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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남 논산]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26

충문공 매죽헌 성삼문(忠文公 梅竹軒 成三問)

 

1418(태종 18)∼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창녕(). 자 근보()·눌옹(). 호 매죽헌(). 시호 충문().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18년(태종 18년) 무관 성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 '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은 삼문()이라고 지었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3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였고, 경연 시강관(),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 예조 참의(), 동부승지(), 우/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두()》를 편찬하고 경연관()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신숙주·하위지·이석정() 등과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강희안()·이개() 등과 함께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1456(세조 2)년 6월 명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환송연 자리에서 아버지 성승()과 무인 유응부() 등이 국왕 양쪽에서 칼을 들고 지켜 서있는 운검()의 기회에 세조일파를 척결하고 단종복위를 계획하였다가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礩)이 실패를 우려하여 이를 밀고하여 성삼문 등 가담자(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 전원이 처벌되었다. 체포되어 친국()을 받고 다른 주모자들(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과 함께 작형()을 당하였고,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을 받았다(유성원은 자살).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삼고()·삼성() 세 동생과, 맹첨()·맹년()·맹종()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1691(숙종 17)년에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을 내려 노량진에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게 했다. 그 밖에 홍주() 노은동()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 영월의 창절서원(), 의성의 학산 충렬사(), 창녕의 물계세덕사(), 연산()의 충곡서원() 등에 6신과 함께 제향되고 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성근보집()》이 있다.
[출처] 성삼문 [成三問 ]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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