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청송]靑松沈氏 시조 심홍부(沈洪孚)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6. 20:38

[靑松沈氏]

 

청송 심씨(靑松 沈氏)의 시조인 심홍부(沈洪孚)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다. 심홍부(沈洪孚)의 증손인 심덕부(沈德符)가 고려 우왕 때에 왜구의 침입을 평정하고 문하찬성사로서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공양왕 때에는 중흥9공신의 함명으로 문하시중이 되어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청송(청성=청송)으로 하였다.

 그뒤 심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1392년 조선 건국 때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 영삼사사를 지내고, 정종 즉위년에 문하부 좌정승을 지냈다. 심덕부(沈德符)의 아우 원부(沈元符)는 고려말에 여러관직을 거쳐 전리판사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경상북도 중부 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청기현인데 신라 때 적선으로 고쳐서 야성군(野城郡: 현 영덕군)에 속했다가, 고려 초에 부이현이 되고 운봉(雲鳳)으로 고쳐서 예주(禮州: 영해)에 속했다. 조선 세조 때 진보현에 합하였고 1419년(세조 원년)에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 후에 진보와 분리되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靑松)으로 개칭하였으며 부(府)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

경파인 심덕부는 조선 개국 후에 좌의정을 지내고 그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지냈으나, 향파인 심원부의 자손들은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심원부의 유훈을 지켜 대대로 고향에 살면서 벼슬을 멀리하였다. 경파는 ‘서울집’이라고도 부르는데,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도총제공파(都摠制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성주지사공파(成州知事公派) ·인수부윤공파(仁壽府尹公派) ·안효공파(安孝公派) ·청원군파(靑原君派) ·동지총공파(同知摠公派)의 7파로 갈라진다.

 

 

 

 

 

 

 

 

 

 

 

 

만세루

 

 

 

찬경루와 운봉관 전경

찬경루

세종 10년(1428년)에 군수 하담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소헌왕후의 8왕자 가 어머니를 위해 각 2칸씩 건축하였다고 하며 화재로 인하여 1688년에 중수하였다. 정면4칸, 측면4칸의 2층누각으로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83호이다. 맞은편 보광산에 있는 심홍부(청송심씨 시조) 묘소의 재각이며 장마철 용전천의 범람으로 묘소로 갈 수 없을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찬경루란 누각명은 군수 하담의 청을 받은 관찰사 홍여방이 순시때 지은 것으로 누각에 올라 심씨시조묘를 보니 소헌왕후를 배출 한 경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운봉관 전경

이 건물은 조선 세종(世宗)10년(1428) 군수 하담(河擔)이 찬경루(讚慶樓)와 함께 건축한 청송군의 객사(客舍)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중수기문에 의하면 선조때(1600년경) 한차례 중건한 바 있으며 숙종(肅宗) 43년(1717)부사 성환(成煥)이 다시 중수하였고 순조(純祖) 12년(1812) 부사 강휘옥(姜彙鈺) 및 고종(高宗) 8년(1871) 부사 윤현기(尹顯技)가 각각 중수하였다. 이 건물은 찬경루뒤쪽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객사는 원래 중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양익사가 배치되어 있는 건물이었으나 한일합방후 1918년경 중당과 서익사가 없어지고 현재 동익사에 현판을 달아 보존하고 있다. 현 객사는 정면6칸 측면3칸의 집으로 건축시기는 양식으로 보아 조선중기까지도 올려 볼수 있으나 일부분은 조선후기 양식을 나타내고있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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