(降伏)하고 신속(臣屬)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최명길의 항복 문서
1월 18일, 논란 끝에 최명길(崔鳴吉)이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國書)의 초안을 완성하였다. 비변사(備邊司) 신료(臣僚)들이 그것을 돌려보면서 문구(文句)를 수정했다. 신료(臣僚)들은 초안(草案) 가운데 청 태종을 ' 폐하 (陛下) '라고 호칭한 것을 지웠다. 내용은 당연히 지난번 보냈던 것보다 더 공손해지고 스스로를 더 낮추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소방(小邦)은 10년 동안 형제(兄弟)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大國)의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罪)를 얻었으니, 후회하여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命)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하락하신다면, 문서(文書)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을 따를 것입니다.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 라는 구절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아직 ' 신(臣) '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청 태종(淸 太宗)을 황제(皇帝)로, 청(淸)을 황제국(皇帝國)으로 섬겨 군신(君臣)관계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당시 맺었던 형제(兄帝)관계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상 '항복(降伏)'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인조(仁祖)가 성(城)을 나나는 것만은 면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최명길(최명길)은 이렇게 썼다. ' 성(城)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命)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시는 뜻이기는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데,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城)을 나가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 또한 서글픕니다. 옛 날 사람이 성(城)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 남한산성(남한산성)을 나가서 항복하는 대신 청 태종이 회군(回軍)하는 날, 성(城)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나마 인조(仁祖)의 체면과 위신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려는 몸짓이었다.
김상헌의 통곡
항복 국서(國書)의 최종본을 완성하기 위해 최명길(崔鳴吉)은 비변사(備邊司)에 머물면서 내용을 가다듬었다. 이 때 예조판서(禮曺判書) 김상헌(金尙憲)이 들어와서 그 내용을 보고는 통곡(痛哭)하면서 찢어버렸다. 김상헌은 인조(仁祖)에게 달려갔다. 저들과의 명분이 정해지고 나면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義利)를 요구할 것이니, 성(城)을 나가는 일을 면(免)치 못할 것입니다. 일단 성문(城門)을 나서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적군(敵軍)이 성(城)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정강(靖康)의 변(變)을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정강의 변(靖康의 變)이란 1126년 금군(金軍)이 송(宋)나라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함락시킨 뒤,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과 황제 흠종(欽宗)을 붙잡아 간 사건을 말한다. 휘종(徽宗)은 금(金)나라의 오지(奧地)인 만주(滿洲)로 끌려 가 눈이 먼 상태에서 객사(客死)했고, 흠종(欽宗) 역시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은' 정간이 변 ' 때 송(宋)이 처한 상황과 여러모로 흡사했다.더욱이 성(城)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淸軍)은 금군(金軍)이 후예이었고, 조선은 중국의 어느 왕조(王朝)보다도 (宋)나라를 존모(尊慕)해 왔다. 김상헌은, 신속(臣屬)하겠다고 약속할 경우 분명 성(城)을 나가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조(仁祖)와 왕세자(王世子) 또한 휘종과 흠종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김상헌(金尙憲)은 일단 군신(君臣)의 명분을 받아들이면 그나마 남아 있는 성 안의 결전의지(決戰意志)는 급속히 해체되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군신관계(君臣關係)'에 반대하는 대다수 신료들의 의견도 비슷하였다. 이식(李植)은 ' 우리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보이면, 저들이 도륙(屠戮하여 입성(入城)한 이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아 포위를 풀고 몰러갈지도 모른다 '는 예측을 내놓았다. 국서(國書)를 바로 보내지 말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내용을 다시 수정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에 인조(仁祖)는 반문(反問)한다. 양식(糧食)이 지탱하기에 충분하고, 병력이 적(敵)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어찌 이런 일을하겠는가 ?' 그러면서 인조(仁祖)는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탄식하였다. 주변에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눈물을 떨구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통곡 소리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다시 나서는 최명길
최명길(崔鳴吉)이 다시 나섰다. 이제 신속(臣屬)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서(國書)를 보내는 것을 늦추자는 주장도 일축하였다. 늦추자고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 그대들이 사소한 것에 매달려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다 '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국사를 논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1월 18일, 논란 끝에 완성된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군(淸軍)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청군 지휘부는 국서(國書)의 접수(接受)를 거부하였다. 인조(仁祖)의 출성(出城)을 거부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사신(使臣)들이 하릴없이 돌아오자, 비변사(備邊司)는 삭제(削除)하였던 ' 폐하 (陛下) '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다시 보냈다. 1월 19일, 홍이포(紅夷砲) 포탄이 성(城)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조(仁祖)의 출성(出城)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이었다.
처음으로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남한산성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청태종(淸太宗)은 또한 강화도(江華島)를 공략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조선 왕실(王室)의 가족들과 고관들의 처자식(妻子息)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江華島)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결전(決戰)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미 강화도를 공략할 배를 만들어 두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이었다. 인조(仁祖)가 나오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며 병선(兵船)을 건조하고 있던 청군(淸軍)의 압박 속에서 남한산성의 운명은 종말(終末)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청원루 淸遠樓
조선 중종(中宗) 때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낸 김요(金瑤)가 관직에서 은퇴하고 돌아와 여생을 보낸 곳이라 하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예조판서(禮曺判書)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淸)나라 심양(瀋陽)에 6년 동안 인질(人質)로 끌려가 화(禍)를 당하고 귀국한 김상헌(金尙憲)이 낙향(落鄕)하여 은거(隱居)하던 곳으로, 기존 건물을 누각식(樓閣式)으로 중건(重建)하면서 ' 청(淸)나라를 멀리 한다 '는 의미로 청원루(淸遠樓)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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