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당 입구의 방지 - 연경당은 후원의 첫째구역인 주합루(宙合樓)·영화당(暎花堂) 일곽을 지나 애련정(愛蓮亭)과 애련지(愛蓮池) 및 의두합(倚斗閤 : 같은 건물의 동쪽 누는 영춘루, 남쪽 마루는 기오헌이다)·운경거(韻磬居) 등이 조성되어 있는 곳 안쪽 아늑한 골짜기에 있다. 삼면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만이 트여 있는데 이곳에 애련정과 애련지가 배치되어 있다.
아름다운 산, 풍요로운 숲, 그리고 연못과 정자가 이루어내는 이상적인 환경 속에 자리 잡은 이 집은 건축적으로도 뛰어난 짜임새와 만듦새를 보여 주고 있다.
괴석.
연경당 장락문 앞의 명당수 - 명당수는 은하수, 석교는 오작교를 상징한 것으로 천상 궁으로 들어가면 오래도록 즐겁다는 의미가 된다.
건축의 향은 정남향으로 하고, 북·동·서 삼면이 산으로 둘러막힌 곳에 북서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남쪽, 즉 집앞을 거쳐 동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물길을 내어 풍수적으로 명당을 형성한 다음, 방위에 맞추어 직각으로 건물군을 배치하였다.
연경당은 궁궐의 후원(後苑) 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사랑채·안채·안행랑채·바깥행랑채·반빗간·서재·후원·정자 및 연못을 완벽하게 갖춘 주택건축이다. 이른바 99칸집이라 불리고 있으나 현재 건물의 실제규모는 109칸 반이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자 집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동궐도(東闕圖)」에는 반빗간(반찬을 만드는 곳. 일명 찬간) 구역에 5칸 규모의 창고와 5칸 규모의 행각(行閣)이 있고, 측간 1칸, 헛간 3칸이 그려져 있어서 원래의 총 규모는 123칸 반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궁궐지(宮闕誌)』에는 120칸으로 적고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바깥 마당과 행랑채 - 배치형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예에 따라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 겹으로 두르고, 중문(中門)이 있는 행랑채에 각각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출입문을 좌우로 벌려 냈다.
행랑채에 딸린 화장실.
수인문 - 문간채를 들어서면 두 개의 중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은 사랑채로 통하는 장양문(長陽門)이고 왼쪽은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修仁門)이다. 이 두 문의 차이점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장양문은 솟을대문인데 비해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은 낮은 평대문이라는 점이다.
이는 남존여비(男尊女卑)ㆍ부부유별(夫婦有別)에 철저했던 당시의 윤리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안채와 사랑채의 도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사랑채의 도리는 둥근 것을 썼고 안채의 도리는 네모난 것을 썼다. 남자는 하늘이며 陽(양)을 상징하고, 여자는 땅이며 陰(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랑채 앞의 안마당과 손님방, 마굿간 - 안채의 뒤쪽으로는 담을 쌓아 독립된 구역을 만드는 한편 바깥 행랑채 동쪽 부분에는 마구간과 가마 두는 곳도 마련하였으며, 이곳의 바깥벽은 나무판자로 막아 집의 전경에 변화를 주는 의장적 요소로 삼았다.
선향재.
선향재의 차양.
연경당 - 궁궐 안의 다른 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한껏 갖추고 있는 데 비하여, 이 집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농수정(濃繡亭)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그러나 문·창문·담장쌓기·문양전(文樣塼)의 벽이나 기단·주춧돌·기둥·보·서까래 등에서 보이는 다양하면서도 세련되고 섬세한 기법은 일반 사대부주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모습이다.
선향재 - 사랑채 안 동쪽에는 누마루를 두었고, 그 동쪽 마당에 선향재(善香齋)라는 서실(書室)을 배치하였으며, 선향재 후원에 높다란 화계(花階)를 쌓아 정원을 만들고 그 위쪽 언덕에 정자를 지어 휴식처를 마련하였다.
농수정
농수정 주변의 연잎동자기둥을 갖춘 돌난간, 사랑 마당에 단정하게 배열된 괴석(怪石), 사랑채 출입문인 장양문(長陽門) 앞 양쪽에 놓인 궁정양식의 정료대(庭燎臺) 등은 여염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이 집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 준다.
창덕궁 연경당은 1828년(순조 28)에 창건되었으며,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하여 세자(1830년에 죽은 뒤 익종으로 높임)가 왕께 요청한 것이 건립동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국여지비고』·『궁궐지』·『순조무자진작의궤부편(純祖戊子進爵儀軌附編)』·『순조실록』·「동궐도」 등을 종합하여 해석하여 보면, 연경당은 1827년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되었으며, 짓게 된 동기는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의식을 맞아서 이를 거행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함이며, ‘연경(演慶)’이라는 이름도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한편, 「동궐도」의 창덕궁 연경당 모습과 『순조무자진작의궤부편』 도설(圖說)에 실린 연경당도는 일치하지만, 현존하는 연경당의 모습과는 다르다. 따라서 현존하는 주택형식의 연경당이 1828년에 세자의 청으로 지어졌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유교의 내외법(內外法)에 따르면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담으로 막고 출입문을 설치하는데, 연경당에서는 사랑채와 안채의 앞마당은 사잇담을 설치하여 구분하고 있지만, 건물은 붙여 지어 사랑채 내부에서 안채 내부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안채 - 헌종 때에 『궁궐지』를 간행하던 당시에는 연경당에 익종의 초상화를 모셔놓았다고 하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의 주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비변사등록』·『일성록』·『승정원일기』 등에는 헌종12년(1846) 초에 연경당이 신건(新建) 되었다는 기록과 고종2년(1865)에 수리공사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현재와 같은 주택으로 완성된 시기는 고종연간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현존하는 연경당에 대한 사료로는 1890년대 이후에 제작된 『궁궐지』와 「동궐도형(東闕圖型)」및 건물의 기둥에 걸어놓은 주련(柱聯) 등이 남아 있어서, 원래의 연경당이 언제, 왜 주택건축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데 기초자료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집은 궁궐 내에 지어진 유일한 상류주택으로서 가치가 있다. 현재와 같은 주택으로 지어진 연대(年代)와 동기(動機) 등은 불분명하지만 조선후기 동안 이룩된 주택 및 궁궐건축의 의장(意匠)과 재료사용 및 공간의 변화 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선향재 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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