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전은 고려의 태조(太祖) 이하 태종(太宗),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 성종(成宗), 목종(穆宗), 현종(顯宗)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嵋山面)에 있다.
숭의전 입구에 있는 어수정 - '御水井'은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부하였을때 개성에서 궁예가 있는 철원까지 오가는 길에 이곳에 있던 앙암사라는 절에서 1박을 하곤 하였으며 그때 이 물을 마시었기에 임금이 마신물이라는 어수정(御水井)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물 맛이 차고 달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꿈에 역대 고려왕들이 나타나 前왕조를 이리 홀대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 꿈을 무학대사에게 의논하니 前왕조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드려 혼령들을 위로해드리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바로 그렇게 하지 않고 돌(石)로 배를 깎으라 하고 이 배가 가라앉지 않으면 내 그리하겠다한후 그 배를 띄우니 과연 그 배가 가라앉지 않고 둥둥 뜨는게 아닌가? 이에 놀라 고려 왕들의 위패를 배에 싣고 사당을 세울 터를 찾으라 하니 그 배는 노를 젓지 않아도 저절로 떠내려가다가 임진강에 이르러 거꾸러 상류로 역류하여 올라 오다가 어느 나루터에서 멈추었다. 이것이 신의 뜻이다 여긴 사람들은 날이 저물어 배를 쇠밧줄로 묶어놓고 다음날 보니 배는 움직이고, 밤새 쇠밧줄은 썩어서 끊어진 채 없어졌다. 그 후 이 나루터를 썩은 소 나루터(朽淵津)라 불리게 되어 오늘날 '썩은 소'라는 지명이 생겼다.
숭의전은 사적 제 223호로, 조선의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연 다음 전 왕조 왕의 위패와 왕릉을 보존하는 것이 전통적인 예의였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1397년(태조 6)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에게 이 지역의 봉토를 주고 머물면서 고려 태조의 묘를 세우도록 했다. 1399년(정종 1) 숭의전 건물을 짓고 고려 태조와 8왕(혜종·현종·원종·충렬왕·성종·경종·문종·공민왕)의 제사를 봄·가을로 2번 받들도록 했다. 그러나 1425년(세종 7) 예법에 제후는 5묘를 세워야 하는데 고려의 8위는 부당하다 하여 태조·현종·문종·원종 4위만을 받들도록 했다.
1445년에는 관리비용으로 묘지기에게 삼국시조위전(位田)의 예를 따라 각자수세지인 숭의전전(崇義殿田)을 1위에 3결씩 12결을 지급했다. 1451년(문종 1) 문종은 고려 현종의 후손이 이름을 바꾸어 공주에 사는 것을 찾아내 그에게 순례(循禮)란 이름을 지어주고 3품관직과 토지·노비를 지급하여 숭의전에서 대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때 숭의전이라 이름했으며 배향공신도 선정하여 함께 받들도록 했다.
처음에는 사당의 관리를 위해 숭의전사(종3품)·수(守 : 종4품)·영(令 : 종5품)·감(監 : 종6품) 1명씩 두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와 수를 없애고 능참봉(종9품)을 신설했으며, 수·감·능참봉은 왕씨만 세습하도록 했다. 건물은 정전(正殿)·후신청(後臣廳)·전사청(典祀廳)·남문(南門)·협문(夾門)·곳간·수복사(守僕司) 등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1973년 왕씨 후손이 정전을 복구했고, 1975~76년에 이안청·배신청·삼문을 원래의 위치에 복원했다.
正殿 숭의전(崇義殿) -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내부에는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다시 흘러가던 돌배가 멈춘곳은 지금의 숭의전 앞인데 당시에는 바로 그 앙암사(仰巖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그 근처에서 사당을 지을 명당 터를 찾지 못한 일행은 다시 밤이 되어 앙암사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는데 그날 밤 주지스님의 꿈에 태조 왕건이 나타나서 '절을 옮기라'고 명을 하였다.
깜짝 놀란 주지스님이 급히 일어나 이삿짐을 챙기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앙암사에 벼락이 떨어져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폭우가 내리고 사방이 소란스러운차에 절에 있던 범종이 숭의전 앞 소용돌이 치던 곳으로 빠져버렸고 그 돌배도 함께 가라앉아 버렸다.
이후 그 곳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앙암사는 아미산 골짜기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 숭의전을 짓게 되었다.
고려시대 유적이 별로 없어 아쉽던차에 宗廟에 버금가는 이곳 숭의전을 찾아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비록 조선시대 종묘에는 비할수 없을만큼 초라하면서 볼품없는 시설이지만 그 희귀성을 볼 때 유일한 고려유적이 아닌가 싶다. 이성계와 돌배이야기나 주지스님 꿈이야기등은 그야말로 전설일테지만 아마도 새왕조를 세운후 전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향수와 반감을 고려하여 민심을 무마하는 차원에서라도 이런 시설은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위패나 사당, 묘지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래의 민심과 속설들을 상기해볼때에 개국초에 王氏들을 모두 배에 태워보낸후 가라앉혀 水葬을 시킨 이성계였지만 고려 왕들의 위패마저 모두 태워버릴수는 없지 않았을까?
숭의전에는 모두 5개의 전각이 있는데 가운데 중앙이 정전인 '숭의전'이며 그 왼쪽으로 들어가면서 첫번째가 앙암재(仰巖濟), 다음이 전사청(典祀廳), 숭의전 오른쪽이 이안청(移安廳)이다. 맨 오른쪽은 배신청(陪臣廳)으로 방향을 틀어 西向을 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6. 25전쟁으로 모두 불타버린것을 1971년에 사적으로 지정한 후 다음해부터 다시 세운것으로 1899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던것으로 마전군(麻田郡) 읍지(邑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배신청(陪臣廳).
배신청 안에 모셔진 고려 공신들의 위패 - 고려조 충신 16명,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을 배향한다.
이안청(移安廳) - 숭의전을 청소하거나 공사할때에 위패를 잠시 모셔두는 곳이다.
1789년 (정조13년) 마전군수였던 한문홍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속에 담긴 무상함을 담아 숭의전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새겼다는 칠언절구 사진이 놓여있다.
전사청(典祀廳) - 제례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다.
앙암재(仰巖濟) - 3칸 규모의 건물로 숭의전 건물들이 모두 정면 3칸규모이다. 이곳은 원래 위에서 언급한 어수정(御水井)설명에 나온대로 왕건이 개성과 철원을 오며 가며 들렸던 인연에 따라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 원찰이 되었던 앙암사(仰巖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앙암재(仰巖濟)는 제례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으로 관리사무소 비슷한 역할과 기능을 하는 곳이다. 내부에는 제관들이 제례봉행때 입는 복장이 준비되어 있으며 북한 왕건릉에서 출토되었다는 왕건 동상의 사진이 있다.
전각들은 각각의 돌담장으로 둘러져 서로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특히 앙암재와 전사청은 별개의 건물처럼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들을 연결하거나 밖으로 드나드는 門이 또한 6개나 된다.
왕순례의 묘 - 숭의전을 세우고 문종때에는 생존을 위하여 성씨를 바꾼채 공주에 숨어사는 후손을 찾아내어 이곳을 관리하도록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려 손손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초대 숭의전 관리를 맡았던 왕숭례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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