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 정문 - 성균관은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大學)의 명칭으로,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주례 周禮』에 의하면 ‘성균’은 오제(五帝)의 학(學)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음악(音樂)으로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그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균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말로서 즉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탕탕평평비각 - 영조 18년(1742)에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하여 영조친필[어필(御筆)]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린 글을 새긴 비(碑)로서 일명 어서비각(御書碑閣)이라고도 하며, 성균관 입구에 북향 1간(間) 규모로 건립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두루 화합하고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公心)이고, 편당만 짓고 두루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私意)이다.(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고 되어 있다.
하마비.
신삼문(神三門) - 성현들의 신이 드나드는 문묘의 정문으로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있다.
성균관은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東ㆍ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제2과거장)이,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의 父를 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년(1887)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대성전 - 보물 제141호인 대성전은 남향으로 모두 20간(間)으로, 남북으로는 4개, 동서로는 5개의 기둥이 있으며, 앞에는 당(堂)이 있고, 뒤에는 실(室)이 있다.
대성전은 높은 장대석기단을 쌓고 주좌(柱座)를 쇠시리한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拱包)를 짠 다포(多包)양식이다. 정면 5간(間) 측면 4간(間)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단층구조이다.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으로 초제공, 이제공은 모두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놓이는 첨차는 삼분두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출첨들은 초제공과 이제공의 끝은 교두형이지만 삼제공 끝은 역시 삼분두형을 이루고 있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현재 대성전(大成殿)의 현판(懸板)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 1543∼1605)의 친필(親筆)이다.
묘정비각 - 대성전 앞 뜰에 있는 비각(碑閣)으로서 태종 10년(1410)에 문묘를 복건(復建)한 뒤 변계량(卞季良)에게 문묘의 연혁을 기록하게 하고, 각석(刻石)하여 세웠다.
비각은 중종 6년(1511)에 서향 1간(間)으로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러나 인조 4년(1626)에 변계량이 썼던 문장을 다시 각석하고, 이정구(李廷龜)에게 명(命)하여 비음(碑陰)을 기록하게 하고, 이를 이홍주(李弘胄)가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하여 비각을 복원하였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태조 6년(1397)에 문묘의 창건을 명하였으며, 이듬해인 태조 7년(1398)에 대성전이 완성되었다. 정종 2년(1400)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 7년(1407)에 재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4년(1601)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은 문묘(文廟)의 정전(正殿)으로서 공부자(孔夫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공부자의 위패를 중앙 정위(正位)로 하여 4성(聖)과 공부자의 제자 10철(哲), 송조육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가 동서로 위차봉안(位次奉安)되어 있으며,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釋奠)을 지낸다.
현재, 전국의 모든 향교(鄕校)에도 석전을 모시고 있다. 그 가운데 성균관의 문묘는 국가의 대표 문묘로서 건축양식과 위패 등, 규모와 격식이 가장 웅장하다.
대성전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오전 10시에 분향례(焚香禮)를 하고 있으며, 매년 양력 5월 11일과 9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제례(祭禮)를 거행하는데, 이것을 석전(釋奠)이라고 한다. 석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원형이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중요 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재(東齋)·서재(西齋) - 동재, 서재는 유생들의 숙소로 사적 143호이다. 명륜당 동서로 있는 장방형의 건물로서 2간(間)이 한 방으로 되어 있는데, 동·서재를 합하면 총 28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후, 현대에 와서 재 건축 과정에서 방의 숫자를 32개로 늘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재의 첫째 방은 약방이고, 그 다음은 우제일방·장의방·진사칸·하일방·하종방의 순서로 되어 있고, 끝 방을 하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재의 첫째방은 서일방이고, 그 이하는 동재의 순서와 같다. 대성전 및 명륜당과 함께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으나, 이후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되었다.
명륜당은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서 중앙에 강당,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으며 총 18간이다.
장대석 쌓기의 기단을 쌓고 기단 전면에 월대(月臺)를 돌출시키고, 월대 앞에 석계(石階)를 놓았다.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二翼工)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 없이 운두가 높은 중도리를 양 측벽에 선 2개의 고주와 대량 위에 걸치고, 종보를 이들 앞 뒤 중도리에 걸었다. 종보에는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한편, 지방의 향교에는 대부분 명륜당이 대성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나, 성균관은 명륜당이 대성전의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고 한다. 현재, 전묘후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향교는 성균관 이외에 전주향교·나주향교·경주향교 등이다.
현재 명륜당의 현판은 앞·뒤로 두 개가 있는데,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 명(明)나라 사신(使臣)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고, 명륜당 안의 벽 위에 있는 것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講學) 장소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 중에서 정원을 엄정하게 선발하여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서재(東·西齋)에 기숙하게 하고,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매일 새벽에 북이 울리면 동·서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명륜당 아래에 늘어서서 한 번 읍(揖)한 뒤 당(堂)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 이 밖에도 명륜당은 유생(儒生)들의 시독(試讀)과 소과(小科)·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科擧場)으로도 활용되었다.
한편, 명륜당 뜰에는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된 유교의 상징목(象徵木)인 은행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 2그루의 은행나무는 중종 때 대사성 및 동지관사를 역임한 윤탁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학생들에게 뿌리가 무성해야만 가지가 발달할 수 있음을 가르쳐 그 근본에 힘쓰도록 하기 위함이다.
대성전의 문묘에 모신 위패는 시대별로 변해왔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문묘에 모신 위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성전에 공자와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 등의 4성(聖)과 10대 제자,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 6명 등 21위가 모셔졌으며, 동·서무에 우리나라의 18위와 중국의 유학자 94위를 합해서 모두 112위를 모셨다. 문묘 전체로 보면 133위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기가 끝나고, 1946년 전국 유림의 대표로서 성균관을 재건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은 1949년 문묘 배향(配享) 성현에 대한 대대적인 조정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동·서무에 있던 우리나라의 18현(賢)의 위패는 모두 대성전으로 모시고, 중국의 위패는 모두 땅에 묻었다. 이리하여 현재 성균관 문묘에는 본래 대성전에 있던 21位와 우리나라의 18位를 포함해서 모두 39位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성균관은 옛 성현(聖賢)들에 대한 배향(配享)공간과 교육공간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대성전은 배향공간에 속한다. 대성전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공부자의 제자, 후대의 성현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학자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성균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은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4개 향교(鄕校)에 모두 설치되어 있으나, 성균관 내의 대성전이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완비되고 규모가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균관은 크게 옛 성현(聖賢)들에 대한 제사(祭祀)공간과 교육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대성전은 배향공간에 속한다. 대성전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공부자의 제자, 후대의 성현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학자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성균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은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4개 향교(鄕校)에 모두 설치되어 있다. 대성전 앞에는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3개의 가지와 5개의 가지로 뻩은 나무가 심어져 있다.
대학당 - 대학당은 성균관을 관리하던 남자 종들의 거실로, 대성전의 서쪽 담장 밖에 남향, 4간(間)규모로 건립되었다.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4년(1601)에 중건되었다.
제기고 - 각종 제사에 사용되던 제기(祭器)를 보관하던 곳으로,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며, 제기를 보관하던 장소로서 대성전 서쪽에 북향, 6간(間)규모로 건립되었다.
동무, 서무의 판문 - 동무와 서무는 선유(先儒)들의 위패를 나누어 모시는 곳이다. 한양 천도 이후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에 중건(重建)되었다.
대성전의 좌·우측에 있으며, 동무는 서향, 서무는 동향이다. 각각 11간(間)으로서 맞배지붕 양식이다.
동·서무에는 본래 공문제자(孔門弟子) 69위(位)와 중국의 한(漢)·당(唐)·송(宋)·원(元)의 제현(諸賢) 및 우리나라의 18현(賢) 등 112위(位)를 동·서로 봉안하였다.
그러나 1949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의 결정으로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의 동·서무에 봉안되어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종향(從享)하고, 그 밖의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 : 위패를 땅에 묻음)하여 현재 동·서무는 비어 있다.
성균관의 직제는 각 시대별로 많은 변천을 하였다.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정2품 지사(知事) 1인과 종2품 동(同)지사 2인은 겸관(兼官)이었다. 정3품 대사성(大司成) 1인, 종3품 사성 2인, 정4품 사예(司藝) 3인, 정5품 직강(直講) 4인, 정6품 전적(典籍) 13인, 정7품 박사(博士) 3인, 정8품 학정(學正) 3인, 학유(學諭) 3인, 정9품 학록(學錄) 3인으로 교수직이 조선 초기의 22인에서 38인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의 『속대전 續大典』에 의하면 제주(祭酒)가 정3품관으로 설치되어 1ㆍ2품관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정조(正祖)때의 『태학지 太學志』에는 지사(정2품에서 정1품까지)를 대제학(大提學)이 겸직토록 하였고, 인원이 더욱 늘어났다.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한하여 부여되었다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하였다. 정원은 시대에 따라 다른데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말기 에 100명으로 축소하였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이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으니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원ㆍ진사가 아니더라도 사학(四學)의 생도 가운데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ㆍ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및 생원ㆍ진사의 초시(初試:漢城와 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였다.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밖에 과문(科文:詩ㆍ賦ㆍ訟ㆍ策ㆍ義ㆍ疑 등)의 제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ㆍ불경(佛經)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교수 방법은 먼저 구재 가운데서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 大學』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臺諫:司憲府ㆍ司諫院)의 관원 각각 1명씩을 성균관에 파견하여 성균관의 교관과 함께 학생에게 강문(講問)하여 강설(講說)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전체의 뜻을 잘 파악한 자는 논어재(論語齋)에 올리고, 통하지 못한 자는 통할 때까지 대학재에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어재에서 맹자재(孟子齋)ㆍ중용재(中庸齋)ㆍ시재(詩齋)ㆍ서재(書齋)ㆍ역재(易齋)로 차례차례 진재(進齋)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서 오경에 통한 자는 명부에 기재하고 성균관에 보관하였다가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분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제도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시대에 따라서 원칙으로만 지켜지고 적당한 방법으로 교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시험 과목과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서 경서(經書)와 사장(詞章)의 학습 비중이 이에 맞추어 달라진 것이다. 또 『실록 實錄』의 기록에 나타난 교수의 한 방법은, 즉 태종 13년(1413) 대사성 권우(權遇)의 상서로 정부가 결의한 것인데, 성균관 학생은 1개월 가운데 20일은 경서를 읽고, 4일간은 배운 것을 고강(考講)하고, 6일간은 과거의 문장인 제술을 실시하여 월말에 그 달에 배운 경서의 다소(多少)와 고강 및 제술의 분수(分數:9등급의 점수)를 기록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식년에 이르러 분수를 총계하여 상등 5명 내지 10명을 ‘대성(大成)’이라 하여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전계(轉啓)하여 관시(館試: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會試:覆試)를 보게 하였다. 그 이하는 모두 관시를 보게 하였다. 그리나 사학에서 승보(升補)된 기재생은 소성(小成)ㆍ대성을 막론하고 모두 생원시를 보도록 하였다. 이 방법은 후에 부분적인 변동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성균관의 교수방법에 있어서 한 표준이 되었다. 또 교수와 학생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교수 방식과 개별 지도에 치중하고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비천당 - 제2과거 시험장으로 활용되던 곳으로 현종(顯宗) 5년(1664)에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남은 재목으로는 서쪽과 남쪽의 일양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일양재와 벽입재를 제외한 비천당만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비천당은 제1 과장(科場)인 명륜당과 함께 제2 과장(科場)으로서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명륜전문학교 설립 후에는 주로 교실과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비천당은 니원(尼院 : 즉, 僧房)을 헐어 낸 목재로 건립하였으며, 주자(朱子)가 말한 "큰 도를 밝힌다.[丕闡大猷]"라는 말에서 그 명칭이 정해지게 되었다.
존경각은 서적과 경판을 보관하던 곳 - 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嚆矢)로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약 400여년 동안 유일한 대학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명륜당 북쪽에 있는 존경각은 성종 6년(1475)에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은 수 만권의 책을 하사하였다. 이후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어 복원한 뒤로 왜란(倭亂)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改修)하였다.
기본 장서는 사서오경·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儒家)서적 위주였으며, 불교·도가와 기타 잡류의 도서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장서의 분량은 존경각 건립 초기에는 수만 권에 달했으나, 잇단 전란(戰亂)과 재정의 부족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었다.
고종 32년(1895)에 성균관 학제변경으로 경학과가 설치됨에 따라 존경각은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으나,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대부분의 도서가 강제로 옮겨지고, 나머지만이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육일각 - 육예(六藝)의 하나인 대사례(大射禮)의 기구를 보관하던 곳이다. 영조 19년(1743)에 향관청의 서쪽에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명륜당의 동북쪽으로 이건하였다.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고대 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숭상하였기 때문에 육례(六藝 : 藝(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 중에 하나인 활쏘기[射]를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육일각이란 명칭도 육례 중에 하나라는 뜻으로 정해진 것이다.
유생들은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한편, 유생들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점수를 원점(圓點)이라 하는데, 아침·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으며,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원점을 탄력적으로 조정하여 적용하였다.
유생들의 글씨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고, 성현을 숭상하지 않는 언동을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면 처벌 대상이 되었다. 상론(商論)·재뢰(財賂)·주색(酒色) 등을 말하는 것과, 바둑이나 장기 두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 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 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을 받았다.
상재생(上齋生 : 생원이나 진사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은 하재를 방문하지 못하며, 하재생(下齋生 : 사학생도(四學生徒)와 같은 유학(幼學)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에게 과실이 있으면, 식손(食損 :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과 출재(黜齋 : 재에서 퇴거시키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규율은 엄격한 편이었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하였으며,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통해서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특히, 조정의 부당한 처사나 정책에 대해서는 유소(儒疏)나 권당(捲堂) 등으로 맞섰다. 유소는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고, 이것으로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일종의 동맹 휴학이라고 할 수 있는 권당으로 맞섰다. 조선시대 권당의 횟수는 중종때 1회, 명종 때 4회, 광해군 때 2회, 인조때 2회, 효종 때 1회, 현종 때 2회, 숙종 때 16회, 경종 때 2회, 영조 때 18회, 정조 때 16회, 순조 때 14회, 헌종 때 4회, 철종 때 5회가 있었다.
한편 유생들의 교과목은 일정한 독서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맹자』는 각 4개월, 『시경』·『서경』·『춘추』는 각 6개월, 『주역』·『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한편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들의 제반 경비는 양현고(養賢庫) 소속 토지 1,000결의 지세(地稅)로 충당하였는데, 지세는 흉년이 들면 반감 또는 전감하는 때가 많았다.
진사식당은 태조7년(1398)에 명륜당과 함께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26년에 재건하였다. 동·서재에 기숙하던 유생들의 전용식당으로서 명륜당 동쪽에 남향, 33간(間) 규모(주방(廚房) 10간, 기명고(器皿庫) 1간, 창고 1간, 문 1간 포함.)로 이루어져 있다.
식사 때에는 배번 북을 쳐서 식사시간을 알렸으며[격고고식(擊鼓告食)], 유생들은 의관을 갖추고[구건복회합(具巾服會合)] 서로 인사를 나눈 뒤[상읍이후(相揖以後)]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다.
하연대는 석전(釋奠)·알성시 시학(視學) 등, 군왕이 친히 성균관에 거둥하였을 때, 타고 온 가마[輦]를 놓아두던 곳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전용 주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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