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안동]문충공 서애 류성룡(文忠公 西厓 柳成龍)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6. 20:37

[文忠公 西厓 柳成龍]

 

본관 풍산(). 자 이현(). 호 서애(西). 시호 문충(). 의성 출생. 이황()의 문인. 1542년 류중영안동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익혔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문제로 서인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調)가 되어 《기효신서()》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와 맞대결한 류시훈()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 ·병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 등이, 편서에 《황화집()》 《정충록()》 등이 있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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