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元公 沙溪 金長生(1548~1641)
본관 광산.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시호 문원(文元). 선조 때 서인(西人)의 중진인 계휘(繼輝)의 아들. 효종 때의 예학사상가인 집(集)의 아버지.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 11)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란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明)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난 이후인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남양(南陽)·양근(楊根)·안성·익산·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한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에 연루되어 처벌의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인목대비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속에서 더 이상의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은거하면서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의 양 주역인 김류(金瑬)와 이귀(李貴)에 의해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추천, 장령(掌令)·사업(司業) 등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어 동지중추부사·행호군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정식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것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최명길(崔鳴吉) 등과는 물론 인조와도 심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사친의 추존을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인조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1630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임명되는 등 인조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원종의 추숭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그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이후원(李厚源)·신민일(申敏一)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고, 죽은 뒤에 《사계유고(沙溪有故)》가 간행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에 제향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문원공 사계 김장생 묘소 일원 전경
사계 김장생(후)과 정경부인 양천허씨 묘소(전) 전경
사계 김장생 묘소
정경부인 양천허씨 묘소(전)-뒤의 묘소는 사계 김장생 묘소이다
정경부인 양천허씨 묘소
김장생 묘소 좌하에 위치한 묘소 젼경-제일 윗쪽부터 김선생,김철산과 배위 안동김씨, 김공휘의 묘소이다
김선생(金善생) 묘소
김철산(전)과 배위 안동김씨(후) 묘소
김공휘 묘소
문원공 사계 김장생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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