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廣州李氏)
광주 이씨 조상들은 신라 칠원(현재의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일종의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여 내려온 칠원성은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만을 왕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하여 끝까지 항거하였다.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칠원성을 함락시키고 이씨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현재의 경기도 광주)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 지방의 노비 중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가 있고 덕망이 높다고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 중에 이당(李唐)이 고을 원님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원님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가 있고 덕망이 높은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이당(李唐)의 아들 다섯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다섯 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음 이덕형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후손들이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칭관하다가, 940년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광주 이씨(廣州 李氏) 시조는 신라 내물왕 시절에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이당(李唐)은 고려 말 국자감(國子監)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조선조에 들어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광주 이씨의 중흥의 조(祖)는 고려 말의 학자 둔촌(遁村) 집이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선생이므로 대부분의 광주이씨 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광주이씨 홈페이지 인용]
광주이씨시조묘역-광주이씨 시조 이당 묘
광주이씨 시조 이당 묘
영천이씨 묘
영천이씨 묘소의 무인석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최원도는 고려말 사람으로 중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영천 땅에 내려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집(李集) 또한 얼마 후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 에게 까지 화가 미칠까봐 매우 걱정이 되었다. 큰 화가 닥쳐 올 것을 감지한 이집은 어느 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경상도 영천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다.
이렇게 하여 이집 선생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는데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러 달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몸종이 하도 궁금하여 하루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밀을 엄수 할 것을 다짐하였고, 만약에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느끼게된 노비는 몇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하게 되었다.
그 몸종의 이름은 “제비”라 하였고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어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연을 알게된 최원도와 이집의 후손들이 그 몸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묘비에 연아(燕娥)의 묘라고 세웠고 지금도 이집의 아버지 묘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 “제비”의 묘소가 있으며 양쪽집안 조상의 묘제 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
몸종이 자결한 후 얼마 안되어 이집의 아버지가 최원도의 다락방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이때 최원도는 자기의 수의를 내주어 정성껏 염습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경상도 영천에 지금도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다락방 생활 4년만에 중 신돈이 맞아죽고 세상이 변하게 되어 나라에서 이집과 최원도를 중용 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었다.
[광주이씨 홈페이지인용]
최원도가 세상이 바뀌어 서울로 올라 가게된 친구 이집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었다는 시 이다
“세상을 탄식하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고향 떠나서 아버지께 드린 효성 지하에까지 미치네.
한양은 멀고 먼 곳, 구름 연기만 자욱한데
나현(이당과 최씨 어머니가 묻힌 고개이름)위에 올라보니 수풀만 우거졌네.
앞뒤로 두개의 봉분을 나란히 세웠으니
그대와 나의 마음 누군들 알겠는가.
원하건대 대대로 지금같이 지내면서
서로의 이해를 떠나 깊은 정 변함없기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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