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김항(一夫 金恒)
1826(순조 26)∼1898. 조선 말기의 학자.
자는 도심(道心), 호는 일부(一夫). ≪정역 正易≫의 저자이다. 충청남도 논산 출신. 어려서부터 덕기도골(德器道骨:어질고 너그러운 도량과 재능)로 모습이 비범하였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성리학에 깊이 침잠하고 예문(禮文)에 조예가 깊었다.
20세 때 민씨(閔氏)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몄으나 살림에는 뜻이 없어 독서만 하였으며, 영가(詠歌:창가)를 계속 불렀다. 일찍이 이운규(李雲圭) 밑에서 최제우(崔濟愚)·김광화(金光華)와 함께 공부하였는데, 특히 이운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운규는 어느날 최제우·김광화·김항 세 사람을 불러놓고, 최제우와 김광화는 선도(仙道)와 불도(佛道)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그 일을 잘 하라고 당부하고, 김항은 공자의 도를 이어받아 장차 크게 천시(天時: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를 받들 것이라고 하였다.
1879년(고종 16) 이운규가 전해준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뜻을 19년 동안의 노력 끝에 스스로 깨우쳤다. 그의 수양방법은 ≪서전 書傳≫의 정독과 다독, 그리고 영가와 무도(舞蹈:춤추는 것)로 인한 정신계발이었다.
그 뒤 그에게 이상한 괘획(卦劃:주역의 기본이 되는 그림)이 종종 나타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기력이 쇠한 탓인가 생각하였으나 점점 뚜렷이 나타나므로 그것을 그렸는데, 그것이 곧 <정역팔괘도 正易八卦圖>였다.
팔괘의 명사(命寫)가 끝나자 공자의 영상이 나타나 “내가 일찍이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이렇게 장할 데가 있나.”라고 하면서 무한히 찬양하고, 호를 ‘일부’로 하라고 하였다. 이 때가 1881년이었고, 그 해에 ≪대역서 大易序≫도 얻게 되었다.
1885년 ≪정역≫을 완성하였는데, 그 무렵 논산시 연산면 도곡리 국사봉(國師峯)으로 옮기자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정역≫을 공부하였고, 뒤에 이들이 일부계 신종교의 창시자들이 되었다.
공부를 가르치기보다는 제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였으며, 혹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기보다는 타일렀고, 틀렸다고 지적하기보다는 좀 덜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그로써 그의 천성이 온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평생 낮잠을 잔 일이 없고 밤에도 거의 앉아서 지냈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앉아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주역≫을 한국식으로 풀이하여 체계화한 한국역학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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