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정씨(迎日,延日,烏川)
영일 정씨(迎日鄭氏)의 시조인 정종은(鄭宗殷)은 득성조(得姓祖) 지백호(智伯虎)의 원손(遠孫)으로 신라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정종은(鄭宗殷)의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迎日)로 하였다 한다. 본관은 영일(迎日)의 옛 지명을 따라 연일(延日)로, 영일(迎日)에서도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烏川)으로 쓰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영일(迎日)로 통일해 쓰고 있다.
영천시 자양면(영천댐) 좌측산기슭에 있는 오천정씨 묘역
[정세아(鄭世雅)]
1535년(중종 30)∼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사성 정종소(鄭從韶)의 현손으로, 정윤량(鄭允良)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그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천뢰(鄭天賚)‧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니, 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호수실기》가 있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그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천뢰(鄭天賚)‧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니, 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호수실기》가 있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정세아와 배위 일직손씨 묘소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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